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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모로(Bangsamoro), 공식 명칭 무슬림 민다나오 방사모로 자치구(영어: Bangsamoro Autonomous Region in Muslim Mindanao, BARMM; 필리핀어: Rehiyong Awtonomo ng Bangsamoro sa Muslim Mindanao; 아랍어: منطقة باڠسامورو ذاتية الحكم في مينداناو المسلمة Minṭaqah Banjisāmūrū dhātiyyah al-ḥukm fī Mīndānāw al-muslimah[*])는 필리핀의 자치구로, 민다나오섬 남서부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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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ARMM)를 대체하는 BARMM은 2019년 1월 21일과 2월 6일에 서민다나오에서 실시된 두 부분으로 나뉜 법적 구속력이 있는 국민 투표에 이어 기본 법인 방사모로 유기법의 비준으로 형성되었다. 비준은 며칠 후인 1월 25일 선거관리위원회 (COMELEC)에 의해 확인되었다.
방사모로의 설립은 필리핀 정부와 여러 자치주의 단체들, 특히 ARMM의 유효성을 거부하고 중앙 정부로부터 더 많은 권한이 이양된 지역의 설립을 요구했던 모로 이슬람 해방전선(MILF) 간의 수년간의 평화 협상의 결실이었다. 방사모로에 관한 포괄적 협정으로 알려진 기본 협정은 2014년에 중앙 정부와 MILF 간에 협상되었다. 계속된 협상과 특정 조항에 대한 논쟁 끝에 필리핀 의회는 현재 방사모로 유기법으로 불리는 지역의 기본 법을 만들고 비준했으며, 이 법안은 2018년 7월 26일에 법으로 서명되었다.
대통령제 정부 체제를 가진 국가의 지역에서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게 되는 이 지역의 합헌성에 대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유기법에 대한 사법적 판결은 내려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뉜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다. 하나는 ARMM 시민들이 ARMM을 해산하고 즉시 방사모로로 대체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었고, 첫 번째 부분의 승인에 이어,[9][10][11] 라나오델노르테주와 코타바토주의 인접 시와 바랑가이들이 방사모로 지역으로 할양될지 여부에 대한 두 번째 부분이 실시되었다.[12][13][14][15] 국민 투표 두 번째 부분의 결과로 코타바토주 63개 바랑가이가 방사모로 정부에 넘겨져 자치구의 영토에 추가되었다.[16][12]
방사모로는 필리핀에서 유일하게 무슬림 다수 자치구인 ARMM을 대체했다.[17] 2025년까지 과도기에 있는 방사모로 정부는 필리핀의 헌법 개혁과 필리핀의 연방주의에 대한 더 넓은 논의의 시험장으로 간주되어 왔다.
2024년 9월 9일, 필리핀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방사모로 유기법의 합헌성을 대부분 지지했지만, 술루주는 2019 방사모로 자치 투표에서 해당 지역에 포함되는 것에 대해 단순 과반수 투표로 반대했기 때문에 자치구의 일부가 아니라고 선언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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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
최근에 만들어진 용어인 방사모로는 옛 말레이어 단어 '방사(bangsa)'(인종 또는 '국가')와 모로(스페인어 '모로(moro)', '무어'에서 유래한 필리핀의 다양한 무슬림 다수 민족 집단을 통칭하는 용어)에서 파생되었다.[19]
역사
요약
관점

초기 역사와 이슬람의 도래

필리핀 역사 대부분 동안 이 지역과 민다나오섬 대부분은 분리된 영토였으며, 이는 고유한 문화와 정체성을 발전시킬 수 있게 했다. 서부와 서중부 지역은 1565년 필리핀 대부분을 식민지화하기 시작한 스페인인이 도착하기 전부터 15세기 이래로 무슬림 필리핀인의 전통적인 고향이었다. 민다나오의 대다수는 기독교인도 무슬림도 아닌 토착 루마드족 집단의 고향이었다.
1380년 무슬림 상인이 타위타위주에 도착하여 사업을 하면서 이슬람 가르침을 원주민에게 전파하기 시작했고, 이는 원주민의 이슬람으로의 개종으로 이어졌다. 1457년 술루 술탄국이 건국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긴다나오 술탄국과 부아야 술탄국도 설립되었다. 필리핀 대부분이 스페인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기, 이 술탄국들은 독립을 유지하며 북부 스페인 해안 마을을 습격하고 영토 내 스페인 침략을 격퇴하며 필리핀에 대한 스페인의 지배에 정기적으로 도전했다. 19세기 마지막 분기까지 술루 술탄국이 스페인의 종주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 지역은 스페인에 의해 느슨하게 통제되었으며, 스페인의 주권은 잠보앙가와 코타바토의 군사 기지와 주둔지, 소규모 민간인 정착지에 국한되었다.[20] 결국 미국-스페인 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해 이 지역을 포기해야 했다.
스페인 및 미국 식민 통치

모로족은 400년 이상 스페인, 미국, 일본의 통치에 저항해 왔다. 일본, 필리핀인, 스페인, 미국에 대한 폭력적인 무력 투쟁은 현대 모로 무슬림 지도자들에 의해 방사모로(모로 국가)의 4세기 동안 이어진 "국가 해방 운동"의 일부로 간주되지만, 이 용어는 술루 군도에 있는 사람들은 훨씬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민다나오 본토에서만 사용된다.[21] 일본, 미국, 스페인에 대한 400년 간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필리핀 국가에 대한 독립 전쟁으로 변모했다.[22]
북부 및 중앙 필리핀의 필리핀인들은 자발적으로 또는 강제로 기존 도시 국가를 양보하여 스페인 정권의 일부가 되었지만, 남부 필리핀의 무슬림이 점령한 섬들은 제외되었다. 스페인의 3세기 통치는 모로족의 저항으로 인해 군도의 완전한 정복을 가져오지 못했다. 모로족을 진압하려는 스페인인들의 폭력과 잔인함은 수많은 가족을 살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결과를 낳았다.[23]
미국의 필리핀 제도의 식민 정부는 1903년에 "홈스테드 프로그램"을 시작했을 때 겨우 2년밖에 되지 않았다. 이 프로그램은 국내 비무슬림 지역의 토지 없는 인구를 민다나오의 무슬림 다수 지역으로 이주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라나오와 코타바토주에는 루손섬과 비사야 제도에서 온 이주민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이러한 이주민 유입은 토지 소유권과 루마드족 및 무슬림의 권리 박탈에 대한 긴장을 유발했는데, 이는 대부분 기독교인 이주민들이 토지에 대한 주장을 확립한 반면, 민다나오 원주민들은 당시 토지 등기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미국 주도의 홈스테드 프로그램은 나중에 독립 후 필리핀 행정부가 계속하거나 모방했으며, 나중에 더 큰 모로 분쟁의 근본 원인 중 하나로 자주 인용된다.[24]
1942년, 제2차 세계 대전의 태평양 전쟁 초기 단계에서 일본 제국군 병력이 민다나오를 침공하고 점령했으며, 토착 모로 무슬림들은 일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3년 후인 1945년, 미국과 필리핀 연방군 병력이 민다나오를 해방했고, 지역 게릴라 부대의 도움으로 궁극적으로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을 물리쳤다.
전후 시대
전국의 여러 지역에서 농업 불안을 해결해야 한다는 압력과 민다나오가 광물 자원이 풍부하고 농업에 적합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이후 필리핀 대통령들은 미국 식민 정부가 1903년에 시작한 이주 촉진 정책을 계속했다. 특히 마누엘 케손 대통령 재임 기간의 연방 기간과 나중에 우익 대통령인 라몬 막사이사이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재임 기간에 비무슬림 이주민의 대규모 유입이 발생했다.[25] 그 결과, 민다나오 원주민의 비율은 1913년에 다수였던 것이 1976년에는 소수로 줄어들었다.[25] 민다나오의 가장 좋은 토지는 정착민과 기업형 농업 소유자에게 주어졌고, 대부분의 개발 투자 및 정부 서비스는 기독교 인구에게 제공되었다. 이로 인해 무슬림 인구는 자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 중 하나가 되었고 낙후되었다.[26] 재정착 프로그램은 일부 정착민이 괴롭힘 및 기타 폭력적인 방법으로 원주민 무슬림으로부터 토지를 획득하여 무슬림을 자신의 토지에서 쫓아내는 등 전적으로 평화롭지 않았다.[27]
무슬림들은 필리핀 정부에 의해 소외감을 느꼈고, 이주민들의 경제적, 정치적 지배가 그들의 고향에서 위협적이라고 느꼈는데, 이는 수세기 전 이슬람이 필리핀에 도착했을 때 루마드족이 쫓겨났던 방식과 같은 맥락이었다. 일부 무슬림 집단은 토지를 보호하고 쫓겨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강탈과 폭력에 의존했다. 이러한 활동들은 무슬림들이 나머지 국가와 쉽게 통합되는 것을 방해했다.[28]
필리핀 정부는 이슬람법을 즉시 인정하지 않아 무슬림의 교육 시스템과 사회경제적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공립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강제로 기독교에 대해 배우게 되었고, 방사모로인들은 경제, 토지, 소유권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민다나오의 기독교 공동체에 비해 적대적이고 불공정한 행동이 지속되었다.[23]
재정착의 영향으로 전통적인 무슬림 지도자(다투(datu)라고도 불림)들도 투표에서 물러났는데, 이는 유권자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기독교인들이 그들보다 기독교인 정치인들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이들 지역 다투들은 더 이상 무슬림 땅을 통제할 수 없게 되면서 명성을 잃었다.[29] 이들 정치인들은 처음에는 무슬림 인구를 관리할 수 있었던 많은 능력을 잃었다.[30]
모로 분쟁
1968년 3월, 마닐라만에서 어부들이 지빈 아룰라(Jibin Arula)라는 무슬림 남자를 물에서 구조했다. 그들은 그가 총상을 입었으며, 나중에 "자비다 학살"이라고 불리게 될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라고 진술했다.[27][31]
지빈 아룰라의 증언에 따르면, 마르코스 행정부는 "프로젝트 메르데카"(메르데카는 말레이어로 "자유"를 의미) 작전을 위해 타우수그족 신병들을 모았다고 한다. 군은 코레히도르섬에서 이들을 훈련시켜 사바주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점령할 "자비다"라는 비밀 코만도 부대를 만들었다.[32] 훈련병들은 결국 자신들의 임무를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오늘날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논쟁 중이다. 지빈 아룰라는 반대 이유가 무엇이든, 자신을 제외한 모든 신병들이 살해되었으며, 자신은 죽은 척하여 탈출했다고 말했다.[31] 법무장관 및 국방장관을 역임했던 마르코스 충성파 후안 폰세 엔릴레는 이것이 사기극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가짜뉴스이자 "마르코스 (엔릴레)를 계엄령의 설계자로서의 죄에서 해방시키려는" 시도로 알려졌다.[33][34][35]
남라나오주에서 도모카오 알론토는 사예드 샤리프 칼링갈란 칼루앙 선장, 라시드 루크만, 살리파다 펜다툰, 하미드 캄리안, 우드톡 마탈람, 아티 마카판툰 압바스 주니어와 함께 안사르 엘 이슬람(이슬람의 조력자)을 설립했다. 이에 따르면, "이는 필리핀 이슬람의 보존과 발전을 위한 대중 운동"이다.[36] 안사르 엘 이슬람의 옹호는 나중에 모로 민족해방전선(MNLF)과 모로 이슬람 해방전선(MILF)의 창설에 영감을 주었다.
당시 남라나오주 국회의원 라시드 루크만은 학살의 궁극적인 책임이 마르코스에게 있다는 암시가 드러난 후 의회에 마르코스 대통령에 대한 탄핵 절차를 시작할 것을 촉구했다.[37] 그의 제안이 충분한 의회 지지를 얻지 못하자, 그는 무슬림 민다나오에서 무슬림들이 스스로 통치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이 신념은 그를 결국 방사모로 해방 조직(BMLO)을 설립하게 만들었다.[38] 이 조직은 나중에 모로 민족해방전선(MNLF)과 합류했다.[37]
코타바토주 주지사 다투 우드톡 마탈람(Datu Udtog Matalam)[39]은 민다나오 무슬림 사람들의 분노를 보고 이슬람 국가를 만들기 위한 지역 분리독립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무슬림 독립 운동(MIM)을 설립했다.[40] MIM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다투 우드톡 마탈람이 마르코스와 협상하여 그의 내각에서 자리를 수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회원들이 탈퇴하여 MNLF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41]
1972년 9월 23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무슬림 민다나오를 포함한 필리핀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 격동의 시기에 관계와 동맹은 사건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사바주의 최고 장관 툰 무스타파는 사예드 칼링갈란 "아푸 잉갈" 칼루앙 선장과 공통 조상을 공유했는데, 둘 다 술루의 술탄들에게서 혈통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공유된 유산은 두 지도자 간의 긴밀한 유대감을 형성하여 각 영토 간의 선의와 협력을 증진했다. 툰 무스타파의 지원으로, 알 후세인 칼루앙과 같은 인물을 포함한 MNLF 전사들의 첫 번째 간부들은 술루 루욱(현재 칼링갈란 칼루앙으로 알려짐)에서 시간을 보낸 후 사바주에서 훈련을 받았다. 다투 우드톡 마탈람의 MIM은 이미 해산되었지만, 전 멤버 중 한 명인 누르 미수아리는 계엄령 선포 한 달 후인 1972년 10월 21일에 MNLF를 설립했다.[41]
포고령 1081은 모로 지역에 이전에 설립되었던 다양한 정치 단체를 해산시켰고, MIM이 이미 해산된 상태에서 마르코스의 계엄령 선포는 이전 단체들보다 더 급진적인 MNLF가 모로 분리독립주의 운동을 지배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장했다.[42]
평화 과정
1976년 12월 23일, 당시 리비아 지도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의 중재로 필리핀 정부와 MNLF 사이에 1976년 트리폴리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 따라 민다나오에 자치 지역이 설립될 예정이었다.[43]
마르코스는 나중에 이 협정을 하나가 아닌 두 개의 지역 자치 정부(9지구와 12지구)를 설립하여 이행했으며,[43] 이는 13개 주가 아닌 10개 주를 포함했다. 이로 인해 평화 협정이 붕괴되고 MNLF와 필리핀 정부군 간의 적대 행위가 재개되었다.[44][45]
그러나 1976년 트리폴리 협정을 체결할 때, 미수아리는 MNLF의 주요 사령관 중 한 명인 살라맛 하시심과 협의하지 않았다. 살라맛은 다른 57명의 MNLF 지상 사령관들과 함께 파벌을 형성했고, 이는 나중에 모로 이슬람 해방전선(MILF)이 되었다.[46]
마르코스가 피플 파워 혁명으로 축출된 지 1년 후,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 MNLF와 1987년 제다 협정을 체결하여, 1976년 트리폴리 협정에 명시된 13개 주뿐만 아니라 민다나오 전체에 대한 자치 제안에 대해 추가 논의를 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1989년에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ARMM)를 설립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MNLF는 트리폴리 협정의 13개 주(대부분 기독교 주)가 ARMM에 포함될 것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거부했다. 그 13개 주 중 8개는 기독교가 우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는 남라나오주, 마긴다나오주, 술루주, 타위타위주의 4개 주만이 ARMM에 포함되는 데 투표했기 때문에 4개 주만을 유지했다. 이 4개 주는 당시 유일한 무슬림 다수 주였다.[45]
ARMM의 형성 및 1996년 평화 협정
1989년에 1989년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 창설 국민 투표가 실시되어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ARMM)를 창설하는 헌장이 비준되었고, MNLF의 고문인 자카리아 칸다오가 초대 지역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1996년 9월 2일, 피델 라모스 대통령 휘하의 필리핀 정부와 MNLF 사이에 최종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MNLF 지도자이자 창립자인 누르 미수아리는 협정 3일 후 지역 주지사로 선출되었다.[43] 2001년에 지역 확장을 위한 또 다른 2001년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 확장 및 포함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고, 마라위 시와 바실란주 (이사벨라 제외)가 지역에 합류했다.
MILF와의 평화 회담
1996년, 필리핀 정부와 MNLF의 경쟁 단체인 MILF 간의 평화 회담이 시작되었다.[43] 중앙 정부와 MILF 간의 첫 번째 협정은 2008년에 체결된 조상 영토에 대한 양해각서(MOA-AD)였다. 이 협정은 몇 주 후 대법원에 의해 위헌으로 선언되었다.[43] 이 협정은 방사모로 사법 기관(BJE)의 설립으로 이어질 예정이었다. 베니그노 아키노 3세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중앙 정부와 MILF 간에 두 가지 협정이 합의되었다. 2012년 10월 15일에 체결된 방사모로 기본 협정과 2014년 3월 27일에 체결된 방사모로에 관한 포괄적 협정[47][48]에는 새로운 자치구 설립에 관한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2012년, 아키노는 ARMM을 "실패한 실험"이라고 부르며 이를 대체할 방사모로라는 새로운 자치 정치 단체를 설립할 의사를 밝혔다.[49] 그의 행정부 하에서 방사모로 기본법(BBL) 초안이 작성되었지만, 2015년 1월에 발생한 마마사파노 충돌[43]로 인해 법제화되지 못했다. 이 충돌은 말레이시아 무장 세력 줄키플리 압디르("마르완"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짐)를 살해하려는 작전 후 MILF와 방사모로 이슬람 자유 전사(BIFF)의 연합군에 의해 44명의 주로 기독교인 특수 작전 부대(SAF) 대원들이 살해된 사건이었다.[50]
방사모로의 창설

아키노의 후임인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BBL의 새로운 초안이 만들어져 2018년 방사모로 유기법(BOL)으로 법제화되었다.[43] BOL 비준을 위한 국민 투표가 2019년 1월 21일에 실시되었으며, ARMM 유권자의 대다수가 법 비준에 찬성했다. 코타바토 유권자들은 새로운 자치 지역에 합류하는 데 찬성했지만, 이사벨라 시 유권자들은 포함에 반대했다. 필리핀 선거관리위원회는 2019년 1월 25일에 BOL이 "비준된 것으로 간주된다"고 선언했다.[51][52] 대다수가 포함에 반대한 술루주 주 정부도 이 법에 찬성하지 않았으며, 주지사는 대법원에 이 법의 합헌성에 이의를 제기했다. 포함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술루는 BOL에 명시된 규칙에 따라 방사모로 지역에 여전히 포함되었고, 이는 주민들의 분노를 샀다.[53][54]
2019년 2월, 북라나오주와 북코타바토주 일부 도시에서 국민투표 2차 투표가 실시되었다. 국민투표 결과, 참여한 북코타바토 67개 바랑가이 중 63개가 포함되었다. 또한 북라나오주에서는 6개 무슬림 다수 도시가 방사모로 합류를 거부했는데, 6개 도시(발로이, 무나이, 누눙간, 판타르, 타고로안, 탕칼)는 압도적인 다수로 방사모로 합류를 선택했으며, 한 도시는 100% 찬성표를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거부되었다. MILF의 주요 캠프는 북라나오주의 무슬림 지역 내에 있었다.[55][56]
과도기 과정

BOL 비준 및 2019년 1월 21일 국민투표 이후 ARMM의 폐지 과정이 시작되어 방사모로 자치 지역 설립의 길이 열렸다. BOL에 따라 2022년 새로운 지역 정부 공무원 선출까지 방사모로 전환 당국(BTA)이라는 과도기 기관이 조직되었다. 2019년 2월 6일에 실시된 국민투표 2차 투표는 북코타바토 63개 바랑가이를 포함하도록 미래 방사모로 지역의 범위를 확장했다.[57] BTA 구성원들은 2019년 2월 22일에 선서했으며, 2019년 1월 21일과 2월 6일 양쪽 국민투표 결과에 대한 의식적인 확인도 함께 진행되었다. ARMM에서 BARMM으로의 공식 인수는 2019년 2월 26일에 이루어졌으며, 이는 전자의 완전한 폐지를 의미했다.[58][59]
BARMM 출범과 방사모로 의회의 창립 회의는 2019년 3월 29일에 열렸다.[60]
무라드 에브라힘이 이 지역의 초대 최고 장관으로 취임했다.[61]
2020년, 방사모로 의회는 전환 기간을 위해 BTA를 2022년 이후 3년 더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다.[62]
2021년 10월 28일, 두테르테는 공화국법 11593호에 서명하여 BARMM의 첫 번째 정기 의회 선거를 2022년에서 2025년으로 연기했다. 이 법은 또한 방사모로의 전환 기간을 2025년까지 연장했다.[63]
2022년 9월 17일 국민투표에 따라 마긴다나오주는 남마긴다나오주와 북마긴다나오주 두 개의 주로 분할되었다.[64]
2024년 9월 9일, 대법원은 2019 방사모로 자치 투표에서 주민들이 해당 지역의 주 편입에 대해 단순 과반수로 반대했기 때문에 술루주를 BARMM에 포함시키는 것이 합헌이 아니라고 판결했다.[65] 술루주가 어떤 행정 지역에 속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필리핀 선거관리위원회는 술루주가 1989년 ARMM에 편입되기 전 소속되었던 잠보앙가반도 지방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합의를 도출했다.[66][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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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구역
요약
관점

주
방사모로는 5개 주, 3개 구성 도시, 116개 자치 단체, 2,490개 바랑가이로 구성된다. 이사벨라 시는 바실란주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자치 지역의 행정 관할권에 속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북코타바토주 63개 바랑가이 또한 특별 지리 지역(SGA)으로서 방사모로의 일부이지만, 북코타바토주와 해당 모 시는 자치 지역의 행정 관할권에 속하지 않는다.[69] 이들 바랑가이는 2024년 4월 13일 국민 투표에 따라 8개 자치 단체로 재편되었다.[70]
추가적으로 술루주는 2019년부터 2024년까지 사실상 방사모로의 일부였다.
- † 지역 센터
주지사와 부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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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통계
요약
관점
유기법에 따르면, "스페인의 필리핀 식민지화 시기에 민다나오섬과 술루 군도 및 인접 섬의 원주민 또는 원래 주민으로 간주된 사람들은 자신, 배우자 및 후손을" 방사모로 민족의 일부로 식별할 권리를 가진다.[72]
모로족은 주로 무슬림인 민족 집단을 총칭하는 용어이다. 마라나오족과 이라눈족은 이 지역 인구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마긴다나오족은 소크사르젠 지방의 코타바토주에 있는 방사모로의 특별 지리 지역의 주요 인구이다. 타우수그족, 야칸족 및 사마족은 술루 군도의 주요 집단이다.[73]
모로족 사이에는 두 개의 주요 소수 민족 집단이 있다. 바로 루마드족과 정착민 공동체이다. 루마드족 아래에는 다섯 개의 주요 집단이 있으며, 이 중 가장 큰 집단은 테두레이족이다.[72] 정착민들은 주로 기독교인이며, 타갈로그족, 일로카노족, 비사야족, 잠보앙구에뇨족 및 화교와 같은 다양한 민족 집단을 포함한다.[72][74]
언어
모로족과 루마드족은 모국어를 사용한다. 비모국어로는 일로카노어, 차바카노어, 힐리가이논어, 세부아노어, 타갈로그어가 사용되며, 이 중 후자 두 언어는 링구아 프랑카 역할을 한다. 이는 민다나오로의 세부아노 정착민 대규모 유입 때문이다. 타우수그족은 세부아노어와 타우수그어가 모두 비사야어군이기 때문에 세부아노어를 편안하게 구사한다. 차바카노어는 술루 군도 원주민의 링구아 프랑카일 수 있으며, 타갈로그어도 마찬가지이지만, 바실란에서는 주요 링구아 프랑카이다. 술루 군도의 많은 현지인과 물물교환 상인들은 사바 말레이어도 구사할 수 있다. 참조: 필리핀의 말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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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요약
관점
BOL 비준과 2025년 첫 영구 정부 출범 사이에는 BTA가 지역을 이끌게 된다. BOL 비준 후 방사모로 전환 위원회(BTC)는 ARMM을 BARMM으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조직 구조

유기법에 따르면, 방사모로 자치 정부 시스템은 의회 민주주의이며, 영국에서 시행되는 것과 유사한 웨스트민스터 체제로 정치 정당 시스템에 기반을 둔다.[78]
의례적
이 지역의 명목상의 지도자는 와알리이다. 방사모로 의회가 와알리를 선출하고 임명한다. 와알리는 영토의 도덕적 보호와 소집 및 입법부 해산과 같은 의례적인 기능과 권한을 가진다.[79]
행정
지역 정부는 최고 장관이 이끌고 있다. 무라드 에브라힘은 현 최고 장관이며, 전 필리핀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임시로 임명했다. 임시 최고 장관은 또한 BTA의 수장이며, BTA는 과도기 방사모로 의회의 기능도 수행한다.
2025년에 방사모로 의회의 첫 정기 회의가 구성되면, 최고 장관은 최다 의석을 차지한 다수당 또는 연합의 방사모로 의회 구성원들에 의해 선출될 것이다. 방사모로 최고 장관은 지역 정부의 최고 행정관이며, 최소 10명의 장관과 2명의 부최고 장관으로 구성된 내각의 보좌를 받는다. 이 직책의 보유자는 의회의 승인을 받아 내각 구성원을 임명한다. 최고 장관은 모든 지역 행정 위원회, 기관, 이사회, 국 및 사무실을 통제한다.
내각
방사모로 내각은 두 명의 부최고 장관과 장관으로 구성되며, 모두 의회 구성원 중에서 임명된다. 부최고 장관은 최고 장관의 지명을 통해 선출되며 의회 구성원들에 의해 선출된다. 내각의 장관들은 최고 장관에 의해 임명된다.[80]
지도자 평의회
지도자 평의회는 자치 지역 통치 문제에 대해 최고 장관에게 조언한다. 이 평의회는 선출되지 않은 원로원과 대략적으로 동등하며, 입법 권력이 없는 자문 역할만을 하며 의회의 일부가 아니다.[80]
입법

BOL에 따라 방사모로 의회는 자치 지역의 입법부 역할을 하며, 8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고 의장이 이끈다. 의례적인 수장인 와알리는 자신의 재량에 따라 의회를 해산할 수 있다.
지역 조례는 의회 의원들로 구성된 방사모로 의회에 의해 제정된다. 의원들은 직접 투표로 선출될 예정이다. 지역 선거는 의회의 입법에 따라 총선거(국가 및 지방) 1년 후에 실시될 예정이다. 첫 방사모로 지역 선거는 2025년에 실시될 예정이다. 지역 공무원들은 3년의 고정 임기를 가지며, 의회의 법률에 따라 연장될 수 있다.
BOL에 따라 BTA는 2025년에 새로운 지역 정부 공무원이 선출될 때까지 과도기 기구로 조직되었으며, 의회의 첫 번째 정규 입법 회의는 선거 후 2025년에 열릴 예정이다.
사법
방사모로 자치구는 전신인 ARMM과 마찬가지로 거주민에게 샤리아를 적용하는 자체 지역 사법 제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전신과 달리 2018년 8월 10일부로 발효된 BOL[81]에는 샤리아 고등법원 설립 조항이 있으며, 이 법원은 설립될 경우 수석 재판관을 포함한 5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며 상소법원, 지방법원, 순회법원을 감독하게 된다. 비무슬림도 자발적으로 샤리아 법의 관할권에 따를 수 있다. 방사모로 사법 제도는 전통법 또는 부족법도 인정하지만, 이들은 지역 내 원주민의 분쟁에만 적용된다.[82]
중앙 정부와의 관계
방사모로 유기법은 BARMM이 "필리핀 공화국의 국가 영토의 통합적이고 분리할 수 없는 부분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필리핀 대통령은 지역 최고 장관에 대한 일반적인 감독권을 행사한다. 지역 정부는 헌법 조항 및 공화국법 11054 조항에 따라 자체 수입원을 창출하고 세금, 수수료, 요금을 부과할 수 있는 재정 자율권을 가진다. 지역 정부는 외국 단체로부터 기부금 및 보조금을 받기 위해 중앙 정부의 재무부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한다.[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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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방사모로의 빈곤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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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모로 평화 과정의 다양한 성공 이전에, 이 지역의 경제 발전은 "수십 년간의 침체된 경제 성장"을 겪었다고 묘사되었으며,[92] 많은 경제 활동이 비공식 부문, 즉 갈등의 동인으로 확인된 "그림자 경제"에서 나왔다.[93]
방사모로에 관한 포괄적 협정 서명 3년 후, 방사모로 유기법 통과를 앞두고 2017년부터 방사모로의 경제 성장은 급격한 확장을 보이기 시작했다.[92]
2021년, BARMM은 7.5%의 지역 성장률을 기록하여 팬데믹 이전 국내총생산 수준을 초과했으며, 그해 필리핀에서 두 번째로 빠르게 성장하는 지역이 되었다.[94] 같은 해, 필리핀 통계청은 이 지역이 필리핀 지역 중 17.4%의 빈곤율 감소를 보였다고 칭찬했다. PSA는 인프라 프로젝트와 평화 협정이 상당한 영향을 미 미쳤다고 언급했다.[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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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정부는 초등(초등학교) 및 중등(고등학교) 수준에서 무상 교육을 제공한다. 이 지역의 일부 주립 대학/단과대학으로는 민다나오 주립 대학교 - 마라위(MSU-Marawi), 민다나오 주립 대학교 - 라나오 국립 예술 기술 대학(MSU-LNCAT), 민다나오 주립 대학교 - 마긴다나오(MSU-Maguindanao), 민다나오 주립 대학교 - 타위타위 기술 및 해양 대학(MSU-TCTO), 바실란 주립 대학(BasSC), 타위타위 지역 농업 대학(TRAC), 아디옹 기념 주립 대학(AMSC) 및 코타바토 주립 대학교(CotSU)가 있다. 방사모로 지역의 사립 대학/단과대학으로는 노트르담 대학교(NDU), 술탄 쿠다랏 이슬람 아카데미 재단 대학(SKIAFC), 필리핀 무슬림 교사 대학(PMTC), 자미아툴 필리핀 알-이슬라미아(JPI), 자미아투 무슬림 민다나오(JMM), STI 대학 - 코타바토 및 AMA 컴퓨터 대학교 - 코타바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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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무슬림, 루마드족, 기독교인을 포함한 방사모로 지역 주민들은 남부 필리핀의 무슬림 및 비무슬림 집단 사이에서 발견되는 특정 유형의 징 음악인 쿨린탕 음악을 중심으로 문화를 형성한다. BARMM의 각 민족 집단은 또한 고유한 건축 양식, 무형 문화유산, 공예 예술을 가지고 있다.[96][97] 이 지역의 독특한 건축 양식의 좋은 예는 술루의 마임붕, 술루에 있는 다룰 잠방안(Darul Jambangan) (꽃의 궁전)을 만드는 데 사용된 왕실 술루 건축 양식이다. 이 궁전은 1932년 태풍으로 심하게 손상된 후 미국 시대에 철거되었고, 재건되지 않았다.[98][99] 한때 필리핀에서 가장 큰 왕궁이었다. 1933년부터 마임붕 마을에 이 궁전을 충실히 재건하려는 캠페인이 진행 중이다. 2010년대에는 궁전의 아주 작은 복제본이 인근 마을에 만들어졌지만, 이 복제본이 술루 왕궁의 진정한 본질을 나타내지 않으므로 마임붕에 궁전을 재건하려는 캠페인이 중단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지적되었다. 2013년에 마임붕은 술루 술탄 왕좌의 가족 주장자 중 한 명에 의해 전 술루 술탄국의 왕실 수도로 지정되었으며, 그곳에 가짜 술탄들이 묻혀 있다.[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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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 유산
이 지역은 다양한 환경을 가진 광대한 자연 경관과 해양 경관을 보유하고 있다. 본토 지역에는 유네스코 잠정 목록 유적지인 리그와산 습지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호수 17개 중 하나인 라나오호가 있다. 술루 군도 지역에는 터틀 제도 야생 동물 보호 구역 (유네스코 잠정 목록 유적지), 봉가오 봉우리 및 바실란 열대우림이 포함된다.
주목할 만한 인물
- 아호드 "카기 무라드" B. 에브라힘 – 모로 이슬람 해방전선 의장, 무슬림 민다나오 방사모로 자치구 최고 장관, 통일 방사모로 정의당 당수
- 와합 M. 악바르 – 전 정치 거물 및 세습 정치인, 3선 주지사, 2007년 국회의원 당선, 2007년 11월 하원 폭탄 테러로 사망.
- 무지브 사비히 하타만 – 전 아낙 민다나오 당 목록 대표 및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ARMM) 지역 주지사 (직무대행) (2011년 12월 ~ 2013년 6월), 베니그노 아키노 3세 필리핀 대통령이 임명, 2011년 8월 정기 선거가 2013년 5월 동시 전국 및 지방 선거와 일치하도록 연기된 후.
- 압둘가니 A. 살라푸딘 – 전 MNLF 사령관,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에서 교육받음, 3선 주지사, 그 후 3선 국회의원, 마지막 두 번은 하원 부의장으로 선출.
- 올랜도 케베도 – 가톨릭 추기경, 코타바토 대주교
- 노엘 펠롱코 – 국가 빈곤 퇴치 위원회 수석 조직자
- 이마 두마가이 – 두바이에 거주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
- 로메로 두노 – 프로 복서
- 제이 자보네타 – 블로거, 자선사업가, 미디어 옹호자, 온라인 커뮤니티 조직자
- 쿠블라이 밀란 – 다작 예술가
- 벤 파랄레스 – 패션 디자이너, 무슬림에서 영감을 받은 테르노 디자인으로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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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 방사모로 기본 협정
- 방사모로에 관한 포괄적 협정
- 필리핀의 방사모로 평화 과정
- 필리핀의 연방주의
- 방사모로 인권 위원회
내용주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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