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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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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6부(新羅 六部)는 신라에 있었던 6개의 부이다. 삼국사기에는 진한 6촌이 그 기원이라 전하며, 사로국을 이루었다 하여 사로 6촌이라고도 한다. 현재 한반도 동남쪽에 있었던 부족연맹체 진한에서 신라의 기반이 된 서라벌의 여섯 부락이며, 씨족 집단으로 육촌(六村) 또는 육부촌(六部村)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고조선의 유민이 나뉘어 살며 생겨났다고 하였다.[1] 유리 이사금이 서기 32년에 각 촌(村)을 부(部)로 바꾸었다고 전한다.[2]
신라 6부는 이후 신라의 국정운영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으며, 6부 바깥의 이들을 노인(奴人)이라 하기도 하였다. 6부소감전(六部小監典)이라는 관청이 설치되어 행정 업무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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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요약
관점
일찍이 진한 땅에 골짜기마다 조선의 유민들이 흩어져 살았는데, 6촌이 있었다. 6촌의 촌장들이 모여 박혁거세를 맞아 '사로(斯盧)'의 왕으로 받들어 진한 12소국의 하나인 사로 6촌이 되고, 점차 신라 6부로 발전하였다. 이들이 나중에 그 공으로 각기의 성(姓)을 받아 신라 6성을 이루었다고 전하고 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경주 6부로 개편되었다.
사로 6촌의 촌장들은 처음 표암봉(瓢嵒峰)에 내려온 알천 양산촌장 알평(謁平), 형산(兄山)에 내려온 고허촌장 소벌도리[18](蘇伐都利), 화산(花山)에 내려온 진지촌장 지백호(智伯虎), 이산(伊山)에 내려온 대수촌장 구례마(俱禮馬),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온 가리촌장 지타(祉陀), 금강산(金剛山)에 내려온 고야촌장 호진(虎珍, 설거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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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 6촌
요약
관점
“ | 이보다 앞서 조선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아 6촌을 이루었으며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 ” |
— 《삼국사기》 〈신라본기〉 |
기원전 2세기경까지 경주 중앙분지 내부(북천, 형산강, 남천으로 둘러싸인 현 시가지 일대) 일대에 대규모 취락이 들어섰다는 증거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반면 산곡으로 둘러쌓인 소분지인 오류천 연안의 하구리분묘군과 남산 서북쪽 자락에서 추정 입대목과 환호시설이 확인되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런 양상은 초기 문헌 기록에 언급되는 6촌 선주 세력이 산곡 사이에 터전을 잡았다는 정황과 일정 정도 부합된다고 판단된다.[19] 주변 하천(북천, 형산강, 남천)의 범람 가능성과 지하수 복류-습지라는 저해 요소로 인해 본격적인 점유, 집주화가 상대적으로 늦어졌음을 보여준다.[20]
알천 양산촌
알천[21][22][23] 양산촌[24]의 남쪽은 고려시대의 담엄사이다. 고려시대의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25]
- 경주시 동방(東方), 인왕(仁旺), 구황(九黃), 노동(路東), 노서(路西), 동부(東部), 성동(城東), 성건동(城乾洞) 일대.
돌산 고허촌
고려시대의 구량벌(仇良伐) · 마등오(麻等烏) · 도북(道北)· 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속한다.[26]
- 경주시 배동(拜洞), 내남면 덕천리, 울주군 두서(斗西), 두동면(斗東面) 일대.
취산 진지촌
진지(또는 빈지, 빈자, 영지)촌이다. 고려시대의 시파 등 동남촌이 여기에 속한다.[27]
-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외동읍(外東邑) 일대.
무산 대수촌
무산[28] 대수촌[29]은 고려시대의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30]이 여기에 속한다.[31]
- 경주시 현곡면(見谷面) 일대.
금산 가리촌
고려시대의 금강산 백률사의 북쪽 산이다. 고려시대의 상ㆍ하서지(上下西知) · 내아(乃兒) 등 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32]
- 경주시 감포읍(甘浦邑) 양남(陽南). 양북면(陽北面) 일대.
명활산 고야촌
고려시대의 물이촌(勿伊村) ·잉구미촌(仍仇旀村) · 궐곡(閼谷, 또는 갈곡(葛谷))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속한다.[33]
- 경주시 천북면(川北面) 화산(花山), 물천(勿川) 동산리(東山里) 일대.
사로 6촌 위치 추정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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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 6촌의 형성과정[34]
요약
관점
BC 2세기 ~ BC 1세기
지역 단위를 훨씬 넘어선 원거리 교역이 대폭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물류, 유통, 재분배와 소요 비용 절감, 정보 연대에 적합한 형태로 사회경제적 연합체를 꾸리고자 지역 단위를 내부 결속한 국(國)이 등장한다. 이들 취락들은 지형, 교통적 측면에서 영역 경계로 들어오는 초입부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발전한다. 제정일치 시기로 거서간, 차차웅의 왕호를 사용하였다.
BC 1세기 ~ AD 1세기
위만조선의 유입으로 큰 변화가 있었으며 왕호도 이사금으로 바뀌었다는 견해가 있다. 현실적 차원에서 대외 교역 능력을 겸비한 경제 기반이 현저해지고,[35] 삼한이 국읍 안에서 따로 천군이라는 제사장을 둘 만큼 제정 분리된 사회로 언급된다.[36]
이시기 주목할만한 거점은 아래와 같다.
- 사로국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주요 거점으로 급부상한 경주 중앙분지 일대
- 동해안 교통로이자 철기생산 거점으로 편입된 달천광산으로 이어지는 동남부 조양동-죽동리 일대
- 선진 문물의 유입 창구로 중시된 서북부 모량리 일대
3세기 전후
중앙분지의 월성, 월성북고분군 일대가 국읍으로 고정되면서 다른 읍락들 또한 국읍을 구심점으로 재편된다. 주요 거점으로 고정된 지역은 남쪽 덕천리분묘군, 동남쪽 죽동리분묘군, 서쪽 금척리고총군, 북쪽 안계리고분군이다. 동북쪽 천군동분묘군의 역할도 유지된다. 국호를 계림으로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6부
사로가 신라로 발전하면서 6촌은 6부로 자리잡았다.
- 양산촌은 급량부(及梁部, 또는 양부(梁部)),
- 고허촌은 사량부(沙梁部, 또는 사탁부(沙啄部)),
- 진지촌은 본피부(本彼部),
- 대수촌은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42](牟良, 牟梁)),
- 가리촌은 한기부(漢歧部, 또는 한지부(漢祗部)),
- 고야촌은 습비부(習比部)로 자리잡아 신라의 6부로 발전했다.
양산촌, 고허촌, 진지촌은 왕경 내에 있었고, 대수촌, 가리촌, 고야촌은 외곽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된다. 왕경 내의 양산촌, 고허촌, 진지촌이 세력이 컸을 것이고, 그 중에서도 초기에는 양산촌이 중추로 있다가 6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양산촌인 양부와 고허촌인 사량부와 진지촌인 본피부가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44][45]
금석문에 나타나는 6부명과 그에 대한 대응은 이렇다. 1차사료인 금석문에서 훼(喙) 글자가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량(梁)이라 적혔다. 또한 <集韻>에서 ‘涿’이 지명과 같은 고유명사로 쓰일 때는 ‘秱’으로도 쓴다고 되었는데, ‘涿’과 ‘秱’의 관계와 ‘啄’과 ‘喙’의 관계를 같은 개념으로 해석하면 '훼(喙)' = '탁(啄)' = '량(梁)이 되며 'dolk', dalk' 정도로 재구할 수 있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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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6성
서기 32년(유리왕 9) 6부의 후손들이 알평은 이씨(李氏), 소벌도리는 최씨(崔氏), 지백호는 정씨(鄭氏), 구례마는 손씨(孫氏), 지타는 배씨(裵氏), 호진은 설씨(薛氏)를 성씨(姓氏)로 받아[47] 각 성씨의 시조가 되었고, 뒤에 후손들이 모두 계림(鷄林, 경주)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48]
왕성(王姓)인 박씨(朴氏), 석씨(昔氏), 김씨(金氏)와 함께 신라 토성(土姓)으로 인식된다.[49]
학자별 6촌 6부 거주 성씨 제설[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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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6부
요약
관점
고려가 통일한 뒤인 940년(고려태조 23)에 '경주'(慶州)라는 이름과 함께 급량부는 중흥부(中興府), 사량부는 남산부(南山部), 본피부는 통선부(通仙部), 점량부는 장복부(長福部), 한기부는 가덕부(加德部), 습비부는 임천부(臨川部)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고려 경주 6부와 신라 6부의 위치가 일치하는 곳은 모량부의 후신인 장복부 외에 전무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각 부에 속하는 마을들을 다음과 같이 비정한다.[51]
중흥부(中興府)
- 波潛(파잠) - 감포읍 팔조리
- 波潛은 ‘바졤·바졈' 정도로 재구되는데 八助里의 원래 이름이 ‘바짐’이었다. 뜻은 '끼다'로 중세어는 'ᄢᅵ다'이다. 비집다, 비좁다도 동계어로 추정한다
- 東山(동산) - 양북면 안동리 동매산
- '동'은 고유어 '끄트머리의 작은 부분'의 음차이다. 동매산은 표고 56m의 작은 산이다.[52]
- 彼上(피상) - 미상
남산부(南山部)
- 구량벌(仇良伐) - 울주군 구량리
- 마등오(麻等烏) - 울주군 이전리
- 선조실록에 마등오가 울주군 이전리 허고개 근처라는 기록을 근거로 한다. '烏(*ʔa)'는 까마귀 울음소리를 표시한 글자로 烏山縣 → 孤山縣에서 孤(ka)로 치환되기도 했다. 이로부터 마등오(麻等烏)는 '마등가' 즉 마등산의 가장자리란 뜻으로 추론할 수 있다.
- 회덕(廻德) - 울주군 전읍리
- 錢邑里의 예전 이름은 廻(回)隱村이다. 돌은(廻隱) -> 돈(錢)의 변화로 본다.
- 도북(道北) - 미상
장복부(長福部)
- 박곡촌(朴谷村) - 건천읍 조전리
- 현재 '박실'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근처에 울개산(蔚介山·鬱介山)이 있는데 '鬱·蔚' 모두 울창하다는 뜻으로 대수촌(大樹村)과 의미가 통한다. '鬱·蔚·大樹'는 고유어 가개/*kake/로 재구된다.
통선부(通仙部)
- 시파(柴巴) - 외동읍 신계리
- '柴'와 '薪'의 훈이 모두 '섭'으로 통한다.
가덕부(加德部)
- 내아(乃兒) - 양남면 나아리
- 하서지(下西知) - 양남면 하서리
-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아릿섯골’로 불렀다고 한다. 바닷가쪽 저지대를 의미한다.
- 상서지(上西知) : 양남면 신서리
- '웃섯골'로 불렀다고 한다. 내륙쪽 고지대를 의미한다.
임천부(臨川部)
- 물이촌(勿伊村) - 천북면 물천리
- 골짜기 뒤쪽으로 물러 들어가 흐르는 물천(勿川)에서 유래했거나, 움푹 들어간 산자락을 뜻하는 퇴뫼(退山)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 잉구미촌(仍仇彌村) - 천북면 성지리
- '잉(仍)'은 '넙'으로 읽고 '넓다'를 뜻한다. '구미(仇彌)'는 중세어 '구무', 현대어 '구멍'의 고대어로 안쪽으로 쑥 들어간 곳을 말한다. 즉 '넙구미'는 좁은 골짜기를 지나 넓은 길이 나오는 지형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성지리(聲池里)의 '聲(소리)'는 좁다는 의미인 '솔다'의 훈가자이며 성지리 윗쪽을 현지에서 ‘너브골’이라고 했다.
- 궐곡(闕谷)ㆍ갈곡(葛谷) : 천북면 갈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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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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