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질문
타임라인
채팅
관점

시나노강 학살 사건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시나노강 학살 사건
Remove ads

시나노강 학살 사건(일본어: 信濃川虐殺事件)은 1922년 7월 일본제국 니가타현 쓰난정 시나노강 발전소 건설현장에서 오오쿠라 재벌에 고용된 100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살해된 사건이다.

간략 정보 날짜, 위치 ...
Remove ads

상세

수력발전소 건설 시작

1922년 7월, 신에츠전력 주식회사(신월전력주식회사)[1]시나노강의 지류인 나카쓰강에서 나카쓰강 제1발전소수력발전소 건설을 개시했다. 오오쿠라 재벌이 그 시공사를 맡았다.[2] 모집된 건설인부는 약 1,000 명이었는데 그 중 절반 이상인 600명 가량이 조선인이었다. 노동자들은 일본인·조선인을 막론하고 좁아터진 방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소위 문어방 노동을 하면서 인해전술로 공사를 진행했다. 또한 십장들은 "근무태도가 나태하다" 등의 이유로 인부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시나노강의 조선인들의 시체

학대를 못 견디고 도망을 시도한 노동자들은 시나노강 발전소 공사소에서 오오쿠라 재벌의 십장들에게 살해되어 시나노강에 던져졌다. 노동자들의 시체는 상류에서 하류로 떠내려가 동년 7월 29일 요미우리 신문에 "신원 불명"의 시신 몇 구가 상류에서 흘러왔다는 기사를 처음 보도했다.[2][3] 살해된 노동자들 중 조선인이 다수였기 때문에 재일본조선노동자상황조사위원회가 결성, 재일 조선인 노동조건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동아일보는 국내 신문 중 최초로 이에 대한 기사를 냈으며,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탄압을 받았다.[4][5]

조선인들의 대응

시나노강 학살 사건에 박열이 소속되었던 사상단체 흑도회에서 조사 및 항의운동 등에 일정 구실을 하였다.[6]

진상규명 실패

정확히 얼마나 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살해당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100여명 정도가 될 것으로 추측된다.[7]

결과

동년 11월 동 위원회를 추진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도쿄조선노동동맹이 결성되었다.[8] 시나노강 학살 사건을 직접 목격하였던 일본인들은 대부분 고령의 나이로 사망한 상태이다. 이 부근에는 순직자 위령비가 몇개가 세워져 있으나, 학살이 아닌 순직으로 기록되어 있다.[9]

Remove ads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Loading related searches...

Wikiwand - on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

Remove a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