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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기면

대한민국의 축구인 (1949-1992)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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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기면(裵基冕, 1949년 ~ 1992년 6월 30일)은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이다. 포지션은 풀백이었다. 선수 시절 뛰어난 순발력과 지구력을 활용해 넓은 활동 범위를 가지는 오버래핑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으며,[1][2] 감독으로서는 조직력을 중시하는 축구를 선호했던 것으로 평가되었다.[3]

간략 정보 배기면 (裵基冕), 개인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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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경력

요약
관점

클럽

전라북도 완주군 출신으로 전주북중학교, 한양공업고등학교를 거쳤으며,[4][5] 1967년 한양대학교에 입학해 활약하였다.[6] 이후 1969년 양지 축구단에 입대했으며, 같은 해 개최된 '수재민 구호 자선 축구 경기'에서 '군 선발팀'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7] 그 뒤 1970년 양지가 해체되자 육군 축구단에 편입되었으며, 아시안 챔피언 클럽 토너먼트 1971 참가 명단에 선발되어 본선에 참여해 팀의 4강 진출에 공헌하였다.[8] 또한 그 해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당시 신탁은행 축구단과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서 성공시키는 등 팀의 우승에 기여했으며,[9] 같은 해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 당시 서울은행 축구단을 상대로 득점을 기록했으나 팀은 결승 진출에 실패하였다.[10]

이후 1972년 육군에서 제대한 뒤 외환은행 축구단에 입단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최종적으로 한양대학교로 복학해 잠시 활약했으며,[11] 1972년 새로 창단 준비중인 포항제철 축구단에 입단하기로 합의하였다.[12] 그리고 1973년 5월 3일 포항제철 축구단이 정식으로 창단하자 원년 멤버로 합류했으며, 그 해 제철소 준공 기념으로 열린 신일본제철 축구단과의 '한일 친선 실업축구대회'에 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13] 또한 1974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당시 성균관대학교와의 결승전에서 이회택의 결승골에 관여하는 등의 활약으로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으며,[14] 1975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 대회에서 몇 차례 공격 포인트를 기록해 팀의 대회 우승에 일조하였다.[15][16][17][18] 그 뒤 1976년 선수 은퇴를 선언하였다.

국가대표팀

1968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대한민국 U-20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며,[19] 홍콩과의 경기에서 경기에서 추가골을 득점하며 팀의 4-1 대승을 이끌었다.[20] 또한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 김인권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며 팀의 4-0 승리에 일조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21] 버마와의 4강전에서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대표팀은 1-1로 무승부를 이룬 뒤 추첨 결과 탈락이 확정되어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2]

이후 1970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이원화 원칙에 따라 국가대표 B팀이 신설되자 배기면은 B팀인 백호팀에 포함되었으며,[23] 같은 해 열린 자카르타 창립 기념대회에 출전하였다.[24] 또한 1972년에는 제1회 한일 정기전의 '대학 선발팀' 명단에 포함되기도 했으며,[25] 같은 해 열린 킹스컵에도 출전해 싱가포르와의 3-4위전에서 국가대표팀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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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경력

은퇴 이후 1976년 통진종합고등학교의 코치로 합류했으며, 1977년 한양대학교의 코치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1979년 최은택 감독을 보좌하며 팀의 전국대학축구연맹전 춘계 대회 우승을 견인한 뒤 지도자 코치상을 수상했으며,[27] 그 해 팀에 전국대학축구선수권대회 우승을 안기며 지도자 코치상을 수상하였다.[28] 또한 같은 해 태국에서 개최된 퀸스컵에 팀의 일원으로 참여했으며,[29] 1982년 대한민국 대학생 국가대표팀의 코치로 임명되어 유판순 감독과 함께 멕시코에서 개최된 세계 대학생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였다.[30]

이후 1982년 최은택의 후임으로 한양대학교의 감독에 부임했으며,[31] 1983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팀의 우승을 이끌며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다.[32] 그리고 1986년 팀의 전국대학축구선수권대회 2연패를 이루어내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고,[33] 1987년 대한민국 유니버시아드 국가대표팀의 코치로 임명되어 김기복 감독을 보좌하게 되었다.[34] 유니버시아드 본선에서는 소련과의 결승전에서 패해 준우승을 기록했으나 결승전을 앞두고 일부 대표팀 선수들이 포상금을 요구했다는 의혹으로 인해 김창기, 김기복과 함께 대회 이후 대한축구협회로부터 사실 관계를 조사받기도 했으며,[35] 대회 이후 대표팀 선수들과 함께 체육포장을 수여받았다.[36] 하지만 1989년 벌어진 연세대학교와의 전국대학축구연맹전 춘계 대회 경기 도중 주심의 판정에 항의하며 경기를 2분여간 중단시키다 퇴장당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37]

그 뒤 1990년 한국대학축구연맹 상벌이사를 역임했으며,[38] 전국대학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 다시 한 번 팀을 정상에 올려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다.[39] 또한 같은 해 퀸스컵에 나서 팀의 대회 3연패에 기여했으며,[40][41] 1991년 유니버시아드 대표팀의 감독을 맡아 결승전에서 네덜란드를 꺾고 대표팀의 사상 첫 유니버시아드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42][43][44] 그리고 그 해 팀의 전국대학축구선수권대회 우승에 일조하며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했으며,[45] 1992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할 대한민국 U-20 국가대표팀 감독 중 한 명으로 검토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박상인이 낙점되었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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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지병으로 고혈압을 앓고 있던 도중 1992년 6월 30일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으며,[47][48] 유해는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면의 선영에 안장되었다.[49]

기타

1975년 11월 8일 배우자와 결혼식을 올렸다.[50]

1977년에 배기면이 한양대학교에서 활동할 당시 코치였던 박경호에게 당시 한양대학교 소속의 다른 선수들과 함께 기념 반지를 마련하였다.[51]

1983년 '축구선수의 체력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작성해 한양대학교 체육학과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52] 이후 체육학과의 교수로 재직하가도 했다.[53]

선수 및 지도자 기록

클럽

국가대표팀

지도자

수상 경력

클럽

국가대표팀

감독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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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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