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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마리아 (선박)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1차 항해 당시의 기함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산타 마리아 (선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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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마리아(스페인어: Santa Maria)는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카스티야 연합왕국이사벨 1세로 부터 후원받아 나선 대서양 횡단 항해의 기함이었다.[1] 정식 명칭은 라 산타 마리아 델 라 인마쿨라다 콘셉시옹(스페인어: La Santa María de la Inmaculada Concepción, 무염시태의 성모 마리아)이었다. 갈리시아주폰테베드라에서 건조되어 라 갈레야(La Gallega)로 이름 지어졌으나 콜럼버스의 항해에 나서며 이름을 바꾸었다.[2]

간략 정보 배의 이력, 종류 ...

산타 마리아는 중간 크기의 카라카(나오)로 갑판 길이 약 62 ft (18.9 m)상선이었다. 1575년 후안 에스칼란테 데 멘도사는 산타 마리아의 크기를 100 옛 건조톤 보다 아주 조금 더 컸다고 묘사하였다.[3][4] 단일 갑판에 세 개의 돛대가 있었다. 후안 데 라 코사가 선주 겸 선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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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

요약
관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오랫동안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 개척을 열망하였다. 그는 유럽의 서쪽에서 인도의 동쪽 까지가 모두 바다일 것이라 예상하였고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결국 인도에 닿을 것이라 주장하며 후원자를 물색하였지만 순탄하지 않았다. 1488년에 포르투갈바르톨로뮤 디아스희망봉을 발견하고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에 닿는 항로가 열리자 이웃한 카스티유 연합왕국(훗날 스페인)은 크게 자극받아 콜럼버스 후원을 결정하였다.[5]

콜럼버스의 첫 원정대는 산타 마리아와 니냐, 핀타의 세 선박으로 구성되었다. 함께 항해한 선원의 기록과 15세기 - 16세기 당시 포르투갈과 스페인 선박의 일반적 형태를 감안하면 산타 마리아는 선체 길이 19 m (62 ft), 용골 길이 12.6 m (41 ft), 폭 5 to 5.7 m (16 to 19 ft) 정도로 적재 용량은 약 100~150 톤 정도였을 것이다.[6] 니냐와 판타는 그 보다 조금 작은 선박으로 갑판 길이 약 15 to 18 미터 (49 to 59 ft), 적재 용량 50~75 톤 정도였다.[3]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92년 8월 3일 팔로스데라프론테라를 떠나 항해에 올라 10월 12일 바하마 제도에 도착하였다.[7] 이후 카리브해 여러 섬을 탐험하던 산타 마리아는 12월 24일 좌초 되었다. 당시 항해를 지휘하며 이틀 째 잠을 자지 못하였던 콜럼버스는 잠자리에 들면서 조타수 마저 쉬게 하고 선원 한 명에게 조타를 맡겼는데, 이는 당시에도 엄격히 금지된 위험한 행동이었다. 선원이 키를 잡고 있는 사이 해류에 떠밀린 산타 마리아는 모래톱에 좌초되었다.[8][9][10] 이튿날 산타 마리아가 수리 불가능한 상태란 것을 확인 한 콜럼버스는 선박을 해체하여 임시 주둔지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지어진 주둔지에 크리스마스를 뜻하는 라 나비다드(La Navidad)라는 이름을 붙였다.[11][12]

콜럼버스는 니냐와 핀타 두 척 만으로 항해를 계속하여 1493년 3월 13일 팔로스데라프론테라에 귀항하였고 이후 세 차례 더 대서양을 횡단하였다.[5] 콜럼버스는 자신이 발견한 곳이 인도 동부의 어디쯤이라고 생각하였고, 이런 이유로 카르브해 여러 섬은 이른바 서인도 제도로 불렸다.[13] 그곳이 인도가 아니라 유럽에 알려지지 않았던 아메리카라는 것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항해 이후의 일이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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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

콜롬버스는 첫 항해에 나설 선원을 출발지인 팔로스데라프론테라와 인근의 안달루시아주에서 모집하였다. 산타 마리아의 원래 기항이었던 갈라시아주에서도 숙련된 선원을 모집하였다. 모집한 선원 가운데는 결투 중에 사람을 죽이고 투옥되었으나 탈옥했던 사람과 그의 탈옥을 도왔던 4 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당시 모두 사면을 받은 상태였지만, 이 때문에 콜럼버스의 원정대는 범죄자로 이루어졌다는 오해가 번지기도 하였다.[15]

훗날 콜럼버스의 첫 항해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덧대어 지면서 꾸며진 이야기들도 많다. 자금이 부족하자 이사벨 1세가 남편 페란도 2세로 부터 받은 목걸이를 내놓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원정대의 자금은 대부분 세비야의 귀족과 제노바 공화국의 상인들이 내놓았다.

출항 당시의 선원 명부는 아래와 같다.[16]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성씨가 없었기 때문에 선원들의 경우 이름 뒤의 명칭은 단순히 출신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원정대장
  • 후안 데 라 코사, 선주 겸 선장
  • 페드로 알론소 니뇨, 항해사
  • 디에고 데 아라나, 무기장
  • 페드로 데 구티에레스, 왕실 집사
  • 로드리고 데 에스코베도, 함대 서기
  • 로드리고 산체스, 회계 감사관
  • 루이스 데 토레스, 통역사
  • 바르톨로메 가르시아, 갑판장
  • 차추, 갑판장
  • 크리스토발 카로, 금세공인
  • 후안 산체스, 의사
  • 안토니오 데 쿠엘라르, 목수
  • 디에고 페레스, 화가
  • 로페, 가구 제작자
  • 로드리고 데 트리아나
  • 마에스트레 후안
  • 로드리고 데 헤레스
  • 알론소 초세로
  • 알론소 클라비호
  • 안드레스 데 이루에네스
  • 바르톨로메 비베스
  • 바르톨로메 데 토레스
  • 디에고 베르무데스
  • 도밍고 데 레케이티오
  • 곤살로 프랑코
  • 자코멜 리코
  • 후안 (라 라비다 수도원의 호라시오 크라사시오)
  • 후안 데 헤레스
  • 후안 데 라 플라카
  • 후안 마르티네스 데 아코케
  • 후안 데 메디나
  • 후안 데 모게르
  • 후안 루이스 데 라 페냐
  • 마린 데 우르투비아
  • 페드로 이스키에르도
  • 페드로 데 레페
  • 페드로 데 살세도, 콜럼버스의 비서
  • 로드리고 데 가예고
  • 페드로 데 테레로스, 비서
  • 디에고 가르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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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역사적인 선박이었던 산타 마리아는 여러 차례 복원 제작이 이루어졌다. 정확한 제원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복원 선박마다 제각기 설정이 다른 부분이 있다. 1892년 스페인 정부는 콜럼버스 항해 400주년을 기념하여 카라카(나오)를 기반으로 산타 마리아를 복원하였고[17] 1986년 밴쿠버에서 열린 엑스포 86을 기념한 복제품이 제작되었다.[18] 1991년 콜럼버스 항해 1500주년을 기념하여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시가 복원 선박을 제작하였고[19], 출발지였던 팔로스데라프론테라 역시 1992년 실제 크기의 복원 선박을 건조하였다.[20] 1998년 마데이라[21], 2008년 폴란드의 아르카디 피들러 박물관[22] 에서도 복원 선박을 만들었다.

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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