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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 (정치인)

대한민국의 정치인 (1924–1996)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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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朴容萬, 1924년 3월 15일 ~ 1996년 10월 19일[1])은 정치인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영암(嶺巖). 경상북도 풍기군 출신이다.[2][3] 이승만에게 발탁되어 대통령비서관으로 근무했고, 자유당 창당에 참여했다.

간략 정보 박용만, 출생 ...

일본 유학 주오 대학 졸업 후 귀국,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수학했다. 해방 후 우익 청년단체에서 활동했고 1946년 7월 이철승(李哲承) 등과 함께 전국학생총연맹 창설에 참여했다. 이때 이승만의 신임을 얻어 1948년 정부수립 직후 대통령 비서관에 발탁됐다. 1950년에 원외자유당이 창당될 때 감찰부 차장으로 참여하였으나 민족청년단계(약칭 족청계) 세력에 밀려 제명됐다가 1953년 복귀, 자유당내 족청 세력을 제거했다. 1954년에 원외자유당의 선전부장이 됐다가 이기붕 등의 독단적 운영에 반발하여 탈당, 신민당에 참여했으며, 7대, 8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낙마했으나 9대, 10대, 12대,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3대 국회에서는 국회 행정위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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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생애

요약
관점

초기 활동

1924년 경상북도 영풍군 풍기읍에서 아버지 박은식(朴殷植)의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은식은 풍기읍내에서 약국을 경영했다. 학업에 열중하여 풍기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1937년 김천고보에 입학했다.

1942년 김천고보(5년제)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주오대(中央大) 전문부 법과에 입학했다. 1944년 주오대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하였고, 와세다대 문학부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1945년 와세다 대학 문학부 영문학과 재학 중 해방되자, 와세다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했다. 1946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편입하여 1949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45년 해방 직후 서울에서 유학생동맹 위원장이 되었고, 이후 우익 청년운동에 앞장섰다. 민족통일총본부 청년국 최고위원, 1946년 7월에는 이철승(李哲承) 등과 함께 전국학생총연맹을 조직하여 공동의장의 한사람이 되었다. 반공·반탁 투쟁에 앞장섰으며, 그 과정에서 이승만(李承晩)의 신임을 받아 1948년 정부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관으로 일하였다.

1951년 대한청년단 조직에 참여, 대한청년단 선전국장과 대한청년단 영주군단장을 역입했다.

정계 입문 초기

25세인 1950년에 정계에 투신하여 1973년 9대 선거에서 당선되어 이른바 '칠전팔기'의 주인공으로 회자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영주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3대, 4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하려 했으나 자유당으로부터 공천을 받지 못했다.

1950년에 원외자유당이 창당될 때 감찰부 차장으로 참여하였으나 민족청년단계(약칭 족청계) 세력에 밀려 제명되었고, 1953년에 다시 조직부장으로 복귀해서, “자유당 내 족청계를 모두 제거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총무부장 이기붕(李起鵬) 등과 함께 당내에서 족청계를 축출하는 주역이 되었다. 1954년에 원외자유당의 선전부장이 되었으나 3대 총선 후 이기붕 등 주류파의 독단적 당 운영에 반발하여 탈당하였다. 그해 자유당의 삼선 개헌, 대통령 종신제에 반대하는 공개성명을 발표하고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1958년 5월 제4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영주시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해 선거 부정을 이유로 자유당 이정희를 상대로 대법원에 당선 무효 소송을 제기, 1년 6개월만에 승소했다. 그러나 1960년 1월의 재보궐선거에서 자유당 공천으로 다시 출마한 이정희에게 2위로 석패했다.

1960년 4.19 직후 그해 7월의 제5대 총선에 사회대중당 후보자로 영주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반독재 민주수호연맹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5.16 군사 정변 직후 투옥됐다가 풀려났다. 이후 국민의 당 대변인, 야당통합 추진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신민당이 조직되자 신민당 영주군, 봉화군지구당 위원장, 신민당 경상북도지구당 부위원장이 됐다. 1967년 제7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제8대, 9대 국회의원 활동

1971년 8대 총선에 영주군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경북 영양군·영주군·봉화군 지역구에 신민당 후보자로 입후보, 당선됐다.

1977년 박용만이 환경청 의 신설 을 직접적 으로 국회 에서 제기하였으나, 집권당과 행정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4] 1978년 10대 국회의원선거에서도 신민당 공천으로 재선되었고, 그 동안 1974년 신민당 중앙위부의장, 1975년 신민당 공해문제특별위원회 위원장, 신민당 통일문제특위위원회 위원장, 1976년 당내분수습10인위원회 주류측 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유신체제 말기인 1979년에는 신민당의 YH 사건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등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다. 그는 YH 사건을 국회에 폭로하여 알렸다. 10대 국회의원 재직 시에는 환경보전법을 발의하였고, 환경청 설립을 제안하였다.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11월에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자 그도 이 규제에 포함되어 1983년 2월까지 정치활동을 금지당하였다. 1983년 2월 규제에서 풀렸다. 1983년 5.18 민주화 운동일 전후하여 김영삼이 단식 농성을 하자 그도 참여하였다.

12대, 13대 국회의원

1984년 통일적 반독재투쟁기구로서 민주화추진협의회가 조직될 때 발기인 및 상임위원과 지도위원으로 참여하고, 신한민주당 창당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1985년 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서울 성동으로 지역구를 옮겨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1987년에 신한민주당내 직선제 민주화추진세력이 집단으로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을 결성할 때 그도 이에 합류하여 김영삼(金泳三) 총재, 김대중(金大中) 고문 밑의 7인 부총재 가운데 한 명으로 선임되었다. 1987년 6월항쟁과 6·29선언을 거친 뒤 그해 7월 31일 민정·민주당 간에 8인 개헌협상이 열렸을 때는 민주당측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그는 대통령 직선제 추진 운동에도 참여했다.

민주화 개헌 후 열린 1987년의 13대 대통령선거는 집권당의 의도대로 김영삼 계열과 김대중 계열이 분열되어 각기 출마한 관계로 민주화세력의 바람과는 달리 민정당 노태우(盧泰愚)후보의 당선으로 끝났다. 1988년의 13대 국회의원 총선은 소선거구제로 전환되어 치러졌는데, 그는 성동 을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나서서 당선되었다.

그리고 여소야대(여당의 당선자가 적고 야당의 당선자가 많음.)의 총선 결과에 따라 야당에게도 국회직이 배정됨에 따라 그도 야당 사상 최초로 국회 행정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89년에 들어 그는 야권분열로 민주화 정권교체가 실패하였음을 지적하여 야권통합을 주장하였다.

생애 후반

정국은 그가 뜻한 방향과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서 야권통합이 아닌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당통합으로 나타났다. 그는 김영삼의 설득에 따라 통합된 민주자유당으로 이적하였고, 성동병지구당위원장과 당무위원, 한일협력위원회 상임위원, 한·코스타리카의원친선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92년 3월에 열린 14대 총선에 서울 성동구 병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국회로 복귀하지 못하였다. 그는 1990년대에 들어 이승만 중심의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적 시각에서 평가하는 견해들이 대두되자 반공 자유민주주의 노선의 이승만에 의한 건국의 정통성을 적극 옹호하였다.

그는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받들었으며, 그 같은 정신을 고취시키고자 1994년 자유민주민족회의를 조직하여 상임공동의장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대한민국건국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그는 의원재임시 환경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10대 의원 재직시에는 환경보전법을 발의하였고, 환경청 설립을 발의하였다.

결론적으로는 대한민국 건국에 큰 기여를 한 인물로 평가를 받으며, 정치인으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한 인물로 불린다.

1996년 추석 당일에 영주시 풍기읍 백신2리 선산에서 종친 20여명 등과 성묘 도중, 그해 10월 3일 조카 박성철(당 70세)이 휘두른 흉기에 왼쪽 가슴을 찔려 중상을 입고 중태에 빠졌다. 곧 안동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으나 계속 중태였고, 서울 영동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건 17일만에 결국 서울 영동세브란스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친조카 박성철은 서울 작은 아들의 집에 숨었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향년 7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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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훈

가족 관계

  • 부인 : 김은영(金恩榮, 1928년 ~ ?), 의사
    • 4녀
      •  : 박정희(朴正喜), 의사, 건국대학교 민중병원 방사선과장

저서

  • 『경무대 비화』

같이 보기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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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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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을 연기한 배우

참고 자료

  • 박용만선생문집간행위원회 편, 《영암 박용만 : 그 생애와 정치》 (박용만선생문집간행위원회 편, 청남기획, 1997)
  • 박용만, 《경무대 비화》 (내외신서, 1975)
  • 영주시사편찬위원회, 《영주시사 1》 (영주시사편찬위원회, 2010)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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