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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장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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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장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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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는 당나라의 선승이다.[1] 백장산(百丈山)에서 살았기 때문에 백장이라고 부르고 법명은 회해(懷海)이다.[1] 위앙종과 임제종의 제9대 조사이다.

간략 정보 백장회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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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초상화

위앙종과 임제종의 8대조사인 마조도일의 제자이다. 당대에는 백장회해와 남전보원보다 대주혜해가 더 유명했다.[2]

주요 제자로는 임제종 10대조사인 황벽희운과 위앙종을 창시한 위산영우가 있다.

일생

복건성(福建省) 복주(福州) 장락현(長樂縣)에서 출생했다.[1]

서산혜조(西山慧照)를 따라 삭발하고 형산(衡山)의 법조율사(法朝律師) 밑에서 구족계(具足戒)를 깨우쳤다.[1]

여강(廬江)의 부차사에 들어가 그곳의 경장(經藏) 안에서 대장경(大藏經)을 연구하였다.[1]

그 후 백장은 767년 무렵에는 남강(南康)에서 마조도일(馬祖道一)을 만나 사사받았다.[1] 마조 밑에서 수도해 대오하였다.[1]

후에 백장산에 들어가 많은 문하생 제자를 지도하고 교화하였다.[1]

일화

마조완월(馬祖玩月) : 마조도일이 달을 희롱하다

어느 날, 마조도일이 수제자인 서당지장, 백장회해, 남전보원과 함께 달맞이를 갔다. 마조도일은 제자들에게 지금 같은 때에 무엇을 하면 가장 좋겠느냐고 물었다.[3]

서당지장은 공양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대답했다. 백장회해는 수행하기에 가장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남전보원은 소매를 뿌리치고 그냥 가버렸다.[4]

마조도일이 말하기를, 경(經)은 서당지장에게 들어가고, 선(禪)은 백장회해에게 돌아가는데, 오직 남전보원만이 경계에서 벗어낫구나라고 했다.[5]

<백장청규>(百丈淸規)

백장회해는 <선원청규>를 제정하여, 선사를 율사로 부터 독립시켰다. 선종 1대 조인 달마대사부터 이때까지 율원에 더부살이를 하던 선원을 독립시켜 선종총림을 수립되게 하였다.[6]

이 말의 뜻은 설명하자면, 현재 대한민국 사찰 중에 총림이라고 하여 선원, 강원, 율원을 모두 갖춘 큰 사찰이 있다.[7] 사찰은 백장회해가 <청규>를 제정하기 이전에는 율원(경전을 공부하는 곳)이 중심이 되어 선원(선수행을 하는 곳)이 더부살이를 했는데, <청규> 제정 이후에는 독립이 되어 총림이라고 하는 큰 절이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백장회해의 <청규>를 <백장청규>라고 하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장로(長老)를 방장(方丈)으로 추대하여 법을 설하게 한다.
  • 불당(佛堂)을 세우지 않고 중앙에 법당(法堂)을 세운다.
  • 전 대중이 보청(普請)법에 의거하여 노동생산에 참여한다.
  • 대중생활에서 규범을 어긴 자에 대한 벌칙을 세운다.[8]

<청규> 중에 노동생산 참여 규정은 백장회해가“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말로 강조했다. 노동 자체가 선수행이라고 보았다. 조선시대 말에 용성(龍城), 학명(鶴鳴)에 의해 선농불교(禪農佛敎)로 이어졌다.[9]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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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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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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