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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주의

사람이나 폭력이 아닌 법이 지배하는 국가원리, 헌법원리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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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주의(法治主義, 영어: rule of law, nomocracy)는 사람이나 폭력이 아닌 법이 지배하는 국가원리, 헌법원리이다. 공포되고 명확하게 규정된 법에 의해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를 포함한 모든 국가권력을 제한·통제함으로써 자의적인 지배를 배격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법치주의의 근원적 이상은 통치자의 자의에 의한 지배가 아닌 합리적이고 공공적인 규칙에 의한 지배를 통해 공정한 사회협동의 체계를 확보하려는 데에 있다.[1] 사회 내 특정 세력이 다른 세력을 압도할 만한 힘을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법의 지배는 부각되고 정치행위 주체들은 법에 의거해 갈등을 해결하려 한다.[2] 사상적 연혁에 따라 법의 지배(Rule of Law)나 법치국가(Rechtsstaat) 원리로도 불린다.

법치주의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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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법치주의 지수(2017 - 18). 녹색에 가까울수록 법치주의의 실현도가 높으며 적색에 가까울수록 그러하지 않다.

법치주의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시대적 연원, 사상적 전개에 따라 견해가 나뉘고 있다. 법치주의의 정의(定義)부터가 각자가 처한 시각과 입장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규정되기 때문이다. 근대 법치국가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략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법치주의 사상의 전개

요약
관점

현대적 의미의 법치주의 사상은 주로 서구에서 전개되었고 근대 이후 전 세계로 확산되어 많은 나라에서 통치 원리, 국가 원리로 기능하고 있다. 서양 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법을 통한 통치와 법의 중요성이 논의되어 왔으나 오늘날 구현된 법치주의 원리와는 차이가 있다. 새뮤얼 P.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법치를 다른 문명과 구별되는 서구 문명의 특성으로 파악한다.

고대 그리스

오늘날의 법치주의 사상은 고대 그리스플라톤(Plato)의 법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법률》(Laws)에서 누구라도 법의 지배하에 있을 것을 피력하였다.[3]

법이 정부의 주인이고 정부가 법의 노예라면 그 상황은 전도유망하고, 인간은 신이 국가에 퍼붓는 축복을 만끽할 것입니다.

그는 철인왕에 의한 지배가 이상적이지만, 법의 지배는 차선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사상을 이어받아 법의 지배 사상을 강조했으며, 가장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욕망의 지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법으로 하여금 지배하게 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그는 법의 지배를 “욕망없는 이성의 지배”로 규정했다.[4]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법치는 ‘isonomia’로 집약될 수 있다. 이는 개혁정치가 솔론이 확립하고 정치적 전통에 의해 계승된 정체로서, 모든 사람에게(단 자유인인 남성) 법은 평등하게 공히 적용되고 공포된 법규에 의해 법적 안정성이 확보되는 정체를 의미한다. 그때그때에 형성되는 다수의 의사조차도 법 아래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그리스의 법치는 로마로 건너가 법치주의는 더욱 체계화된다.

중세 잉글랜드

근대적 법치주의의 등장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의 법률 공포에 결정적으로 의존하였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찬양하는 코먼로(common law)의 기원을 보더라도 명확하다. 법은 사회규범의 탈중앙적인 변천에 근거한다는 하이에크의 근본적 견해는 넓은 의미에서 바람직하다. 근대 이전이나 근대나 말이다. 그러나 그런 법의 변천에는 큰 불연속성이 있으며, 그것은 정치권의 개입으로만 설명되고, '자생적 질서'의 과정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하이에크는 자신이 제시한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를 범했다.[5]

이런 이행 중 하나는 잉글랜드에서 관습법(customary law)이 코먼로로 바뀌는 과정 자체였다. 코먼로는 단지 관습법을 공식화, 성문화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두 가지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법이다. 부족사회에서 국가사회로 변모하면서 법의 의미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부족사회에서, 개인들 사이의 정의는 어느 정도 지금의 국제 관계처럼 상위의 제3자의 규칙 강제가 없는 상태에서 라이벌끼리의 자력 구제에 의존하였다. 반면 국가사회에서는 그런 규칙의 강제자, 바로 국가 자체가 존재하므로 그와는 다르다.[6]

로마제국 멸망 이후의 잉글랜드는 부족사회였고, 앵글족, 서부 색슨족, 주트족, 켈트족 등등의 여러 부족들이 혼재된 상태였다.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구들이 모여 촌락을 이루고, 촌락들은 헌드레드(100가구가 들어갈 만큼 큰 구역)나 카운터로 묶였다. 그 상위에 왕이 있었지만, 이 초기 군주들은 권력을 독점하고 부족 단위에 규칙을 강제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영토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아니라 부족의 왕으로 스스로를 바라보았다. Rex Anglorium, 앵글족의 왕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기독교는 6세기 말, 베니딕트회의 수도사 어거스틴이 이 땅에 온 후부터 앵글로색슨의 부족 조직을 와해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부족 법률의 실효 과정은 점진적이었고, 기원후 1000년에 이를 때까지 혼란스러운 세기 동안 살아남았다. 친족 집단 내에는 강력한 유대 관계가 있었으나, 라이벌 씨족 사이의 적대감과 상호 경계도 있었다. 따라서 정의는 부족민들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는 과정에서 틀이 잡혀갔다.

알려진 중에서는 앵글로색슨 부족 법률로 가장 먼저 결집된 것은 600년 전후의 '애설버트법'이다. 이는 메로빙거 왕조클로비스가 통치하던 때의 살리카 법보다 약간 뒤의 것이면서, 꽤 비슷했다. 적어도 여러 가지 상해 사건에 대해 베르겔트를 길게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말이다.

앞니 네 대는 각각 6실링의 가치가 있으며, 그 양쪽 이는 4실링, 나머지는 1실링의 가치가 있다. 엄지손가락과 그 손톱, 집게손가락, 가운뎃손가락, 약손가락, 새끼손가락과 그 각각의 손톱은 개별적으로 계산되며, 핫(hot)이라 불리는 베르겔트가 매겨진다. 마찬가지로 귀가 상해를 입었을 때도 개별적으로 다른 베르겔트를 매기는데, 청력이 손상된 경우, 귀가 잘린 경우, 귀에 구멍이 뚫린 경우, 귀가 찢긴 경우다. 또한 뼈가 드러났을 때, 뼈에 금이 갔을 때, 뼈가 부러졌을 때, 두개골이 파열되었을 때, 어깨가 부서졌을 때, 턱이 부서졌을 때, 쇄골이 부러졌을 때, 팔이 부러졌을 때, 다리가 부러졌을 때, 갈비뼈가 부러졌을 때가 각기 다르며, 옷 위의 부위에 상처가 났을 때, 옷 안쪽의 부위에 상처가 났을 때, 내상을 입었을 때가 각기 다르다.[7]

베르겔트 벌금의 특징 하나는 불평등성이다. 서로 다른 상황에 주어지는 배상은 상해를 당한 피해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달라졌다. 그래서 자유인을 살해했다면 하인이나 농노를 살해한 경우보다 훨씬 많은 배상을 해야 했다.

게르만의 부족법은 다른 부족사회의 법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누에르족이나 현대 파푸아뉴기니 완톡의 법과 엇비슷했다. 누군가 나를, 또는 나의 부족원을 다치게 하면, 나의 씨족은 집단의 명예와 신뢰를 지키기 위해 보복을 해야 한다. 보통 다치게 한 장본인에게 직접 보복할 필요는 없으며, 그의 가까운 친족이면 된다. 베르겔트는 장기 분쟁이나 부족간 벤데타로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일을 무마하는 데 쓰였다.

근대적 법원은 유혈 분쟁을 중재하기 위한 부족 간 회의에 먼 기원을 두고 있다. 앵글로색슨 부족들은 무트, 즉 외부인을 참여시킨 회의에서 이런 기능을 수행하였다. 무트는 원고와 피고의 증언을 듣고, 적절한 배상 방법을 산정하였다. 그러나 근대 법정처럼 증인을 강제로 소환할 힘은 없었다. 법적 증거라는 것은 흔히 시련에 근거했는데, 피고를 맨발로 타오르는 석탄이나 보습 위를 걷게 하기, 찬물이나 뜨거운 물에 집어던져 뜨는지 가라앉는지를 보기 따위였다.[8]

프리드리히 니체가 나중에 본 것처럼, 기독교의 도입은 게르만 부족의 도덕 문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기독교 영웅들은 평화 지향적인 성인이나 순교자였지, 전사나 복수심에 불타는 정복자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명예를 중시하는 부족사회의 위계질서에 정면 충돌하는 보편적 평등의 교리를 가르쳤다. 결혼과 상속에 대한 기독교의 새로운 규칙은 부족의 단결을 무너뜨리기만 한 게 아니다. 부족 정체성이 아니라 공동의 신앙에 기반한 보편적 공동체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왕의 개념은 공동 조상을 가진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것에서 보다 범위가 넓은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이자 수호자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런 변화는 매우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기독교 사회에서 부족 체제가 붕괴했다는 것이 가산제가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동방 정교회에서처럼, 이 시대의 가톨릭 사제와 주교들은 결혼해서 자녀를 갖는 일이 허용되고 있었다. 그들은 니콜라이주의라 불리는 사제판 축첩제도 실시하였다. 기부를 통해 교회의 재산이 늘어나는 가운데,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의 성직록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지역의 씨족 및 부족정치에 매몰되는 일은 불가피했다. 그만큼 큰 부가 걸려 있는 상황에서, 교회직은 시모니아(성직 매매)라 불리는 관행에 따라 사고 팔 수 있는 중요한 재산이 되어갔다.

게르만 이교도들의 기독교 개종은 마치 아랍과 투르크 부족사회에서 이교도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했을 때처럼 하이에크의 자생적 질서론에 흥미로운 반대 사례를 제공한다. 하이에크의 표를 훑어보면 종교 항목은 전혀 나오지 않지만, 종교는 분명 유대교,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사회에서 중요한 법규의 원천을 마련하였다. 유럽에 기독교가 도입된 것은 부족 관습에서 비롯된 법의 변천이 처음으로 큰 불연속성을 만난 계기였다. 결혼과 상속 법규가 바뀌어 여성의 재산 소유가 허용된 일은 일부 지역 판사나 공동체가 실험한 결과 성립된 자생적 변화가 아니었고, 강력한 계층적 구조, 즉 가톨릭교회가 밀어붙인 의도적 혁신이었다. 교회는 지역의 가치에 정반대로 행동했다. 동방교회도 이슬람 교회도 각자의 사회에서 기존의 친족 법규를 그런 식으로 바꾸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교회 자체가 이것이 단지 관습법을 추인하는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교황 우르바노 2세가 1092년에 플랑드르 백작에게 말했듯, "그대는 이제까지 이 땅의 옛 관습에 따라서만 해왔다고 주장하는가? 그대는 알아야 하오. 그럴지라도, 저 창조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나의 이름은 진리이노라'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지는 않으셨소. '나의 이름은 관습이노라.'"[9]

영국 법률 변천의 두 번째 중대 불연속은 코먼로의 도입 그 자체였다. 코먼로는 관습법의 자생적 변천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았다. 초기 잉글랜드 국가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며, 결국 지배력을 가졌던 데는 국가권력의 힘이 결정적이었다. 사실 영어 사용권 전체에서 코먼로가 기본법으로 자리 잡은 것은 노르만 정복 이후 국가권력 증대의 주된 동력이었다. 위대한 법학자들인 프레데릭 메이트랜드와 프레데릭 플록은 코먼로의 기원을 이렇게 말한다.

왕의 법정의 관습은 잉글랜드의 관습이었고, 그것이 코먼로가 되었다. 지방 관습에 대해서는, 왕의 재판에서 일반적인 존중을 표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배제하려는 어떤 의도적인 노력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지방 관습이 박멸되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더 이상 성장할 수도 없었다. 특히 법적 절차에 대한 한, 왕의 법정, 이제는 다른 모든 법정을 통제할 힘을 얻은 법정은 그 규칙을 유일하게 정당한 규칙으로 삼는 데 민첩했다.[10]

이 과정은 초기 유럽 왕들의 역할을 평가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11세기의 왕들은 영토를 지배하는 군주가 아니라 탈중앙적인 봉건 체제에서 동등자 중의 최고일 뿐이었다. 윌리엄 1세헨리 1세 같은 군주는 대부분 길 위에서 삶을 보냈다 할 만큼, 왕국을 이리저리 순행하며 지냈다. 그것이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고 자꾸만 촌락들로 물러나고 영지별로 고립하려는 각 지역을 계속 이어주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왕이 제공할 수 있는 중요한 봉사의 하나는 그 지역의 영주들의 재판 결과에 불만을 품은 지역민들에게 항소할 법정을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왕 입장에서도 자신의 법정의 관할 구역을 넓히는 일이 흥미로웠다. 그 일을 통해 수입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왕의 법정에 항소하는 일은 왕의 권위를 높여주었으며, 지방 영주의 권위는 왕에 의해 그가 내린 판결이 뒤집히면서 실추되었다.

법치국가

독일에서 전개된 법치주의 사상은 경찰국가관료국가에 대비되는 국가원리로서 법치국가(法治國家) 이론이다. 법치국가 사상을 광의로 해석하면 그 통치 권력이 법에 따라 행사되는 국가 체제이지만, '법에 따라'라는 메르크말의 다의성(多義性)에 대응하여 여러 역사적 내용과 형식을 가졌다. 오토 마이어법률우위의 원칙을 주창하며 행정의 법률적합성을 기반하는 국가가 법치국가라고 보았다. 칼 슈미트는 “법치국가는 국가권력의 제한과 통제의 원리로서 시민적 자유의 보장과 국가권력의 상대화체계를 구성요소로 한다”라고 피력하였다.[11][12]

독일에서 법치국가 사상은 국가의 활동을 법질서의 유지와 개인권(個人權)의 보장에 한정하는 자유주의적 요구로서 나타났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가 사회적 현실의 관점에서 실현이 불가능하며 의회의 입법 참여의 실현에서 보아 불필요하게도 된 까닭에, 법치국가는 의회가 제정한 법률이 행정을 구속한다는 의미로 전화(轉化)되었다. 따라서 권력분립이 정해지고, 국민의 권리·자유를 침해하는 행정이 법률에 기하여 행하여지고, 이 행정의 법률 적합성을 재판에 의해 보장하는 제도가 설치되어 있으면 ‘법치국’이 실현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법치국 체제를 외견적으로 유지하면서 불법의 체계를 만들어낸 나치스의 독재를 경험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에서는 재차 법치국가가 실질적으로 이해되었다. 법치국이기 위해서는 형식적 법치국 사상이 요구하는 여러 요건에 더하여 법의 최고가치인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기 위하여 불가결한 제도, 예를 들면 직접으로 국가 권력을 구속하는 것으로서의 기본권의 보장, 법원에 의한 법령의 합헌성(合憲性)의 심사, 기본권의 침해에 대한 일반국민으로부터의 헌법소원(憲法訴願) 등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13]

동양의 법치사상

동양에서는 법의 중요성과 법에 의한 통치를 강조한 법가가 있다. 《한비자(韓非子)》〈유도(有度)〉편을 보자.[14]

奉法者強 則國強; 奉法者弱 則國弱.(법을 받드는 것이 강하면 강한 나라가 되고, 법을 받드는 것이 약하면 약한 나라가 된다.)

法不阿貴, 繩不撓曲. 法之所加, 智者弗能辭, 勇者弗敢爭. 刑過不避大臣, 賞善不遺匹夫.(법은 귀족을 봐주지 않는다. 먹줄이 굽지 않는 것과 같다. 법이 시행될 때에 지자도 이유를 붙일 수 없고 용자도 감히 다투지 못한다. 과오를 벌할 때에 대신도 피할 수 없으며, 선행을 상 줄 때에 필부도 빠트리지 않는다.)

신분의 귀천과 지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함과 법의 엄정성을 강조했다. 또한 동양의 정치원리는 유학이 지배적이었지만 국가권력의 발동의 기저에는 법치적 사상이 일정 토대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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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실질적 법치주의

요약
관점

국왕의 절대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이념과 제도로 발전한 법치주의는 시민혁명의 촉발로 서구 근대국가의 기본적 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부르주아 세력은 국왕을 절대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부르주아가 중심으로 구성된 의회의 의사로 구현된 법을 그 권좌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 행정과 사법은 의회가 제정한 법 그대로의 소임을 다하는 역할이 부여되었다. 따라서 의회가 적법한 절차를 거쳐 법을 제정하기만 했다면 그 법의 목적이나 내용은 문제삼을 수 없으며 법치주의는 형식적인 통치원리로 인식되었다. 이를 형식적 법치주의라고 한다. 이는 의회를 장악한 다수의 횡포, 대중을 선동하여 등장한 독재자의 전제를 견제할 수 없었다. 오히려 권력자의 통치권에 정당성을 부여하여 독재를 강화하는 역기능을 낳고 말았다.

히틀러의 만행이 당시 합법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Never forget that everything Hitler did in Germany was legal).
 
Martin Luther King, Jr. quotes, Thinkexist.com.

형식적 법치주의의 패배는 바로 이 아돌프 히틀러나치 독일에서 극적으로 나타났는데 법을 오직 통치의 수단으로서만 이용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탄압하는 법률적 불법(Gesetzliches Unrecht)의 탄생을 낳았다. 파시즘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몰락하고 형식적 법치주의는 이른바 실질적 법치주의에게 자리를 내준다. 공권력의 행사가 법률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할지라도, 법률 그 자체의 내용이 정당하지 않다면, 이는 법치주의를 벗어나는 외견적 법률주의에 불과하다. 실질적 법치주의는 인간의 존엄을 바탕에 두고 기본권을 보장하며 실질적 평등을 추구한다. 요컨대, 형식적 법치주의는 합법성 하나에 초점을 두었지만, 실질적 법치주의는 합법성과 더불어 정당성에도 초점을 둔다. 전후 실질적 법치주의의 득세로 인하여 대부분의 국가는 헌법의 규범력을 강화하고 위헌법률심사제를 구축함으로써 단순한 법의 지배가 아닌, "정당한" 법의 지배를 꾀하고 있다.

이로써 선거를 거쳐 형성된 다수 세력의 정치적 의사로 확립된 법률들이 소수의 법관(대법원의 판사나 헌법재판소의 재판관)들에 의하여 무효화되는 사례가 적지 않게 되었다. 이런 사례들이 나타나면서, 헌법재판소(또는 대법원)의 권한 및 그 범위에 대한 논쟁,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충돌과 조화 문제, 통상 보수 성향을 가진 법관의 구성 논쟁, 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와 사법의 정치화 문제, 사법적극주의사법소극주의의 대립 등 여러 논의들이 있어왔고 진행 중이다.

대한민국의 경우, 근대적 법체계가 도입되기 이전부터 법의 실질을 요구하는 법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예법일치(禮法一致)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15] 광복 이후 근대적 사법체계가 도입된 이래 형식적 법치주의의 기틀조차 탄탄하지 못하여 법의 형식성 측면에서 부족한 법제도와 법문화를 드러냈다. 실질의 측면에서도 군부 독재를 거치면서 행정부 우월의 삼권분립이 형성되었고 사법부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했으며 헌법의 규범력은 약한 편이었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 때, 국가배상법 등에 대한 위헌판결에서 위헌의견에 가담한 대법원판사들이 법관재임용과정에서 전원탈락하였고 그 법률이 헌법에 들어가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군부 독재 안에서도 형식적·실질적 법치주의의 구현을 위하여 노력한 법률가와 일반 국민이 있어 왔고 6·10 민주항쟁이후 민주헌정 시대로 접어들면서 헌법의 규범력이 강화되고 사법부의 독립성이 제고되었으며 독재자 1인의 지배가 아닌 민주적 토론과 절차를 통해 도출된 법의 지배가 한층 강화되었다. 제6공화국부터 설치된 헌법재판소는 법률의 위헌 여부를 심사하여 기본권의 보장과 헌법적 가치의 실현을 위해 노력 중이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신행정수도법 위헌 확인 결정과 같은 정치적인 사건에서 헌법재판소의 역할이 부각되면서, 정치의 사법화 논쟁과 헌법재판소의 역할과 권한 등이 열띠게 논의되었다.

법치주의의 수명자

법치주의는 규범화된 질서적 체계 또는 원리이며 따라서 규범에 대응하는 수범자가 있기 마련이다. 국가공무원을 포함하는 국가권력이 법치주의의 수명자인 것은 법치주의의 이념과 연원상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반 국민도 법치주의의 수명자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나뉘고 있다. 이에 대해 국가권력을 수명자로 하는 법치주의를 협의의 법치주의로, 일반 국민도 수명자로 포괄하는 법치주의를 광의의 법치주의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한편, 광의의 법치주의는 법준수의무로 풀이될 수 있으므로 국가공무원을 수명자로 하는 협의의 법치주의만 인정하는 견해가 있다.[16] 법준수의무는 법규범 자체의 당연한 요청이므로 법치주의에는 법준수의무가 내용에 포함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17]

대한민국의 판례

요약
관점

우리 헌법은 국가권력의 남용으로부터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려는 법치국가의 실현을 기본이념으로 하고 있고…
 
헌재 1992. 4. 28. 90헌바24, 판례집 4, 225, 230.
민주법치국가에서 모든 행정(과 재판)이 법률에 근거를 두어야 하며…
 
헌재 1990. 9. 3. 89헌가95, 판례집 2, 245, 267.
우리 헌법은 국가권력의 남용으로부터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려는 법치국가의 실현을 기본이념으로 하고 있고 그 법치국가의 개념에는 헌법이나 법률에 의하여 명시된 죄형법정주의소급효의 금지 및 이에 유래하는 유추해석금지의 원칙 등이 적용되는 일반적인 형식적 법치국가의 이념뿐만 아니라 법정형벌은 행위의 무거움과 행위자의 부책에 상응하는 정당한 비례성이 지켜져야 하며, 적법절차를 무시한 가혹한 형벌을 배제하여야 한다는 자의금지 및 과잉금지의 원칙이 도출되는 실질적 법치국가의 실현이라는 이념도 포함되는 것이다.
 
헌재 2002. 11. 28. 2002헌가5, 판례집 14-2, 600, 606.
대통령에게 초헌법적인 국가긴급권을 부여하고 있는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은 헌법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반입헌주의, 반법치주의의 위헌법률이다.
 
헌재 1994. 6. 30. 92헌가18, 판례집 6-1, 557, 569.
법치국가원리의 한 표현인 명확성의 원칙은 기본적으로 모든 기본권제한입법에 대하여 요구된다. 규범의 의미내용으로부터 무엇이 금지되는 행위이고 무엇이 허용되는 행위인지를 수범자가 알 수 없다면 법적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은 확보될 수 없게 될 것이고, 또한 법 집행 당국에 의한 자의적 집행을 가능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헌재 2002. 1. 31. 2000헌가8, 판례집 14-1, 1, 8.
법치국가원리의 한 표현인 명확성의 원칙은 기본적으로 모든 기본권제한입법에 대하여 요구된다. 규범의 의미내용으로부터 무엇이 금지되는 행위이고 무엇이 허용되는 행위인지를 수범자가 알 수 없다면 법적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은 확보될 수 없게 될 것이고, 또한 법집행 당국에 의한 자의적 집행을 가능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법문언이 법관의 해석을 통해서 그 의미내용을 확인해낼 수 있고, 그러한 해석이 해석자의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좌우될 가능성이 없다면 명확성의 원칙에 반한다고 할 수 없다.
 
헌재 2012.5.31. 2009헌마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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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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