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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전투 (19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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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전투 (중국어 정체자: 北京之戰), 또는 북경해위전 (중국어 정체자: 北京解圍戰)은 1900년 8월 15일 베이징에서 벌어진 전투로, 열강 8국의 연합군이 의화단 운동 시기 베이징 공사관 지구포위를 풀어냈다. 1900년 6월 20일부터, 의화단청나라군 병력은 오스트리아-헝가리, 벨기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제국, 일본, 네덜란드, 러시아 제국, 스페인, 미국 등 영사관 내 외교관, 민간인, 군인 등을 에워싸 포위하였다.

간략 정보 베이징 전투, 날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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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영국의 제독 에드워드 시무어가 이끄는 2,000명이 조금 넘는 해병대 및 수병으로 구성된 구원 병력의 영사관 지구에 대한 첫 구원 시도는 6월 26일 강한 저항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8월 4일에 이른바 열강 8국으로 이뤄진 훨씬 많은 2차 구원 병력이 페킹(베이징)을 향해 톈진에서 출발하였다:

다른 사료에서는 총 병력을 18,000명이라 제시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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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8월 북경의 영사관 지구 포위를 해방하기 위한 열강 8국 연합군의 진로

연합군은 8월 5일 베이캉 전투와 8월 6일 양군 전투에서 중국군에 승전을 거두고 8월 12일 베이징에서 약 22km 떨어진 퉁저우에 도달했다.[3] 구원군은 일사병과 열사병으로 그 수가 많이 줄어들었고 베이징 공격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10,000명을 크게 넘지 못했다.[4]

영국, 미국, 일본의 지휘관들은 8월 13일에 베이징 공격을 가하길 원했으나, 러시아 지휘관 측에서 공세 준비 기간이 필요하여 8월 13일은 정찰 및 휴식에 전념해야 한다고 하였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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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연합군의 목표는 베이징 시내로 진입하여 공사관 지구로 진격한 뒤, 6월 20일부터 중국군에 포위되어 있던 900명의 외국인들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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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이 살아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생존자들이 걸어 놓은 성조기[6]

북경은 상당한 방어 시설물을 갖추고 있었다. 이 도시는 길이가 30km가 넘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16개의 문이 존재했다. 내성(타타르 시, Tartar City) 주변 성벽은 높이 12m에, 상단의 폭도 12m에 달했다. 인접한 외성 주변 성벽은 높이가 9m이었다. 성벽 내 거주 인구는 약 백만 명 정도로, 대부분은 의화단 및 공사관 지구 내 중국군과 외국군의 충돌을 피해 달아난 상황이었다.[7]

연합군은 8월 13일에 성벽으로부터 약 8km 떨어진 지점에 자리를 잡았고 이들은 도시 안쪽에서 들려오는 대포와 기관총의 격렬한 사격음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동포들을 구출하기엔 하루 늦은 것이 아닌가 두려워했다.[8]

구원군은 공사관 지구로 궁핍한 중국인 기독교들이 대피한 것과 공사관 지구에서 5km도 안 되는 지점에서 포위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시스쿠 천주당이 6월 15일부터 의화단과 중국군에 둘러싸여 있었다. 성당을 지키고 있던 이들은 외국인 사제 및 수녀 28명과 프랑스와 이탈리아 군인 43명, 3,400명의 중국인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성당으로 대피한 이들은 대부분 굶주림, 질병 그리고 성당 벽 아래에 설치된 폭약으로 수백 명이 사망했다.[9] 공사관 지구 내 외국인 900명 중 66명이 포위 중에 사망했고 150명이 부상을 입었다. 중국인 기독교도 가운데 사상자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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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요약
관점

베이징에 대한 공격은 어느 나라의 군대가 먼저 공사관 구역을 구출해 영예를 차지하느냐를 겨루는 경쟁의 양상을 띠었다.[11]

4개 국가의 지휘관들은 각자가 다른 지점의 문에서 공격을 가하기로 합의했다. 러시아군은 대부분 북쪽문인 Tung Chih (Dongzhi)에 배치됐고, 일본군은 그 옆인 남문 (Chi Hua, Chaoyang)에 배치됐으며 미군은 Tung Pein (Dongbien), 영국군은 대부분이 남쪽 Sha Wo (Guangqui)에 있었다. 프랑스군은 공격 계획에서 배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군이 맡은 문이 공사관 지구와 가장 가까웠고 가장 먼저 공사관에 도달할 최고의 기회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러시아 측이 계획을 어겼으며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불명확하다.[12] 미군이 맡은 문 Dongbien으로 8월 14일 약 3:00 a.m경 러시아 선봉대가 도착하였다. 이들은 문 밖에서 중국군 30명을 사살하고 포대를 사용해 문에 구멍을 냈다. 그러나 일단 성문 안으로 진입하자, 내문과 외문 사이의 뜰에서 그들은 치명적인 교차사격에 휘말렸고, 그로 인해 러시아 병사 26명이 전사하고 102명이 부상당했다. 생존자들은 그 후 몇 시간 동안이나 움직이지 못한 채 꼼짝없이 고립되어 있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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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베이징은 여러 문이 달린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지도에 8월 14일 아침 외국군의 위치가 나타나 있다. 일본군, 러시아군, 영국군운 문을 통과해 도시로 진입하려 했다. 미군은 성벽을 타고 넘어갔다.

미군이 본인들에게 할당 받은 문에 도착한 아침에 이들은 러시아군이 이미 그곳에서 교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남쪽으로 약 180 미터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는 군악병 캘빈 P. 타이터스는 약 9m에 달하는 벽을 자원해서 타고 올라가는데 성공한다. 다른 병사들도 그를 따랐고, 11:03 a.m.에 성조기가 외성의 성벽에 걸렸다. 미군은 성벽 위에서 중국군을 향해 총격을 가했고 그런 다음 내려가 내성의 성벽 그림자 아래에 있는 공사관 지구가 있는 서쪽으로 향했다.[14]

한편, 일본군은 본인들이 맡은 성벽에서 완강한 저항을 맞닥뜨리며 포탄 세례를 퍼붓고 있었다. 영국군은 훨씬 간단했는데, 맡은 관문인 Shawo 또는 Guangqui으로 접근하여 통과하였고, 사실상의 어떠한 저항도 접하지 못하였다. 미군들처럼, 영국군은 공사관 지구로 가장 쉬운 출입구가 도시 내성의 성벽 아래로 지나가는 배수로인 이른바 수문(Water Gate)을 통하는 것이라는 걸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도착하고 나서, 배수로의 진흙탕을 헤치며 공사관 지구를 향해 나아갔고, 이들이 도착했을 때, 포위되어 있던 사람들은 모두 8월 14일 2:30 PM에 가장 좋은 옷으로 입은 채 환호하며 그들을 맞이했다. 공사관 지구를 둘러싸던 중국군은 총격을 가하여, 한 벨기에 여성을 부상 입힌 후, 퇴각하였다. 영국군은 일사병으로 쓰러진 한 명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어떠한 사상사도 없었다.[15]

4:30 p.m.경 미군이 공사관 지구에 도착했다. 이들은 한 명이 전사하고 아홉 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부상자 중에는 성벽을 오르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이가 있었다. 부상자 중 한 명에는 후대에 장군이 되고 생전 가장 유명한 해병 중 한 명인 스메들리 버틀러가 있었다.[16] 러시아군, 일본군, 프랑스군은 중국 측의 저항이 점차 줄어든 저녁이 다 돼서야 베이징에 입성했다. 공사관 공방전은 이렇게 종료되었다.[17]

여파

요약
관점

다음 날 아침인, 8월 15일, 청나라군  추정상 동복상감군(간수 지역 회교도 부대)  은 여전히 도시 내성 성벽의 일부와 황성, 자금성에 주둔해 있었다. 외국군을 조준한 간헐적인 공격이 있기도 했다. 미군 지휘관 채피는 성벽을 정리하고 황궁을 점령하라 부대에 지시를 내렸다. 러시아군과 프랑스군의 지원으로, 미국의 포대는 연속된 성벽과 성문들을 포격으로 뚫고 황성 안까지 들어갔으며, 자금성 앞 성문에서 멈추었다. 그 날 미군의 피해는 7명이 전사하고 29명이 부상을 입었다.[18] 전사자 중에는 유명한 포수로, 아일랜드 출신의 54세 대위 헨리 조셉 라일리(Henry Joseph Reilly)가 있었다.[19]

서태후, 광서제, 황궁의 몇 명은 미군이 자금성의 성벽에 접근하기 겨우 몇 시간 앞선 8월 15일 이른 아침 베이징에서 달아났다. 농민 여성의 복장으로 가라 입은 서태후와 황가 일행은 나무로 된 수레 세 개에 실려 도시에서 일부 빠져나갔다. 청나라 관리들은 그녀의 산시성행을 '시찰 여행'이라 둘러댔다. 외국인들과 협상을 위해 또는 자금성에 숨어있던 이들은 및 북경에 잔류한 이들은 어린 시절 때부터 서태후의 친구이자 청군 지휘관 영록을 포함해 태후의 신임을 받는 보좌관들이었다.[20] 정양문에서 감군은 연합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청군에서 감군을 지휘하던 무슬림 지휘관 마복록과 그의 친척 4명은 연합군에 돌격을 펼치다가 전사하였고, 그의 고향 마을 출신 후이족 및 둥샹족 무슬림 부병력 100명도 정양문에서 전투 중 전멸당했다. 정양문 전투는 영국군과의 교전이었다.[21] 전투가 끝나고, 마복상을 포함한 감군 부대는 서태후가 도주하는 중 그녀를 호위한 부대 중 하나이었다.[22] 제2차 중일전쟁 기간 일본군에 맞서 무슬림 기병대를 이끈 마뱌오는 의화단 운동 당시 외국군에 맞서 용병으로 마해안 장군 휘하에서 싸웠다. 마해안 장군은 황실이 목적지에 도착한 뒤 탈진으로 사망하였으며, 그의 아들 마치가 그 직위를 이어받았다. 마복상 역시 이때 마복록 휘하에서 청나라 황실 경호 업무를 수행했다.[23] 무슬림 병사들에 대해 "용감한 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용감한 자들이며, 광신적인 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광신적인 자들이다. 바로 그것이 황제의 도성 방위가 그들에게 맡겨진 이유이다"라고 묘사되었다.[24]

시스쿠 천주당 포위 해방은 8월 16일까지 이뤄지지 못했다. 그날 아침 일본군이 우연히 대성당을 발견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그들과 포위된 사람들 모두 당황했다. 그렇지만, 얼마 안 되어, 프랑스군이 도착했고 생존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성당으로 진입했다.[25]

8월 17일, 중국 내 외국 대표단은 모여 "황궁 및 자금성으로 연합군의 진입이 청나라 군대에 완강히 저항을 받았기에", 연합군은 "북경 및 그 주변 일대의 청나라 군대의 저항이 완전히 괴멸될 때"까지 교전을 지속해야만 함을 결의했다. 또한 이들은 "무장 저항을 철저히 진압하는 데야말로 평화를 회복할 수 있는 최선이자 유일한 희망이 있다"라고 선언했다.[26]

8월 28일, 베이징 내 외국군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서 병력 도착하고 및 프랑스의 추가 병력으로 인해 수가 불어났다   은 베이징의 통제권을 완전히 장악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자금성으로 진격했다. 청나라 관료들은 이들의 출입에 항의를 했다. 외국인 및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자금성에 발을 디디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으나, 연합군이 자신들을 막을 경우에는 자금성을 점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파괴해버리겠다고 위협하자 길을 내주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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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거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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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 보병 연대의 미군 병사들이 베이징 성벽을 오르는 모습을 묘사한 미육군의 역사화 "I'll Try Sir,". 러시아군은 그림의 오른쪽에 묘사된 불붙은 성문에서 중국 측의 저항에 가로막혔었다.

베이징은 공방전 이후 많은 피해를 입은 도시이었다. 의화단원들은 모든 교회들을 파괴함과 동시에 도시 전역으로 퍼진 불을 지르기 시작하며, 도시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공방전 동안 공사관 지구와 시스쿠 천주당를 겨누었던 청군의 포대는 인근 지역들을 파괴했다. 황폐화 된 길거리에는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었다.[28] 연합군은 베이징을 구역 별로 나눠, 점령군이 통제하였다.

점령된 북경은 미국의 언론인의 발을 빌려, "피사로 이래 최대 약탈지"가 되었다.[29] 각국은 서로가 약탈의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인 선교사 루엘라 마이너는 “러시아 병사들의 행태는 끔찍하고, 프랑스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으며, 일본군은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불태우고 있다”라고 주장했다.[30] 약탈 행위에 대해 '불가피한 필요'라고 언급한 개슬리 장군은 모든 약탈품이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영국 공사관에서 경매에 부쳐져야 한다는 체계를 세웠으며, 그 수익금은 가격 위원회에 의해 도시에 남아 있던 영국군에 배분되었다.[31] 채피 장군은 미군 병사들의 약탈 행위를 금하였으나, 병사들은 도시 주변으로 약탈을 하면서 자주 명령을 어겼고, 이에 대해 한 군종 장교는 "약탈을 금하는 우리의 군칙은 완전히 효력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라고 푸념하기도 했다.[32]

포위 당하고 있던 민간인 및 선교사들은 베이징에 익숙했기에 아주 능숙한 약탈자들 가운데 일부였다. 약탈 행위 중 어느 정도는 천주교 주교 피에르 파비에와 미국의 회중교회 신자 윌리엄 스콧 에먼트의 사례처럼 수백 명의 굶주린 중국인 기독교들을 돌보기 위한 식량과 의복이 필요했던 천주교 주교 피에르 파비에와 미국의 회중교회 신자 윌리엄 스콧 에먼트의 사례처럼 인도주의적 이유로 정당화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생필품을 얻기 위한 약탈은 곧 이익을 위한 약탈로 바뀌었고, 그 행위는 언론에 널리 보도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스스로 약탈에 가담하면서도, 다른 이들이 약탈할 때는 이를 비난했다.[33] 베이징의 기독교도 시민들 역시도 약탈에 가담했고 약탈의 수익을 판매하기 위한 시장을 마련하기도 했다.[34]

열강 8국 연합군은 교외 지역의 의화단원으로 의심되는 이들을 생포 및 처형하기 위한 토벌대 파견에 나섰다. 이 토벌 기간, 외국군에 의한 무차별적인 살인이 자주 자행되었다. 채피는 "베이징 함락 이후 진짜 의화단원 한 명이 죽을 때마다, 적지 않은 여성과 아이들도 포함하여 아무런 해가 없는 인부나 농장 노동자 쉰 명이 학살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증언했다".[35] 토벌대의 대부분은 프랑스군 및 독일군으로 이뤄졌었다.[36]

1901년 9월 7일 열강 8국 연합군 측과 청나라 정부 대표단 이홍장경친왕 간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청나라는 배상금 3억 3,500만 달러(현재 40억 달러 이상)를 이자와 함께 39년에 걸쳐 지급해야 했다. 또한 의화단을 지원한 청나라 관료의 처형 및 추방, 북중국 다수의 요새와 방어 시설의 해체 요구도 있었다. 조약은 외국군이 베이징을 떠나고 10일 뒤에 체결됐으나, 공사관 호위 병력은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남아있었다.[37]

조약이 체결되고, 서태후는 1902년 1월 7일에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떠났던 여정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왔고, 청 왕조의 통치는 명목상으로나마 중국 전역에서 회복되었다. 그러나 청은 의화단 운동에서의 패배와 막대한 배상금, 그리고 강화 조약의 가혹한 조건들로 인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38] 서태후는 1908년에 사망했고 청나라는 1911년에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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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

제2차 중일전쟁 당시, 일본 측에서 회족 장군 마훙쿠이에게 일본 영향권 아래의 이슬람 허수아비 국가의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요청하자, 마홍쿠이는 닝샤 국민당의 서기 저우 바이황 (Zhou Baihuang)을 통해서 일본의 군부 이타가키 세이시로에게 본인의 숙부 마복록을 포함해 그의 친족들이 북경 전투 때 열강 8국 연합군과 싸우다 전사했었고, 일본군이 당시 연합군의 다수를 이룬 점을 떠올려 보라 하였고 그렇기에 일본군과 협력은 없을 것이라 답하였다.[39]

대중 문화

북경 전투 사건은 니컬러스 레이 연출의 1963년 시대극 영화 '북경의 55일'에서 나타난다.

사진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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