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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의 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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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의 곽씨(淑儀 郭氏, 생몰년 미상)는 조선 연산군의 후궁이다.
생애
가계와 후궁 책봉
연산군의 후궁이다. 아버지는 현풍 곽씨[1] 곽인이며, 어머니는 권치중의 딸로 곽인에게는 계실이다. 원래 곽인은 유수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곽임종을 두었다. 한편 곽씨의 외할머니 이씨는 양녕대군과 그 첩의 딸이다[2][3].
원래 곽씨는 간택에 뽑혔다가 탈락하여 허혼이 되었다. 이에 이세좌의 집안과 정혼을 하고 이세좌 집안 측에서 납채까지 했으나, 성종의 명으로 금혼해야 했다[4]. 이에 1491년(성종 22년) 음력 10월 16일부터 수 일에 걸쳐 전고에 없다는 이유로 곽씨를 금혼하지 말라는 상소가 올라왔으나, 성종은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5][6]. 결국 곽씨는 이 해 음력 11월 4일 세자궁의 종3품 후궁 양원에 책봉되어 이듬해 음력 1월에 입궁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한편 곽씨의 책봉을 기록한 사관은, 곽씨 책봉 사실과 함께 곽씨 친족들의 좋지 않은 행실들을 자세히 기록해놓고 있다[2].
후궁 시절
연산군 즉위 후에는 종2품 숙의에 봉해졌으며, 1505년(연산군 11년) 음력 6월 27일 죄인 이유녕의 집을 하사받았다[7]. 또 1506년(연산군 12년) 음력 2월 18일에는 곽씨의 아버지 곽인이 연산군의 다른 숙의들의 아버지와 함께 당상에 제수되었으며[8], 음력 3월 5일에는 곽씨가 정세량의 집을 사고자 하여 연산군이 직접 집의 시가를 아뢰라는 명을 내렸다[9]. 그 외 곽씨의 후궁 시절에 대한 기록은 특별히 남아있는 것은 없으나, 곽인의 벼슬 제수와 집 구매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곽씨가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10].
폐위 후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폐위되자, 아버지 곽인은 탄핵을 받고[11] 곽씨는 출가하여 정업원으로 들어갔다[10]. 1519년(중종 14년) 음력 12월 17일 당시 연산군의 숙의 중에는 윤씨와 곽씨만이 생존해 있었으며, 중종의 명으로 혜양하게 하였다[12]. 이어 1522년(중종 17년)에는 정업원의 주지 자리에 있었는데[13], 곽씨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정업원의 주지이다[10].
한편 곽씨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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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 아버지 : 곽인(郭璘, 생몰년 미상)
- 어머니 : 권치중(權致中)의 딸
- 시아버지 : 제9대 성종(成宗, 1457~1494, 재위:1469~1494)
- 시어머니 :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55~1482)
- 남편 :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재위:1494~1506)
시어머니:정현왕후 윤씨
출처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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