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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주 회랑
차드-리비아 국경 분쟁 지역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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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주 회랑(/ˈaʊzuː/; 아랍어: قطاع أوزو Qiṭāʿ Awzū[*], 프랑스어: Bande d'Aozou)는 차드 북부에 있는 리비아와의 국경을 따라 이어지는 땅으로, 차드의 보르쿠주, 엔네디주, 티베스티주 북부로 약 100킬로미터 길이로 뻗어 있으며 면적은 114,000km2이다. 아우주 회랑은 아우주라는 이름의 마을과 오아시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아우주 회랑은 차드-리비아 전쟁에서 리비아가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역사
요약
관점
이탈리아령 리비아

아우주 회랑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와 이탈리아 간의 회담에서 처음으로 정의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승리에 대한 이탈리아의 보상과 관련이 있었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제국의 식민지 중 어느 것도 받지 못했지만, 대신 영국으로부터 올트레 지우바(현 주바랜드)를 받았고, 프랑스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일부 영토를 이탈리아령 리비아에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1920년대의 많은 논의 끝에 베니토 무솔리니와 피에르 라발 사이에서 1935년 프랑스-이탈리아 협정이 체결되었는데, 여기에는 이탈리아가 리비아에 편입될 아우주 회랑을 받을 것이라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1] 이탈리아와 이 협정을 체결하려는 프랑스의 다른 이유들은 프랑스령 튀니지의 이탈리아계 튀니지인 공동체의 지위에 대한 문제와 미수복된 이탈리아 논쟁을 해결하며, 이탈리아를 스트레사 전선과 긴밀히 연계시켜 나치 독일과 가까워지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1]
이 협정은 2년 후 이탈리아가 나치 독일과 강철 조약을 체결하며 실패했고, 1935년 프랑스-이탈리아 협정의 비준서 교환(Instruments of ratification)은 이루어지지 않았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국경은 1955년까지 리비아의 통상적 국경으로 간주되었다.[1]
차드-리비아 국경 분쟁

우라늄 매장량이 풍부하다고 알려진[2] 아우주 회랑은 차드와 리비아 간의 분쟁과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1972년 4월,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의 지도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는 차드 대통령 프랑수아 톰발바예와 합의에 도달했다. 카다피는 차드 국민해방전선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차드에 대출을 제공하며, 이에 대한 대가로 차드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톰발바예는 리비아의 아우주 회랑에 대한 리비아의 영유권 주장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하여 1973년 리비아는 차드의 저항 없이 광물 자원이 풍부한 아우주 회랑을 점령하고 합병했다.[3]:38-39
그러나 1975년 차드 쿠데타 이후 톰발바예 정권이 몰락하며 리비아와 차드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리비아는 다시 차드 국민해방전선에 대한 자원을 강화했다. 프랑스 당국은 1977년 8월 펠릭스 말룸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아우주 회랑을 차드의 영토로 공식 인정했으며, 말룸은 1978년 2월 리비아와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3]:140-143 리비아의 아우주 회랑 점령은 이후 1978년부터 차드-리비아 전쟁으로 이어졌다. 리비아는 아우주 회랑을 포함하는 차드 국경 지역을 국경 지대(Borderlands)라고 부르며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4]
리비아는 아우주 회랑이 국경 지대의 일부이고, 과거부터 세누시야 교단 원주민이 거주했으며 원주민들의 거주권은 리비아가 상속했다고 주장했다.[4] 또한 비준되지 않은 1935년 프랑스-이탈리아 협정애서 이탈리아의 아우주 회랑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했음을 언급하며 주장을 뒷받침했다.[3]:38-39
차드 정부가 주장한 국경은 1955년 프랑스와 리비아 간의 조약에 기반을 두었으며, 이는 다시 영국과 프랑스 간의 영향권에 대한 1899년의 합의를 참조했다. 두 합의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이는 모든 차드 정당과 파벌이 동의할 수 있었던 한 가지 입장이었다.
1987년, 일명 토요타 전쟁으로 불린 차드-리비아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차드군은 리비아군을 아우주 지구에서 일시적으로 후퇴시켰다.[5] 차드와 리비아 간의 휴전은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지속되었고, 수년간 협상을 시도했으나 전부 결렬되었다.
1990년, 영토 분쟁은 국제사법재판소(ICJ)에 회부되었다. 마침내 1994년 2월, 국제사법재판소는 16대 1의 다수결로 국경 지대와 아우주 회랑에 대한 차드의 영유권을 인정하며 리비아의 주장을 종결시켰다.[4]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915호(1994년 5월)에 따라 유엔 아우조우 회랑 감시단을 설립하여 리비아군의 철수를 감시했으며, 철수가 완료된 후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926호(1994년 6월)에 따라 감시단 활동을 종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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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 1935년 프랑스-이탈리아 협정
- 차드-리비아 전쟁
- 리비아-차드 영토 분쟁 사건
- 유엔 아우조우 회랑 감시단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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