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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베자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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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베자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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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베자 조약(벨라루스어: Белавежскае пагадненне, 러시아어: Беловежское соглашение, 우크라이나어: Біловезька угода)은 1991년 12월 8일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했던 핵심 슬라브 공화국인 러시아 SFSR, 벨로루시 SSR, 우크라이나 SSR의 지도자들이 모여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를 공식 선언하고, 그 대안으로 독립국가연합의 창설을 합의한 역사적인 조약이다. 공식 명칭은 독립국가연합 창설에 관한 협정(러시아어: Соглашение о создании Содружества Независимых Государств)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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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2월 8일에 열린 벨라베자 조약 서명식

이 조약은 사실상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사망 선고로 평가받으며, 냉전의 종식과 새로운 국제 질서의 시작을 알리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조약은 벨라루스브레스트주에 위치한 벨라베슈스카야 푸샤 국립공원 내의 정부 별장에서 비밀리에 체결되었으며, 이 장소의 이름을 따 벨라베자 조약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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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정치적 위기와 주권 선언 물결

1980년대 후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추진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은 아이러니하게도 소비에트 체제의 붕괴를 가속화했다. 경제 개혁은 실패하여 생필품 부족 등 민생고를 심화시켰고, 정치적 개방은 억눌려왔던 각 공화국의 민족주의와 독립 요구를 분출시켰다.

1990년부터 리투아니아를 시작으로 각 공화국들은 주권 선언을 잇따라 발표하며 연방의 법보다 공화국의 법이 우위에 있음을 천명했다. 이는 법의 전쟁이라 불리며 연방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급격히 약화시켰다.

8월 쿠데타의 실패와 권력 공백

이러한 붕괴를 막기 위해 고르바초프는 기존의 연방을 해체하고 주권이 대폭 강화된 공화국들의 연합체인 신연방조약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공산당 보수파 강경 세력은 조약 서명 하루 전인 1991년 8월 19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8월 쿠데타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의 주도 하에 시민들의 저항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이 사건은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었다. 쿠데타 진압의 주역으로 떠오른 옐친에게 권력의 추가 급격히 기울었고, 쿠데타를 막지 못한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쿠데타 이후 연방 정부는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졌고,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공화국들이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며 신연방조약 논의마저 무의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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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체결 과정

비밀 회동

1991년 12월 초,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세 공화국은 겨울을 앞두고 에너지 공급 문제를 논의한다는 명목으로 회동을 가졌다. 그러나 실제 목적은 와해 직전인 소비에트 연방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이었다. 회담 장소는 외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폴란드 국경 근처의 외딴 사냥 별장인 비스쿨리로 정해졌다.

12월 8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레오니트 크라우추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스타니슬라프 슈시케비치 벨라루스 최고 소비에트 의장은 각국의 총리와 외무장관 등 소수의 인원만 대동한 채 회의를 시작했다. 이들은 연방을 유지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며, 무질서한 붕괴는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내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데 공감했다. 유일한 현실적 대안은 기존 연방을 해체하고 새로운 형태의 느슨한 협력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조약 서명과 통보

논의 끝에 세 지도자는 "소비에트 연방은 국제법과 지정학적 현실의 주체로서 존재를 멈춘다"는 문구로 시작하는 협정문에 서명했다. 이는 1922년 바로 이 세 공화국이 주축이 되어 체결했던 소비에트 연방 창설 조약을 스스로 파기하는 의미를 가졌다.

조약 체결 후, 옐친은 소련 대통령인 고르바초프가 아닌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통보했다. 이는 세계의 권력 중심이 고르바초프의 크렘린에서 옐친의 러시아로 이동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였다. 이후 슈시케비치가 고르바초프에게 전화로 통보했으며, 고르바초프는 이를 "불법적이고 위험한" 행위라며 격렬하게 반발했으나, 결과를 되돌릴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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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내용과 그 의미

벨라베자 조약의 14개 조항은 단순한 선언을 넘어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담고 있었다.[3]

  • 제1조: 독립국가연합(CIS) 창설: 이는 연방의 완전한 해체 이후 발생할 혼란을 최소화하고, 경제, 외교, 군사 분야에서 최소한의 협력 틀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였다.
  • 제5조: 국경 상호 인정 및 영토 보전: 소비에트 연방 내의 행정 경계선을 그대로 국가 간 국경으로 인정함으로써, 유고슬라비아 붕괴 시 발생했던 것과 같은 영토 분쟁을 사전에 방지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 제6조: 공동 군사-전략 공간 유지: 세계 2위의 군사력이자 막대한 핵무기를 보유했던 소련군의 통제권을 어떻게 이전할 것인가는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이 조항은 핵무기에 대한 공동 통제 체제를 약속함으로써 핵 확산에 대한 국제 사회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 제12조: 국제적 의무 승계: 구 소련이 체결했던 모든 국제 조약과 협정(특히 군축 관련)을 CIS가 승계한다고 명시하여, 국제 사회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고자 했다.

조약의 결과 및 영향

각국의 비준과 알마아타 의정서

벨라베자 조약은 12월 10일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최고 소비에트에서, 12월 12일에는 러시아 최고 소비에트에서 압도적인 찬성으로 비준되었다. 이는 세 지도자의 결정이 각국 의회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며 조약의 정당성을 강화했다.

이 소식에 다른 소련 공화국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1991년 12월 21일,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아타(현 알마티)에서 중앙아시아 5개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몰도바의 지도자들이 모여 벨라베자 조약을 지지하고 CIS에 동참한다는 내용의 알마아타 의정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CIS는 11개 공화국이 참여하는 거대 연합체로 확대되었고, 소련의 해체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고르바초프의 사임과 소련의 종말

더 이상 국가의 대통령이 아니게 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1991년 12월 25일 저녁, TV 연설을 통해 소련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했다. 그는 핵무기 통제권, 이른바 핵 가방을 보리스 옐친에게 인계했다. 그날 밤 크렘린 상공에 휘날리던 소련의 붉은 깃발이 내려지고, 러시아의 삼색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다음 날인 12월 26일, 소련 최고 소비에트의 상원인 공화국 소비에트는 마지막 회의를 열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음을 선언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로써 70년 가까이 세계의 한 축을 담당했던 초강대국은 공식적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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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 논란 및 평가

벨라베자 조약의 합법성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 합법성 주장: 조약 지지자들은 1922년 소비에트 연방을 창설한 주체가 바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당시 자카프카스 SFSR 포함)였으므로, 창립 회원국이 연방을 해체할 권리 또한 가진다고 주장한다.[4]
  • 불법성 주장: 고르바초프를 비롯한 비판자들은 소련 헌법상 연방의 해체 권한은 오직 소련 최고 인민대표대회에만 있으며, 세 공화국 지도자의 밀실 합의는 명백한 위헌이자 국가 전복 행위라고 주장한다.[5]

역사적 평가 또한 엇갈린다. 한편에서는 이 조약이 피할 수 없었던 소련의 붕괴를 비교적 평화롭고 질서 있게 관리하여 대규모 유혈 사태를 막은 현실적인 결단이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6] 다른 한편에서는 일부 공화국 지도자들의 권력욕이 세계 초강대국을 성급하게 해체시켜 이후 수많은 경제적 혼란과 지역 분쟁의 씨앗을 뿌렸다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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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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