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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스티노 키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은행가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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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스티노 안드레아 키지(이탈리아어: Agostino Andrea Chigi, 1466년 11월 29일~1520년 4월 11일)는 이탈리아의 은행가이자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후원자였다.
그는 1466년 시에나에서 태어났으며, 고대부터 이어진 유서 깊은 키지 가문의 일원이자 저명한 은행가 마리아노 키지(Mariano Chigi)의 아들이었다.[1] 그는 1487년경 로마로 이주해 아버지와 함께 일했다. 막대한 자본을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교황 알렉산데르 6세(그리고 당시의 다른 여러 군주들)에게 거액의 대출을 제공해 더욱 부유해진 그는, 교황령과 나폴리 왕국의 소금 독점권, 그리고 톨파,[2] 아냐토, 이스키아디카스트로에서 채굴되는 명반의 독점권과 같은 수익성 높은 독점권을 획득함으로써 일반적인 상업 관행에서 벗어났다. 명반은 직물 산업에서 필수적인 매염제였다.
보르자 가문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뒤이어 잠시 즉위한 시에나 출신의 비오 3세 피콜로미니가 사망한 후, 그는 교황 율리오 2세가 선출되는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을 지원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교황은 키지를 델라 로베레 가문과 연결시키고, 그를 교황청 재무관 겸 공증관으로 임명했다. 교황과 그의 은행가 사이의 개인적 유대는 매우 긴밀하게 유지되었으며, 아고스티노는 1506년과 1510년의 두 차례 대규모 군사 원정에서 율리오와 함께 종군했다. 1511년에는 캉브레 동맹 전쟁에서 교황군에 대한 베네치아의 지원을 얻기 위해 파견되었다.[3]
아고스티노는 서유럽 전역과 경제적 연계를 구축했으며, 어느 시기에는 직원 수가 2만 명에 달했다. 그는 시에나로부터 “일 매니피코”(Il Magnifico, ‘위엄 있는 자’)라는 칭호를 받았다.[4]

키지는 “로마에서 단연코 가장 부유한 남자”가 되었으며,[5] 미술과 문학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는 피에트로 아레티노 등 여러 인물을 후원했으나, 자신의 교육에는 특히 라틴어 실력 부족과 같은 여러 빈틈이 있었다.[6] 그의 베네치아 출신 애인 프란체스카 오르데아스키는 로마 사교계의 화제였다.[7] 키지는 페루지노(《키지 제단화》를 의뢰함),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조반니 다 우디네, 줄리오 로마노, 일 소도마, 라파엘로 등 16세기 초의 거의 모든 주요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로마에서 라파엘로와 관련된 키지의 세 가지 예술 후원은 그의 동시대 명성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기념물로 남아 있다. 산타 마리아 델라 파체 성당의 한 예배당,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의 그의 영묘인 키지 예배당, 그리고 1579년 이후 빌라 파르네시나로 알려진 교외 저택이 그것으로, 모두 그의 전설적 명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8] 그가 테베레강가 트라스테베레에 지은 이 화려한 저택은 후대 소유자의 이름을 따라 오늘날 빌라 파르네시나로 불린다. 이 건물의 설계를 위해 키지는 건축 경험이 거의 없던 시에나 출신 화가 발다사레 페루치에게 의뢰했다. 그가 후원했던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조반니 다 우디네, 줄리오 로마노, 소도마, 라파엘로가 장식 작업에 참여했으며, 이곳에서 라파엘로는 《갈라테이아의 승리》 프레스코를 그렸다. 키지는 이 저택에서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그는 돈에 대한 경멸을 과시하기 위해 연회가 끝나면 은 식기를 모두 강물에 던졌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하인들이 창가 아래에 그물을 펼쳐 놓고 식기를 몰래 건져 올렸다. 키지 시대에 ‘비리다리오’(Viridario)라고 불린 이 별장은 은행 업무 공간이자 거주지 역할을 했으며, 이는 보통 은행 건물 1층의 영업 공간 위층에 살았던 당시 로마의 일반적인 은행가들과 그를 구별짓는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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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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