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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라-샤틸라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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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라-샤틸라 학살(Sabra and Shatila massacre)은 1982년 9월 16일 18시에서 18일 08시 사이에 레바논의 기독교 우익(팔랑헤주의)정당인 카타이브의 민병대가 팔레스타인인 및 시아파 레바논인 민간인 최소 460명-최대 3,500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사브라는 학살이 일어난 베이루트의 동(洞) 이름이고 샤틸라는 그에 인접한 샤틸라 난민촌을 의미한다. 카타이브는 이스라엘군의 감독을 받아가며 대규모 학살을 저질렀다.[1][2][3][4] 카타이브는 이스라엘 방위군(IDF)과 동맹관계였고, 사브라와 샤틸라에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세력을 일소하라는 IDF의 주문에 따라 이런 학살을 자행했다. IDF는 사태를 고의적으로 통제하지 않았다.[5]

이 학살은 카타이브의 당수이자 레바논 신임 대통령에 당선된 바시르 게마옐의 암살에 대한 보복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카타이브는 이 암살이 PLO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1982년 6월, IDF는 PLO를 뿌리뽑겠다며 레바논을 침공했다(1982년 레바논 전쟁). 그해 중엽, PLO는 다국적군의 감독하에 레바논에서 철수했다. 그 뒤 다국적군도 철수하자 IDF와 카타이브가 베이루트를 포위했다.[6] 이스라엘의 이런 행위는 휴전협정 위반으로 여겨졌다.[7] 이스라엘 육군이 사브라와 샤틸라의 모든 출구를 봉쇄함에 따라 난민들은 탈출도 하지 못하고 카타이브에게 속수무책으로 살육되었다. 이스라엘군은 카타이브의 요청에 따라[8] 밤에는 조명탄까지 쏘아 주었다.[9][10]
1983년, 국제연합 사무총장보 겸 총회의장 숀 맥브라이드가 위원장을 맡은 위원회는 이스라엘이 폭력사태의 책임이 있으며,[11] 이 학살이 집단살해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12] 같은 해 이스라엘에서도 카한 위원회가 자체 조사를 진행하여 당시 이스라엘 군인들이 학살이 진행되는 것을 인지하였으나 그것을 멈추기 위한 행동을 하는 데 실패했고, 당시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에게 "개인적인" 간접적 책임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샤론은 실각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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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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