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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요시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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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요시나리(일본어: 宗義成, 1604년 음력 1월 15일 ~ 1657년 음력 10월 26일)는 쓰시마 후추번의 제2대 번주이다.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11년 10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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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게이초 9년(1604년) 1월 15일 초대 번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게이초 20년(1615)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상경하여 오고쇼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도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알현하고 가독상속을 허락받아 제2대 번주가 되었다. 같은 해 4월부터 시작된 오사카 전투에 도쿠가와 군으로 참전하고 단바방면의 수비를 담당했다.
겐나 3년(1617년) 3월, 종4위하(従四位下)에 서위(叙位)되었다. 그 후, 검지(検地, 토지 조사)를 하고 보다이지(菩提寺)[2]인 반쇼인(万松院)을 창건했다. 조선 통신사의 대우 간소화에 의한 재정절감을 하고, 은광개발 등을 적극적으로 행하고 번의 정책의 기초 굳히기에 전념했다. 그런데 간에이(寛永) 12년(1635년), 부친이 조선과 기유약조(己酉約条)를 맺었을 때 국서를 위조한 사실 등이 막부에 폭로되어 소(宗) 씨는 개역(改易)[3]의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徳川家光)는 조선과의 통로역으로서 소 씨를 이용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결단에 의해 가로인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등이 처벌되는데 그쳐 소 씨는 개역을 면한 것이다(柳川一件-야나가와 잇켄).
조선 인조 23년(1645년) 6월 조선에서 표류해 온 사람들을 조선의 동래부로 송환하였다. 동래부사 이원진은 이때 회답하는 서계에서 감사하는 뜻을 전하면서 향후 오가는 국서의 자항(字行)의 높낮이도 어긋남이 없도록 해달라고 청하였다고 전하고 있다.[4]
메이레키(明暦) 3년(1657년) 10월 26일에 에도에서 향년 54세로 사망했다. 가독은 장남 요시자네(義真)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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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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