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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오브 이노센스 는 미국의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인 데이비드 악셀로드 의 데뷔 앨범이다. 이 앨범은 1968년 10월 캐피틀 레코드를 통해 발매되었다. 당시 대중음악의 실험적 분위기를 반영하고자, 악셀로드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1789년 그림 시집인 송 오브 이노센스》를 해석한 모음곡 형식의 교향시로 앨범을 구성했다. 녹음은 로스앤젤레스의 캐피톨 스튜디오 에서 진행되었으며,키보디스트이자 지휘자인 돈 랜디를 비롯해 기타리스트 앨 케이시, 베이시스트 캐럴 케이, 드러머 얼 팔머 등 Wrecking Crew로 불리는 정상급 스튜디오 뮤지션들과 오케스트라가 참여했다.

기악 재즈 퓨전 앨범인 송 오브 이노센스클래식, , 펑크, , 연극 음악 등의 요소를 결합한 작품이다. 악셀로드는 베이스, 드럼, 현악기를 중심으로 음악을 편곡했고, 팔머가 연주한 템포를 중심으로 한 록 장르의 작곡 기법을 사용했다. 그는 오케스트라 편곡에서 대조적인 기법을 사용해, 블레이크의 시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주제를 반영하고자 흥겨운 사이키델릭 R&B 구조에 극적이고 강렬한 편곡을 더했다. 그 결과 탄생한 음악은 경건하면서도 환각적인 색채를 띠며, 시인이 탐구한 순수함과 영성의 주제를 떠올리게 한다는 해석을 받고 있다.

록과 재즈 기법을 접목한 점에서 혁신적이었으나, 《송 오브 이노센스》는 상업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야심적이지만 다소 무모한 실험작으로 여겼던 당시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 작품은 재조명되었고, 비평가들은 이를 클래식으로 재평가 했으며, 동시에 힙합일렉트로니카 계의 유명 디제이들이 이 앨범을 재발하며 곡들을 샘플링하기 시작했다.. 특히 앨범의 대표곡인 "Holy Thursday"는 힙합 프로듀서들에 의해 자주 샘플링되었다. 이러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면서 Stateside Records에서는 2000년에 송 오브 이노센스를 재발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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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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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셀로드 1970c.

1960년대, 악셀로드는 로스앤젤레스의 캐피틀 레코드 에서 프로듀서이자 A&R 임원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 그는 바로크 클래식 사운드, R&B 리듬, 그리고 영적 주제를 결합한 자신만의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1] 그는점점 더 세련된 감각을 갖춘 새로운 음반 소비층의 등장을 주목하며, 1960년대 중반 브라이언 윌슨조지 마틴의 스튜디오 실험을 확장하고자 했던 1960년대 후반 로스앤젤레스의 개성 강한 음악가들 중 한 명이었다.[2] 이러한 창의적인 비전의 첫 번째 시도로, 그는 지역의 가라지 록 밴드인 일렉트릭 프룬즈 를 위해 종교적 주제를 담은 사이키델릭 오페라를 작곡했다. 밴드가 녹음을 끝내기에는 너무 어려움을 느끼자, 악셀로드는 Wrecking Crew 의 스튜디오 뮤지션들을 섭외해 앨범을 완성했고, 이 작품은 1968년 F단조 미사곡 이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다. [1] 이 녹음은 그에게 논란과 전국적인 명성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3]

F단조 미사곡 의 성공 이후, 악셀로드는 캐피톨 레코드로부터 비슷한 스타일의 앨범을 녹음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4] 그는 당시 대중음악의 실험적 분위기를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으며,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을 앨범에 각색하기로 결정했다. [3] 블레이크의 시를 음악으로 옮기는 작업은 음악가와 작곡가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가 높았다. [5] 1870년대 이후, 수많은 클래식 음악 작곡가들이 그의 시를 음악으로 편곡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대중음악, 뮤지컬 그리고 1960년대 포크 음악 분야에서도 이어졌다.[6] 스스로를 "블레이크 광"이라고 표현했던 악셀로드는 10대 후반부터 블레이크의 그림과 시에 깊이 매료되었으며 성인이 된 후에도 그의 작품을 꾸준히 탐독했다.[7] 그는 캐피톨 레코드에서 근무하던 중 블레이크의 시 전집을 구입한 후, F단조 미사곡을 작곡하기 몇년 전 부터 송 오브 이노센스의 구상을 다듬고 있었다.[8] 악셀로드는 동료들과의 교류가 많지 않았고, 특히 음반 제작자나 업계 인사들과도 친분을 쌓지 않았다. 그는 블레이크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시인을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데 매우 서툰 인물"로 여겼다. [9]

"송 오브 이노센스"는 발표 당시 평론가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선견지명이 담긴 기묘한 작품으로 여겨졌으나, 오늘날에는 단순히 시대를 초월한 훌륭한 팝 아트 작품으로서, 첫 발매 이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영감을 주고 있다.

— 톰 주렉 (AllMusic, 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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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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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의 캐피틀 레코드 빌딩, 캐피틀 스튜디오가 위치한 곳.

악셀로드는 단 일주일 만에 송 오브 이노센스를 작곡하했으며, 1968년 중반에 녹음을 시작했다.[11]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키보디스트이자 지휘자인 Don Randi, 기타리스트 Al Casey, 베이시스트 Carol Kaye, 드러머 얼 파머를 포함한, Wrecking Crew의 베테랑 스튜디오 뮤지션들과 함께 Capitol Studios 에서 앨범을 녹음했다.[12] 그는 캐피톨 레코드 소속 아티스트들의 세션을 프로듀싱하면서 이들과 함께 작업한 경험이 있었다. [3]

악셀로드는 송 오브 이노센스에서 직접 악기를 연주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편곡을 맡았으며 33명의 연주자들이 그의 악보에 적힌 차트에 따라 연주하도록 했다.[13] 그는 1950년대 재즈 연주자들로부터 복잡한 음악 차트를 읽고 오케스트레이션 하는 방법을 배웠다. [14] 이번 녹음에서 Randi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으며, 피아노와 오르간을 연주했다. [3] 한편 악셀로드는 동시대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처럼 녹음 부스에서 세션을 듣는 것을 선호했다. "그렇게 하면 소리가 여기저기 흩어지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다 스튜디오에서는 음악이 너무 작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스튜디오에서는 음악이 너무 작게 느껴집니다." [15] 악셀로드는 원래 일부 곡에 대규모 합창단을 포함시키고자 했으나, 적절한 앙상블을 찾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결국 그는 전곡을 기악곡으로 녹음했으며, 악보의 각 섹션에 블레이크의 작품을 하나씩 반영했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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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과 연주

발매 및 반응

유산과 영향력

수록곡 목록

참여 인원

발매 이력

또다른 참조

참고 문헌

참고 문헌

추가 읽을거리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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