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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원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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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원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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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원정군(포르투갈어: Força Expedicionária Brasileira, FEB)은 코브라스 푸만테스(문자 그대로 "담배 피는 뱀")라는 별명을 가졌다.[1] 이 부대는 브라질 육군브라질 공군 소속의 원정군으로, 제2차 세계 대전지중해 및 중동 전구에서 연합군의 일부로 싸웠다. 완전한 보병 사단, 연락기 비행, 그리고 전투기 비행대대를 포함하여 약 25,9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2]

간략 정보 브라질 원정군 ...

미국 제5군의 지휘를 받은 브라질군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 5월까지 주로 이탈리아 전역에서 싸웠으며, 브라질 해군과 공군은 1942년 중반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서양 전투에 참여했다.[1] FEB는 주로 소대급에서 작전했으며,[3] 어려운 고트 선1945년 최종 공세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전쟁이 끝날 무렵, FEB는 두 명의 장군과 거의 900명의 장교를 포함하여 20,573명의 포로를 잡았다. 이 사단은 세 병과 모두에서 948명의 전사자를 냈다.[4][2]

브라질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해외에 전투 부대를 파견한 유일한 독립 남아메리카 국가였다.[1] 끈기와 용맹함으로 알려진 FEB는 연합국과 적국 모두에게 높이 평가되었다. 특히 콜레키오, 카마이오레, 몬테 프라노, 세르키오 계곡 등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1] 브라질 해군과 공군은 연합군 선박을 보호하고 추축국의 해상력을 약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적의 군수품, 보급품 및 기반 시설에 불균형적으로 높은 손실을 입혔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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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요약
관점

연합군 측에서 브라질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것은 확실한 결과가 아니었다. 비록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삼국협상을 지지했지만 — 현재 추축국에 속한 일본과 루마니아도 마찬가지였다 — 브라질의 전쟁 기여는 종전기에 이루어졌으며, 주로 해군력이었지만 소규모 군사 사절단을 서부 전선에 파견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몇 년 동안 브라질은 유럽 외 지역에서 독일 제품의 가장 큰 소비국이었으며, 전체 독일 무역 파트너 중 9위를 차지했다. 또한 독일과 더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 크고 영향력 있는 독일인 공동체를 주최했다.

1914년과 마찬가지로 브라질은 1939년에 중립을 유지하며 처음에는 연합국과 추축국 모두와 무역을 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추축국과의 무역은 영국과 미국의 외교적, 경제적 압력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에는 미국-브라질 공동 방위 위원회 창설이 포함되었으며, 미국 육군 소장 제임스 개레체 오드가 의장을 맡아 양국 간 군사 관계를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그 주요 목표는 대서양을 건너는 미국 선박에 대한 추축국의 공격 가능성을 줄이고 남아메리카에서 추축국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5]

비록 브라질은 공식적으로 중립이었지만, 1941년 12월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직후 미국과 더욱 긴밀히 협력했다. 1942년 1월 15일부터 28일까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범미주 회의는 미국이 추축국에 선전포고를 한 후에 소집되었다. 이 회의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게 안보 협력과 추축국과의 외교 관계 단절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그 결과 브라질은 1월 말까지 독일, 일본, 이탈리아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6]

회의에 따라 브라질은 국내 철강 산업인 국영제철회사를 개발하는 데 대한 지원의 대가로 미국이 자국 영토에 공군 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 철강 산업은 미국의 전쟁 노력에 기여하고 이후 브라질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기지는 바이아주, 페르남부쿠주, 히우그란지두노르치주의 중북부 주에 위치했으며, 나타우 시에는 미 해군 VP-52 폭격 비행대대가 주둔하여 이후 최대 규모의 해외 미 공군 기지가 되었다. 브라질은 또한 일본과 무역을 시도하는 잠수함 및 상선을 공격하기 위한 비행대대를 포함하는 미 태스크 포스 3을 주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7년과는 달리, 브라질 정부는 전쟁을 피하고 양측과 경제적으로 유익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7] 공식적인 중립과 전쟁 선포에 대한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의 미국과의 협력과 외교 관계 단절은 독일의 즉각적인 보복을 불러왔다. 1942년 1월 말부터 8월까지 독일의 U보트는 18척의 브라질 상선을 격침시켰다. 특히 6월 16일 이후에는 히틀러가 브라질과의 긴밀한 관계를 전쟁 행위와 동등하게 간주하여 개인적으로 브라질에 대한 "잠수함 전격전"을 요청하면서 공격이 더욱 심해졌다.[8] 8월 중순까지 독일군은 브라질 해안에 더 가까운 선박을 표적으로 삼았다. U-507 단 한 척만으로 이틀 만에 5척의 브라질 선박을 격침시켜 6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다.[9]

  • 8월 15일, 사우바도르에서 헤시피로 향하던 바에펜디는 19시 12분에 어뢰 공격을 받았다. 승객 215명과 선원 55명이 모두 사망했다.
  •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U-507은 역시 사우바도르에서 북쪽으로 향하던 아라라콰라에 어뢰를 발사했다. 탑승자 142명 중 131명이 사망했다.
  • 두 번째 공격 7시간 후, 아니발 베네볼로가 공격을 받아 승객 83명 전원과 선원 71명 중 4명을 제외한 전원이 사망했다.
  • 8월 17일, 비토리아 시 근처에서 이타기바가 10시 45분에 피격되어 36명이 사망했다.
  • 또 다른 브라질 선박인 아라라는 사우바도르에서 산투스로 향하던 중 손상된 이타기바를 돕기 위해 멈췄다가 공격을 받아 20명이 사망했다.

총 21척의 독일 잠수함과 2척의 이탈리아 잠수함이 36척의 브라질 상선을 격침시켜 거의 2,000명의 사망자를 냈다. 특히 희생자 중에는 육군 병사와 종교 순례자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8월의 연속 공격은 전환점이 되었다. 브라질은 반추축국 시위가 리우데자네이루를 포함한 대부분의 주요 도시에 퍼지면서 "혐오감의 물결"로 들끓었고, 일부 시위는 폭력적으로 변했다. 시위대는 추축국 깃발을 불태우며 "우리는 전쟁을 원한다!"고 외쳤고, 일부 지역에서는 독일인 공동체가 괴롭힘을 당했다.[10] 바르가스 정부의 수동적인 입장은 여론에 직면하여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고, 마지막 U보트 공격 일주일 이내인 8월 22일, 브라질 내각은 추축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승인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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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포텐지 강 회담USS 훔볼트에 탑승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제툴리우 바르가스 브라질 대통령. (왼쪽에는 영국-미국 배정 위원회 위원장 해리 홉킨스, 오른쪽에는 브라질 주재 미국 대사 제퍼슨 카프리가 있다.)

브라질은 계속해서 필요한 보급품, 전쟁 물자, 외국 기지를 위한 전략적 영토를 제공했지만, 군대 파견 결정은 몇 달 후인 1943년 1월 28일과 29일의 포텐지 강 회담에서 내려졌다. 나타우USS 훔볼트에서 열린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제툴리우 바르가스 브라질 대통령 간의 회담은 미국과 브라질 간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협력을 강화했으며, 브라질이 전후 국제 질서에서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초청했다. 바르가스와 외무장관 오스왈도 아라냐는 군대 파견을 미국과의 전략적 동맹을 강화하고 국제 무대에서 브라질의 위신과 영향력을 높이는 수단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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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요약
관점

브라질 해군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은 FEB와 이탈리아 전역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는데, 주로 대서양 전투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추축국의 해군 공격으로 인해 거의 1,600명이 사망했으며, 이 중에는 민간인 500명, 상선 선원 470명, 해군 선원 570명이 포함되었다. 약 7명의 브라질 선원 중 1명이 이 전역에서 사망했다. 총 36척의 선박이 독일 잠수함에 의해 격침되었고, 추가로 3척의 선박이 사고로 침몰하여 350명이 사망했다.[12]

브라질 해군의 주요 임무는 연합군과 함께 중부 대서양과 남대서양 사이를 항해하는 선박의 지브롤터까지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단독으로 또는 연합군과 협력하여 614척의 호송선단을 호위하여 3,164척의 상선과 병력 수송선을 보호했다.[13] 독일 잠수함과의 전투에서 브라질 프리깃함과 잠수함기뢰폭뢰를 사용했다. 독일 문서에 따르면 브라질 해군은 독일 잠수함을 총 66번 공격했다.

브라질 해군은 해안을 따라 12척의 독일 잠수함을 파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U보트 U-128, U-161, U-164, U-199, U-507, U-513, U-590, U-591, U-598, U-604, U-662.[14][15][16]

브라질 해군이 잃은 군함 중에는 1944년 7월 호송선단을 호위하던 중 폭풍으로 전복된 기뢰부설함 BZ 카마콰와 1945년 7월 포격 사고로 침몰한 경순양함 BZ 바이아가 있었다.[17][18] 후자의 경우 대부분의 승무원이 사망했다.[19] 전쟁 중 침몰한 세 척의 브라질 군함 중 유일하게 적 잠수함의 공격으로 침몰한 것은 1944년 7월 20일 U-861에 의해 격침된 화물선-군용 수송선 비탈 데 올리베이라였다.[20]

전쟁이 끝날 무렵, 남대서양 호송선단 전체는 브라질 해군에 인계되었으며, 이로 인해 미국과 영국 선박은 다른 곳에서 긴급히 필요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21]

제2차 세계 대전 중 브라질 함대

자세한 정보 등급, 함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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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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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카레냐스 지 모라이스 장군 (뒷좌석 오른쪽), 브라질 육군 장교이자 FEB 사령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 (제2차 세계 대전 유럽 연합군 사령관).

FEB의 브라질 제1사단은 해럴드 알렉산더 원수(나중에 마크 웨인 클라크 장군이 계승)가 지휘하는 연합군 제15집단군 아래에 있었으며, 마크 웨인 클라크 중장(나중에 루시안 트루스콧 중장이 계승)의 미국 제5군윌리스 D. 크리텐베르거 소장의 미국 제4군단을 통해 지휘를 받았다. 고트 선 전투 서열은 이탈리아에 주둔한 연합군과 독일군의 배치를 보여준다.

FEB 본부는 행정 본부 역할을 했으며, 리우데자네이루의 육군 장관인 에우리쿠 가스파르 두트라 장군 휘하의 브라질 고위 사령부와 연락하는 역할을 했다. 마스카레냐스 지 모라이스 장군(후에 원수)이 FEB 사령관이었고, 제노비오 다 코스타 장군이 카사파바의 제6 연대전투단 (이탈리아에 상륙한 최초의 FEB 연대전투단)의 참모장, 그리고 코르데이로 데 파리아스 장군이 포병 사령관을 맡았다.

이론적으로 FEB는 당시의 표준 미국 보병 사단으로, 모든 면에서 완전하게 조직되었으며, (우편 및 은행 서비스를 포함한) 병참 지원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의료 서비스와 같은 일부는 미비한 것으로 판명되어 보완되어야 했고, 많은 경우 미국인에 의해 통제 또는 관리되어야 했다.[22][23] 전투 부대는 앞서 언급한 제6연대전투단 외에 리우데자네이루에 기반을 둔 제1연대전투단과 상주앙델헤이의 제11연대전투단으로 구성되었다. 각 연대전투단은 약 5,000명(오늘날 여단 규모에 해당)으로 이루어졌으며, 3개의 "대대"로 나뉘어 각 대대는 4개의 중대로 구성되었고, 전투 지원 부대포병, 전투공병, 기병과 같은 육군의 다른 병과도 포함되었다.[24] 브라질 공군 전투 비행대대는 지중해 전술 공군에 소속되었다.[25]

전역

요약
관점

준비

브라질이 연합군에 합류한 것을 칭찬하고 브라질과 미국의 유사점을 보여주려는 미국 선전 영화 브라질 앳 워 (1943)

브라질이 추축국에 선전포고를 하자마자 유럽에서 싸울 원정군을 위한 대중 동원령을 시작했다.[26][27] 당시 브라질은 전통적으로 고립주의 외교 정책을 가진 나라였다. 인구는 대부분 농촌 지역에 거주하는 문맹이었고, 경제는 상품 수출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물자와 인력으로 전쟁 노력을 지원하는 데 필요한 산업, 의료, 교육 분야의 기반 시설이 부족했다. 더욱이,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행동 계획(예: 이전 세계 대전의 칼로게라스 계획)은 불가능했는데, 많은 브라질 군 장교들이 유럽에서 나치-파시스트의 패배가 브라질 내에서 민주주의 요구를 증가시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브라질은 군사 정권이었으며, 1937년부터 노골적인 권위주의 정권이었고 1941년까지 나치-파시스트 정권에 동정적이었다. 따라서 브라질은 분쟁에서 자율적인 행동 노선을 추구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는 미미한 역할조차 수행하기 어려웠다.

정부의 소극성과 무관심에 직면하여, 대중 매체 거물인 아시스 샤토브리앙은 브라질에 주둔한 미국 관리들과 협상하여 라틴아메리카 전역의 자원봉사자로 구성된 원정군 사단을 창설하기로 했다. 이 사단은 그가 자금을 대고 브라질 장군이 지휘하며 미국 관리들이 훈련시킬 예정이었다. 이 계획은 1943년 초 브라질 정부에 의해 중단되었다.[28]

거의 2년 후, 브라질은 공식적으로 전쟁에 참전하여 유럽 전구에 군대를 파견했다. 비교하자면, 미국의 참전과 횃불 작전 사이의 간격은 거의 1년이었다. 지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기여했다: 브라질과 미국 당국 간의 정치적 불신, 브라질 원정군 목표 규모에 대한 의견 불일치, 브라질의 염원과 군대 통제에 대한 미국의 선호도 간의 차이, 그리고 병력이 이탈리아로 이동하기 전에 완전히 훈련되고 무장해야 하는지 아니면 이탈리아 전선 후방에 주둔하여 훈련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 불일치 등이 있었다.[29]

결국 브라질 정부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연합군에 합류하기 위해 당초 10만 명 규모의 군단 목표에 비해 2만 5천 명(교체 병력 포함)의 브라질 육군 사단을 모집했다.[30]

이탈리아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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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9월, 마사로사 시에서 이탈리아 민간인에게 인사를 건네는 브라질 군인들.

1944년 7월 2일, FEB 소속 병력 5,000명, 즉 제6연대전투단은 USS 제너럴 만호를 타고 브라질을 떠나 유럽으로 향했으며, 7월 16일 나폴리에 도착했다. 무기, 장비, 심지어 막사 배치도 없이, 그들은 미 태스크 포스 45에 합류하기 위해 기다리면서 부두에 머물렀다. 형편없는 계획과 그에 따른 당혹감은 브라질 언론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31] 7월 말, 두 척의 수송선이 브라질 군대를 태우고 이탈리아에 도착했고, 1944년 9월과 11월, 그리고 1945년 2월에 세 척의 추가 수송선이 뒤따랐다. 주목할 만한 부대 중 하나는 브라질의 브라질 산악 보병 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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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9월, 브라질 독립기념일제2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에서 기념하는 브라질 군인들.

FEB는 이탈리아에서 첫 몇 주를 이탈리아 지형에서 싸울 적절한 장비를 확보하고 미국 지휘 하에 훈련하는 데 보냈다.[32] 선전포고 이후 2년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에서의 준비는 거의 쓸모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 전역의 참전용사들 사이에서는 이전에 받은 훈련의 질에 관계없이 싸움만이 군인을 적절하게 준비시킬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33][34] 8월에 병력은 나폴리에서 북쪽으로 350km 떨어진 타르퀴니아로 이동했는데, 이곳에 클라크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11월에 FEB는 크리텐베르거 장군의 미국 제4군단에 합류했다.

11월에 브라질군은 다국적 병사들의 혼성 부대에 합류했다. 미군은 격리된 아프리카계 미국인 미국 제92보병사단과 일본계 미국인 미국 제442보병연대를 포함했다. 영국군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인도, 네팔,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남아프리카, 로디지아 및 다양한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병력을 모았다. 또한 폴란드 군단, 그리스,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은 점령국 병사들과 반파시스트 이탈리아인들도 영국 지휘 하에 있었다. 자유 프랑스군에는 세네갈인, 모로코인알제리인이 포함되었다.[35][36][37]

독일군은 브라질의 이탈리아 주둔의 정치적 측면을 크게 강조했다. 선전은 브라질인들을 특별히 대상으로 했으며, 전단지와 베를린 라디오에서 포르투갈어로 매일 한 시간 동안 방송되는 '오라 아우리베르데(황금녹색 시간)'라는 라디오 방송 형태로 이루어졌다.[38]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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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1월 29일, 몬테 카스텔로 전투의 두 번째 공격 중 FEB 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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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몬테세 전투 중 참호에 있는 브라질 병사들.

FEB는 마사로사, 카마이오레, 몬테 프라노, 몬테 아쿠토, 산 퀴리코, 갈리카노, 바르가, 몬테 카스텔로, 라 세라, 카스텔누오보 디 베르가토, 소프라사소, 몬테세, 파라벤토, 조카, 마라노술파나로, 콜레키오포르노보 디 타로에서 전술적 성공을 거두었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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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1945년 이탈리아 북부 브라질 작전 지도. 브라질 국립 문서 보관소.

브라질군이 미 제370보병연대와 긴밀히 협력하여 처음으로 수행한 임무는 8월 말까지의 수색정찰 작전이었다. 브라질군은 남프랑스 침공을 위해 이탈리아를 떠난 미 제6군단프랑스 원정군 사단이 남긴 공백을 부분적으로 메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9월 16일, 제6연대전투단은 마사로사를 점령했다. 이틀 후에는 카마이오레와 북쪽으로 가는 다른 작은 마을들도 점령했다. 그 무렵 FEB는 이미 몬테 프라노를 정복하고 큰 사상자 없이 세르키오 계곡을 장악했다. 바르가 시 주변에서 첫 패배를 겪고 10월 말 제1연대전투단이 도착한 후, FEB는 북부 아펜니노 산맥 기슭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토스카나주에밀리아로마냐주 지역의 경계에 있으며, FEB는 다음 몇 달 동안 혹독한 겨울과 고트 선의 저항에 직면했다.[40] 연합군은 겨울 동안 산맥을 뚫지 못했고, FEB 전선 좌측에서 미 제92보병사단을 상대로 독일군과 이탈리아 사단의 공세인도 제8보병사단의 지원이 있은 후에야 격퇴되었다.

1945년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 봄 공세를 준비하면서 브라질 사단과 미국 제10산악사단은 북부 아펜니노 산맥에서 중요한 거점(브라질 부문에서는 몬테 카스텔로와 카스텔누오보가 주목할 만함)을 점령하여, 1944년 가을부터 볼로냐로 가는 연합군의 길을 막았던 산악 지대의 독일군 주요 포병 진지를 빼앗았다.[41][42][43]

솔직히 말해, 브라질인들은 미쳤거나 매우 용감하다. 나는 기관총과 잘 방어된 진지를 향해 목숨을 무시하고 전진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당신들은 악마다 — 독일군 대위가 잡힌 FEB 중위에게.[44]

미 제5군 전선에서는 2,000문의 포병 포격 후 4월 14일 이탈리아 전선 최종 공세가 시작되었다. 브라질 사단이 이끄는 미 제4군단 병력이 수행한 공격으로 몬테세가 함락되었다. 연합군 공세 첫날, 독일군은 큰 노력 없이 미 제10산악사단이 이끄는 제4군단의 주력 공격을 저지하여 그 부대 병력에 상당한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독일군은 M8 장갑차셔먼 전차를 사용한 FEB의 몬테세 기습이 그 지역에서 연합군의 실제 주요 목표일 수 있다고 오인하여, 몬테세 전투 기간 동안 그 지역의 모든 네 개의 연합군 사단을 상대로 사용된 총 2,800발 중 1,800발의 포탄으로 브라질군을 포격했다.[45] 그들은 몬테세를 브라질군에게서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제4군단 병력에 의한 독일군 북부 전선 돌파는 불가피해졌다.[46] 우측에서는 영국 제8군 소속 폴란드 제3카르파티아 소총사단과 미 제5군 소속 미국 제34보병사단이 4월 21일 볼로냐에 입성했다.

4월 25일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운동은 브라질군이 파르마에, 미군이 모데나제노아에 도착함과 동시에 총반란을 시작했다. 영국 제8군은 베네치아트리에스테를 향해 진격했다.

콜레키오 전투에서 브라질군은 제노아/라 스페치아 지역에서 퇴각하는 독일-이탈리아군이 미국 제92보병사단 병력에 의해 해방된 타로강 지역에서 격렬한 저항에 직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추축군 병력은 포르노보 디 타로 근처에서 포위되었고, 얼마간의 전투 끝에 항복했다. 4월 28일, 브라질군은 전체 148보병사단, 90기갑척탄병사단의 일부 병력, 그리고 이탈리아 이탈리아 제1베르살리에리 "이탈리아" 사단을 포함하여 13,000명 이상을 포로로 잡았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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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148보병사단 (및 제90척탄병사단 잔존병력)의 항복에 대한 사전 논의를 위해 1945년 4월 29일 포르노보 디 타로에서 독일 클라이버 대령과 브라질 프랑코 페레이라 소령. 이는 콜레키오 전투의 종결을 의미한다.

이것은 독일군 사령부를 놀라게 했는데, 독일군은 이 병력들이 리구리아의 독일-이탈리아군과 합류하여 제5군에 대한 반격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제5군은 이러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빠르지만 분산되고 disorganized한 방식으로 항공 지원과의 조화 없이 진격하여 좌측 측면과 후방에 일부 공백을 남겼다. 추축군은 반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포강을 따라 많은 교량을 온전하게 남겨두었다. 독일군 사령부는 이미 카세르타에서 휴전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반격이 항복 조건을 개선할 수 있기를 바랐다. 포르노보에서의 사건은 독일군 병력의 혼란과 이로 인한 지연으로 인해 독일군의 계획을 방해했다.[48] 이는 아돌프 히틀러의 사망 소식과 붉은 군대베를린 점령 소식과 함께 이탈리아의 독일군 사령부가 병력의 무조건 항복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최종 진격에서 브라질군은 토리노에 도달한 후 5월 2일 수사프랑스-이탈리아 국경에서 프랑스군과 합류했다. 같은 날 이탈리아에서의 적대 행위 종결이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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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요약
관점

제1전투비행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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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항공군 전투 비행단 소속 P-47은 기수에 "Senta a Pua!" 문양과 브라질 공군 별 문양을 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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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프레터-피코 (왼쪽) 중장이 올림피오 팔코니에르 다 쿠냐 장군 (중앙)에게 항복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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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FEB에 참여했던 브라질 공군 조종사들의 도착.

제1전투항공대대 (1oGAVCA, 1st Fighter Squadron/1º Grupo de Aviação de Caça)는 1943년 12월 18일에 창설되었다. 지휘관은 항공중령 네루 모우라였다. 비행대대는 48명의 조종사를 포함하여 35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이 비행대대는 붉은색 ("A"), 노란색 ("B"), 파란색 ("C"), 녹색 ("D")의 네 개 비행편대로 나뉘었다. FEB의 육군 구성 요소와 달리, 1oGAVCA는 숙련된 브라질 공군 (포르투갈어: Força Aérea Brasileira, 또는 FAB) 조종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PBY-5A 카탈리나U-199 (브라질 해안에서 작전 중이던 잠수함)를 격침시킨 알베르토 M. 토레스였다.[49]

브라질 부대의 조종사 48명 중 전쟁 임무를 수행한 조종사는 총 22명의 손실이 발생했다. 5명은 대공포화로 사망했고, 8명은 적지 상공에서 비행기가 격추되어 탈출했으며, 6명은 의학적 명령으로 비행 작전을 포기해야 했고, 3명은 비행 사고로 사망했다.

비행대대는 파나마미군 기지에서 전투 훈련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항공 소위 단테 이시도로 가스탈도니가 훈련 사고로 사망했다. 1944년 5월 11일, 비행대대는 작전 가능 상태로 선언되었고 파나마 운하 지대 방어에 활발히 참여했다. 6월 22일, 1oGAVCA는 리퍼블릭 P-47D 선더볼트로 기종 전환을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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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전투 비행대대 휘장

1944년 9월 19일, 1oGAVCA는 이탈리아로 떠나 10월 6일 리보르노에 도착했다.[50] "그룹"이 항공 그룹의 최소 한계 조종사 수로 전선에 도착했고, 가까운 미래에 교체 인력의 도착 예측이 없었기 때문에, 이 그룹은 미국 육군 항공대제350전투비행단에 비행대대로 편입되었고, 이는 다시 제12공군제62전투비행단의 일부였으며, 제22전술항공사령부에 속하게 되었다.[51][52]

브라질 조종사들은 1944년 10월 31일부터 개별적으로 제350전투비행단 비행대대에 소속되어 비행을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협력 비행을 하고 점차 더 위험한 임무에 참여했다. 2주도 채 되지 않은 11월 11일, 브라질 비행대대는 타르퀴니아 기지에서 자체 작전을 시작했으며, 전술 호출부호 잠보크를 사용했다. FAB 썬더볼트의 둥근 표식에는 흰색 미국 별 대신 브라질 공군 별이 그려졌다. 1oGAVCA는 FEB가 소속된 미국 제5군을 지원하기 위해 무장 수색 및 항공 저지 임무를 수행하는 전투 폭격기 부대로서 전투 경력을 시작했다. 1945년 4월 16일, 미국 제5군포강 계곡을 따라 공세를 시작했다. 이때 "그룹"의 병력은 공군 비행대대의 표준 규모인 23명으로 줄어들었는데, 일부는 전사하고, 일부는 격추되어 포로로 잡히고, 다른 일부는 부상이나 전투 피로로 인해 의학적 이유로 임무에서 해제되었기 때문이었다.[53]

1945년 4월 22일, 남은 세 편대가 오전 8시 30분부터 5분 간격으로 이륙하여 산베네데토 지역의 다리, 바지선, 차량을 파괴했다. 오전 10시에는 만토바 남쪽으로 무장 정찰 임무를 위해 한 편대가 이륙했다. 그들은 전차를 포함하여 80대 이상의 독일 군용 차량을 파괴했다. 그날 브라질 비행대대는 44회의 개별 임무를 수행했으며 많은 수의 차량과 바지선을 파괴했다. 이날 브라질군은 전쟁 중 가장 많은 출격 횟수를 기록했으며, 이에 따라 브라질은 4월 22일을 '브라질 전투기 병과의 날'로 기념한다. 브라질 제1전투비행대대는 총 2,546회의 비행과 5,465시간의 현역 비행으로 445회의 임무를 완수했다. 이들은 1,304대의 자동차, 13량의 철도 차량, 8대의 장갑차, 25개의 철도 및 고속도로 교량, 31개의 연료 탱크 및 탄약고를 파괴했다.

총 1oGAVCA는 1944년 11월 11일부터 1945년 5월 6일까지 총 445회의 임무, 2,550회의 개별 출격, 5,465시간의 전투 비행 시간을 수행했다. 제22전술항공사령부는 브라질 비행대대의 효율성을 인정하며, 전체 비행대대가 수행한 임무의 5%만을 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파괴량에서 훨씬 더 높은 비율을 달성했다고 언급했다.

  • 탄약고의 85%
  • 연료 저장고의 36%
  • 교량의 28% (19% 손상)
  • 자동차의 15% (13% 손상)
  • 마차의 10% (10% 손상)[54]

이탈리아 전역에서 브라질 제1전투비행대대의 총 작전 횟수:

임무 완료445
공격 임무2,546
방어 임무4
전쟁 작전 비행 시간5,465
총 비행 시간6,144
투하된 폭탄 총량4,442
소이탄 (F.T.I)166
파편 폭탄 (260 lbs)16
파편 폭탄 (90 lbs)72
철거 폭탄 (1,000 lbs)8
철거 폭탄 (500 lbs)4,180
폭탄의 대략적인 총 톤수1,010
발사된 .50 구경 탄약1,180,200
발사된 로켓 총량850
소비된 휘발유 (리터)4,058,651
자세한 정보 목표물, 파괴됨 ...

1986년 4월 22일, 브라질 공군 제1전투비행단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 포강 계곡 지역에서의 활약으로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수상했다.[55]

제1연락 및 관측 비행

육군을 지원하는 공군 부대인 제1전투비행대대와 달리, 제1 "연락 및 관측 비행" (포르투갈어 약어: E.L.O.)은 FEB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았다.[56] 1944년 7월 말에 창설된 제1 E.L.O.는 파이퍼 L-4H 컵에 함께 탑승한 공군 조종사와 육군 포병 관측병 등 예비역 장교들로 구성되었다. 이 항공 부대는 이탈리아 전역 내내 브라질 사단을 동반했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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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요약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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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피스토이아브라질 군사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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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제2차 세계 대전 전사자 기념비

FEB는 전후 피아첸차도, 로디도, 알레산드리아도 점령에 참여했다. 미군 지도자들은 브라질군이 연합국의 유럽 점령에 참여하기를 원했지만, 1945년 6월 초 브라질 육군 장관은 이 부대가 리우데자네이루의 제1군사 지역 사령관에게 종속되도록 명령했다. FEB는 1945년 말까지 브라질로 소환되었고,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군사 조직으로서 해체되었다.[57] 역사가 프랭크 맥캔에 따르면,[58] 브라질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오스트리아의 연합군 점령군에 합류하도록 초청받았다.[59] 그러나 브라질 정부는 FEB가 연합군 승리에 기여한 바가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정치적 영향력을 얻을 수 있을까 우려했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전쟁이 끝나는 즉시, 심지어 부대가 아직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을 때에도 FEB를 공식적으로 해산하기로 결정했다.[60]

브라질로 귀환한 FEB 전역자들은 다양한 제약을 받았다. 귀환 즉시 전역한 비군인 참전용사들은 공개적으로 훈장이나 원정군 제복을 착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직업 군인 참전용사들은 변경 지역이나 주요 도시 중심부에서 먼 지역으로 재배치되었다.[61]

최종 공세에서 사망한 수백 명의 브라질인들은 피스토이아의 FEB 묘지에 묻혔다. 마스카레냐스 지 모라이스 원수의 권고로, 전쟁에서 사망한 모든 군인들을 위한 새로운 영묘가 리우데자네이루에 건설되었으며,[62] 1960년 이 묘지는 폐쇄되었고 유해는 공식적으로 새로운 제2차 세계 대전 전사자 국가 기념비에 다른 브라질 전쟁 희생자들과 함께 안치되었다. 얼마 후, 옛 묘지에서 유해가 한 구 발견되었고, 브라질 정부는 1967년 그곳에 새로운 무명 용사의 무덤을 개장했다.

브라질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은 지역 외 해외 분쟁 중 가장 광범위했다. 주요 기여는 남대서양 전투였는데, 새뮤얼 모리슨 미 해군 소장은 이를 연합군 승리에 결정적이었다고 묘사했다.[63] 그러나 지상군을 해외로 파견하는 것은 더 큰 정치적, 사회적 가시성을 가졌으며, 국가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국민적 자부심을 불러일으켰다. FEB는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 있었던 약 30개 연합군 군사 조직(20개 사단과 10개 여단) 중 하나였다. 비록 FEB가 작전했던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브라질의 역할은 대체로 전술적이었고, 전략적 수준에서 큰 영향을 미 미치지 못했다.[64] 더욱이 이탈리아 전선은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과 8월의 남프랑스 침공 이후 양측 모두에게 부차적인 전선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FEB는 동시대인들에게 "주어진 모든 임무를 완수했으며 제4군단의 미군 사단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고 평가되는 대체로 효과적인 전투 병력으로 간주되었다.[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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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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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8일,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70주년 기념식에서 당시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이 FEB 참전용사(프라시냐스로 알려짐)들과 함께하고 있다.

브라질 정권이 연합군의 전쟁 노력에 더 깊이 관여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1943년 초에는 "Mais provável uma cobra fumar um cachimbo, do que a FEB ir para a frente da luta" (문자 그대로: "FEB가 전선에 나가 싸우는 것보다 뱀이 파이프를 피우는 것이 더 가능성이 높다")라는 속담이 유행했다.[66][note 1] FEB가 전투에 참전하기 전에는 "a cobra vai fumar" ("뱀이 담배를 피울 것이다")라는 표현이 브라질에서 "돼지가 날아다닐 때"와 비슷한 맥락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이후 사단 병사들은 스스로를 Cobras Fumantes (문자 그대로, 담배 피는 뱀들)라고 불렀고, 파이프를 피우는 녹색 뱀이 그려진 어깨 패치를 착용했다. 또한 브라질 병사들이 박격포에 "A Cobra Está Fumando..." (문자 그대로: "뱀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라고 쓰는 것도 흔했다.[67] 전쟁 후 그 의미는 뒤바뀌어, 무언가가 격렬하고 더 나쁜 방식으로 확실히 일어날 것이라는 뜻이 되었다. 이 두 번째 의미와 함께 "A Cobra Vai Fumar!" (문자 그대로: "뱀이 담배를 피울 것이다!")라는 표현은 오늘날까지 브라질 포르투갈어에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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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브라질
  • 대서양 해전 (제2차 세계 대전)
  • 브라질 앳 워 – 브라질의 기여를 찬양하는 미국 선전 영화.
  • 몬테 카스텔로 전투
  • 콜레키오 전투
  •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브라질
  • 엘자 메데이로스 – 브라질 소령으로, FEB에서 가장 높은 계급의 여군 장교였다.
  • 막스 볼프 – FEB 출신의 브라질 전쟁 영웅.
  • 멕시코 원정 공군

내용주

  1. 포르투갈어: Mais fácil uma cobra fumar um cachimbo, do que a FEB embarcar para o combate.

각주

참고 자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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