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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호야 대분화
기원전 5250년경 발생한 일본 규슈 남부의 화산 대분화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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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호야 분화 또는 키카이-아카호야 분화(일본어: 鬼界アカホヤ火山灰)는 일본 규슈의 키카이 칼데라에서 약 기원전 5250년에 발생한 가장 강력한 화산 분화이다. 이 분화는 332–457 km3 (80–110 cu mi)의 화산 물질을 분출하여 화산 폭발 지수(VEI) 7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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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키카이 칼데라는 약 94,000년 전 더 작은 규모의 나가세 분화를 일으켰고, 그보다 앞서 약 140,000년 전에는 코아비야마 분화가 있었다.[5][6][7]:{{{1}}}
분화 과정
요약
관점
키카이 칼데라에서는 16~9 cal ka BP 사이의 K–Km 테프라 층에서 화산 활동의 증거가 있다.[8]:{{{1}}} 다케시마 이류 산사태에 이어 나가하마 용암(NgL)과 헤이케조 화산재(K–Hj) 사건이 분화에 선행되었다.[8]:{{{1}}} 그 후 VEI 6의 플리니식 분화 (K–KyP)가 시작되어 고야(후나쿠라) 경석 낙하를 분출했다. 이 분출은 최소 28시간 동안 지속되었다.[9]:235 이 플리니식 분화의 후반부에는 화산 기둥이 붕괴하고 내부 플리니식 흐름인 후나쿠라 화산쇄설류 (K–Fn)가 발생했다.[8]:{{{1}}} K-KyP와 K-Fn의 총 부피는 40 km3 (9.6 cu mi)로 추정된다.[9]:{{{1}}} 이어서 VEI 7의 최종 칼데라 형성 아카호야 수증기성 플리니식 분화가 빠르게 뒤따랐다. 이 분화는 마그마와 바닷물의 접촉으로 인해 거대한 화산 기둥이 형성되면서 발생했다. 고야(다케시마) 화산쇄설류는 대규모 화산쇄설류로 이그님브라이트 (K–Ky)를 퇴적시켰고, 광범위한 테프라인 키카이-아카호야 화산재 (K–Ah)는 혼슈, 오키나와, 한반도 남부를 뒤덮었다.[8]:{{{1}}} 이 분화의 결과 키카이 화산에 20 km × 17 km (12 mi × 11 mi) 크기의 이중 칼데라가 형성되었다.[7]:{{{1}}}[10]
후나쿠라 화산쇄설류 이후, 고야 화산쇄설류가 발생하기 전에 키카이 칼데라 근처에서 큰 지진 (Ah1)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야쿠섬과 다네가섬에서 큰 지진동이 일어나 토양액상화가 발생했다.[11]:{{{1}}}[8]:{{{1}}} 또한 키카이-아카호야 화산재가 떨어지는 동안 두 번째 큰 지진 (Ah2)이 발생하여 사쓰마반도와 오스미반도에서 토양액상화가 발생했다.[11]:{{{1}}}[8]:{{{1}}}
분화가 끝날 무렵 또는 그 직후 거대해일이 발생했다. 일본 서부 해안을 따라 넓은 지역에 쓰나미 퇴적물이 형성되었는데, 특히 분화에 더 가까운 지역과는 달리 쓰나미 이후 키카이-아카호야 테프라가 퇴적된 300 km 떨어진 곳까지 분명하게 나타났다.[8]:335 쓰나미의 원인은 잘 이해되지 않지만, 시점을 고려할 때 칼데라 가장자리의 붕괴 가능성이 제기되었다.[8]:335
퇴적물
분화의 총 부피는 현재 133–183 km3 (32–44 cu mi) DRE로 추정되며, 이는 이전 추정치의 약 두 배에 달한다. 이때 헤드라인의 부피 추정치 332–457 km3 (80–110 cu mi)는 경석과 같은 가벼운 퇴적물과 관련이 있으며,[9]:{{{1}}} DRE 계산에 사용되는 일반적인 용암과는 다르다.[12] 분화는 부분적으로 수중에서 발생했으며, 그 특성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산쇄설성 밀도류의 일부가 수중 밀도류로 변형되어 총 71 km3 (17 cu mi)의 해저 퇴적물 부피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12] 칼데라 바닥 자체는 해수면 아래 300~500 m 지점에 있으며,[7](pp. 99 ) 연구하기 쉬운 대부분의 육상 퇴적물은 칼데라에서 약 40 km 떨어진 곳부터 시작된다.[8]:337 분화 깊이의 중요성은 해저에 달라붙는 밀도류가 얕은 수중 환경에서는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12] 육상에는 5 km3 (1.2 cu mi)의 이그님브라이트 퇴적물이 존재하며, 현재 4,500 km2 (1,700 mi2) 면적을 덮는 것으로 알려진 광범위한 테프라의 부피는 249–374 km3 (60–90 cu mi)이다.[12] 주 분출 이그님브라이트는 대부분 건조하므로, 모든 주 분출이 수중에 남아 있거나 수중에 있었던 분출구에서 발생한 것은 아니다.[9]:{{{1}}} 주로 육상 테프라 퇴적물에 대한 이전 연구에서는 보정되지 않은 부피 추정치 150 km3 (36 cu mi)[7](pp. 105 )가 나중에 170 km3 (41 cu mi)로 증가되었다.[13] 이들은 나중에 치밀암 등가 부피로 분석되어, 세 단계의 총 부피가 30–45 km3 (7.2–10.8 cu mi)로 추정되는 고야(다케시마) 화산쇄설류(K–Ky)는 DRE 부피 15–25 km3 (3.6–6.0 cu mi)가 할당되었다. 부피가 100 km3 (24 cu mi)인 키카이-아카호야 화산재(K–Ah)는 DRE 부피 50 km3 (12 cu mi)를 기록했다.[9]:224 수중 밀도류의 존재가 이해되기 전까지는 7.2의 VRE가 추정되었으며,[3] 총 DRE 부피는 70–80 km3 (17–19 cu mi)였다.[9]:{{{1}}} 분화 당시 해수면은 현재보다 낮았겠지만, 천 년 이내에 현재 수준에 도달했을 것이다.[9]:{{{1}}} 분화의 대부분을 공급한 마그마 방은 지표면 아래 3~7 km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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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측정
고고학적으로는 7,300 cal. BP 조몬 시대 초기 단계로 연대가 측정되었으나,[14]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으로는 6,500 BP로 최근에 보정되지 않은 연대가 측정되기도 했다.[15] 현재 인정되는 여러 출처의 보정된 연대 측정은 7165년에서 7303년 BP 사이다.[1][2][3]
영향
이 분화는 남부 규슈 초기 조몬 문화의 종말과 관련이 있지만, 그 영향은 뚜렷했지만 일부 논평에서 제시된 것만큼 크지는 않았다. 니시노조노 하위 유형 토기 전통은 분화 전후에도 규슈 전역에서 유지되었다.[16] 회복에는 거의 1,000년이 걸렸다.[17] 북부 규슈, 혼슈 및 홋카이도와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 살던 조몬인은 살아남았지만, 한동안 주로 해양 식량원에 의존해야 했다고 추정된다.[16]
남규슈의 초기 조몬 문화의 운명은 또 다른 대규모 화산 분화의 결과로 끝났을 수 있는 미노스 문명의 몰락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건은 기존 문화가 빠르게 그리고 완전히 사라지는 이야기가 담긴 문화적 전통에 더 많은 신빙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 두 몰락이 세계의 매우 다른 지역에서 (홀로세) 인류 역사에서 일어났지만, 둘 다 일부 연구에서 제시하는 것보다 점진적인 시간 척도를 가졌으므로 관련된 모든 메커니즘에 대한 대안적 제안이 가능하다.[18] 관련 문제들은 인간 문화 발전과 화산 위험에 대한 사회적 인식 모두에 대한 화산 활동의 영향에 대한 심층 연구로 이어졌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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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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