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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녕군
인평대군의 왕족 (1639–1670)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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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녕군(福寧君, 1639년 3월 13일(음력 2월 9일) ~ 1670년 11월 27일(음력 10월 15일))은 조선의 왕족이다.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장남이다. 조선 후기,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복녕군의 7대손인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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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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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가계
성은 이(李), 이름은 욱 또는 유(栯)[2],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639년(인조 17년)[3]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적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우의정을 지낸 동복 오씨(복천 오씨) 오단(吳端)의 차녀 복천부부인 오씨(福川府夫人 吳氏)이다[4]. 소현세자와 효종 등의 친조카이며, 현종과는 친사촌간이다. 또 숙종 때 "삼복(三福)"으로 불리며 정치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역모의 혐의를 뒤집어 쓰고 마침내 사형까지 당하게 되는 복창군(福昌君),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의 친형이다[3].
한편 그의 아버지 인평대군은 자녀 없이 죽은 삼촌 능창대군의 양자로 사후 입양되었다. 따라서 친조부였던 인조는 혈통상 종조부가 되었다.
왕족 시절
백부 효종이 즉위한 후인 1651년(효종 2년) 음력 6월 20일 정식으로 복녕군(福寧君)에 봉작되었다[5]. 이후 1655년(효종 4년) 음력 4월 22일에 종실들에게 시행한 시험에서 합격을 하여 특별히 가자되고[6], 1662년(현종 3년) 음력 2월 14일에는 소덕대부(昭德大夫)가 가자되었다[7]. 한편 1666년(현종 7년)과 1667년(현종 8년)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가 온양온천으로 거둥할 때에는 그 어가를 수행하는 일원이 되기도 하였다[8][9].
복녕군은 1670년(현종 11년) 음력 10월 15일 3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복녕군의 사망 소식을 들은 현종은 관례에 따라 장례를 지내고 필요한 물품들은 넉넉히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당시 서인 세력이 주도하여 기록한 《현종개수실록》[10]에서는, 이러한 현종의 명에 대해서 현종과 복녕군이 어릴 때부터 서로 친하게 지냈으니 당연하다고 하면서도, 복녕군을 비롯한 인평대군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무뢰하고 왕의 총애만을 믿고 못된 짓을 자행한 인물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 복녕군 형제가 외가 식구인 오정일(吳挺一) 등과 함께 무리를 짓고 친분을 맺는 바람에, "흉역의 싹"이 되어 화란이 일어날 뻔 하였다고도 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복녕군 형제들을 보며 항상 눈을 흘기고 이를 갈았다고 한다[11].
사후
복녕군 사후 그의 형제들은 남인의 편에 서서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들은 1680년(숙종 6년) 경신환국 때 서인들에게 밀려 복평군을 제외한 나머지 두 형제는 모두 사형을 당하였다[3]. 한편 복녕군은 고종 즉위 후인 1864년(고종 원년) 음력 7월 9일 효헌(孝獻)의 시호를 받았다. 이는 고종이 복녕군의 직계 7세손이기 때문이다[12].
복녕군의 사위 김석달(金錫達)은 판관을 역임하였지만 자녀가 없어 양자 김도협(金道浹)을 입양했다. 김도협은 목사가 되었고, 김도협의 둘째 사위가 암행어사로 유명한 영성군 박문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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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복녕군의 차남 의원군으로부터 뻗어나간 후손 중, 복녕군의 7대손에 해당하는 이가 고종이다[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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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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