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코 낭사 분장. 가부키 등 창작에 대해 퍼진 전형적인 습격할 때의 옷차림이지만, 사실은 아니다.
이전에는 아코 뇌인(牢人)(낭인)으로 불리는 것이 많았지만, 메이지 중기부터 아코 의사(赤穂義士)라고 불려, 타다타카의 가르침의 관점에서 전쟁 전에는 전국적으로도 아코 의사의 명칭이 일반적이었다. 메이지 이후 미부 낭사의 영향으로 낭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전 후, 오사라기 지로의 소설이 텔레비전 드라마화 된 후, 아코 낭사(赤穂浪士)로 불리는 게 주가 되었다.
습격한 인물 숫자에서 따와 47사(四十七士)라고도 한다. 또 47명 중 아시가루테라사카 노부유키가 침입한 후, 코즈케노스케의 목을 센가쿠지에 있는 타쿠미노카미의 묘 앞에 운반하던 도중 사라졌고, 할복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명을 뺀 46사(四十六士)라고도 부른다. 테라사카의 실종이 도망인지, 아니면 어떤 이유로 동지들의 허락을 받고 떠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또한, 낭사 중 아코 (하리마국아코군) 출신자는 오오이시 요시오를 포함해 절반 정도이며, 그 다음으로 많은 것이 히타치국 마카베 (마카베군)와 카사마 (이바라키군) 출신자이다. 아사노가가 아코번으로 이봉된 것은 쇼호 2년 (1645년), 아사노 나가나오 (나가노리의 할아버지) 대이며, 나이가 많은 낭사는 구 영지 마카베번・카사마번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현재도 낭사 집안의 옛 집이 남아있고, 낭사의 유품도 많이 전해진다.
습격 참가자의 반 조금 넘는 24명이, 타쿠미노카미가 칼부림을 했을 때, 에도에 있던 낭사들이다. 번사의 대부분이 고향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비율은 두드러지게 높은 것이다. 본국 거주이지만 에도까지 타쿠미노카미의 뒤를 따라와 칼부림 사건을 우연히 본 사람도 12명이나 있다.
가신단의 정점에 있는 가로 4명과 반토 5명 가운데, 습격에 참가한 것은 쿠라노스케 뿐, 모노가시라(物頭)는 요시다 츄자에몬과 하라 소에몬뿐이며, 나머지는 요닌, 우마마와리, 코쇼 및 그 가족이 대부분이었다.
또 친족의 습격 참가가 많아, 단독으로 습격에 참가한 사람은 21명, 나머지 26명은 부모와 자식, 혹은 어떠한 친족 관계의 사람과 함께 습격하려고 참가했다.
습격 참가자의 대부분은 타쿠미노카미 개인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타쿠미노카미와 관계가 나빴던 사람도 있었다.
예외는 카타오카 겐고에몬과 이소가이 쥬로자에몬으로, 이들은 아사노 타쿠미노카미의 측근으로, 예전같으면 타쿠미노카미의 죽음과 함께 순사할 것 같은 관계였다.
한편, 타쿠미노카미와 관계가 나빴던 예로는 센바 사부로베에가 있었는데, 센바는 주군에게 자주 간언하여 눈총을 받았고, 폐문되었고, 칼부림 사건이 있던 겐로쿠 14년 3월에는 영영 오지 않으려고 하직 인사를 하려고 했을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습격에 참가했다.
후와 카즈에몬도 타쿠미노카미로부터 의심을 받아, 칼부림 사건 시에는 낭인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쿠라노스케에게 부탁해 습격에 참가했다.
탈락자의 경향
아코번사에 사분의 자녀와 은거자를 포함한 3백 수십명 중 1/3 이상이 신문을 제출했다. 그로부터 80명 가량이 탈맹하고, 습격에 참가한 것은 아시가루 신분의 테라사카를 제외하고 46명이었다. 신문 제출의 단계에서 우선 하급 무사가 거기로부터 침입이 가까워짐에 따라 비교적 높은 녹봉의 사람이 이탈했다. 이는 최초로 하급 무사가 없어진 것은 초닌이 되는 등, 생계를 유지할 길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그 후, 높은 녹봉의 사람이 이탈한 것은 아사노 다이가쿠의 처분이 결정되어 가문을 재건할 길이 막혔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탈자는 습격 참가자로부터 의절되거나, 연락이 끊기거나 하지만, 그것은 습격 참가자가 이탈자의 원조를 받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기도 하여, 습격 참가자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된 유족 중에는 경제적으로 곤궁을 겪는 예도 있었다.
우마마와리. 200석. 에치고국시바타번 출신. 옛 성씨 나카야마(中山). 아버지 대에서 시바타번에서 추방당하고 낭인이 되었다가, 타카다노바바 결투에서의 활약으로, 호리베 카나마루의 데릴사위가 되어 아코아사노가의 가신이 된다. 습격 급진파의 중심인물. 습격에서는 대태도를 들고 크게 분전했다고 전해진다. 향년 34세.
사세구 「梓弓ためしにも引け武士の道は迷はぬ跡と思はば」
吉田忠左衛門兼亮
요시다 츄자에몬 카네스케
아시가루가시라・군부교, 200석 역료 50석 (후다이). 낭사 중에 오오이시 쿠라노스케에 버금가는 인물로 이를 보좌했다. 향년 64세. 사세구 「かねてより君と母とにしらせんと人よりいそぐ死出の山道」.
우마마와리・사번, 200석 (2대). 향년 34년. 사세구 「先立し人もありけりけふの日をつひの旅路の思ひ出にして」.
不破数右衛門正種
후와 카즈에몬 마사타네
전 우마마와리・하마부교, 전 100석 (후다이). 낭인이 되어있었지만, 간청하여 의맹에 가담한다. 습격에서는 후문을 저택 밖에서 지키는 역할이었지만, 가만 있지 못하고 안으로 침입해, 두 사람을 베고 쓰러트리고, 키라 사베에에 덤볐다. 사베에는 도망쳐버렸지만, 다른 한사람과 칼을 맞받아 넘어뜨렸다. 너무 많이 베어서 칼이 찔림처럼 되어 칼이 없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습격했을 때 가장 눈부신 활약을 했다고 전해진다. 향년 34세.
岡野金右衛門包秀
오카노 킨에몬 카네히데
헤야즈미. 미남으로 츄신구라의 이야기에서는 목수의 딸을 통해 키라 저택의 도면을 손에 넣었다. 향년 24세
사세구 「その匂ひ雪のあさぢの野梅かな」.
小野寺十内秀和
오노데라 쥬나이 히데카즈
교토 루스이번, 150석 역료 70석 (후다이). 향년 61세. 사세구 「今ははや言の葉草もなかりけり何のためとて露結ぶらむ」.
小野寺幸右衛門秀富
오노데라 코우에몬 히데토미
헤야즈미. 오노데라 히데카즈의 양자. 향년 28세.
사세구 「今朝もはやいふ言の葉もなかりけりなにのためとて露むすぶらん」.
木村岡右衛門貞行
키무라 오카에몬 사다유키
우마마와리・회화부교, 150석 (후다이). 향년 46세. 사세구 「おもひきや我が武士の道ならで御法のゑんにあふとは」.
奥田孫太夫重盛
오쿠다 마고다유 시게모리
무구부교・에도 죠후, 150석 (신참). 습격 급진파의 중심 인물. 향년 57세.
奥田貞右衛門行高
오쿠다 사다에몬 유키타카
헤야즈미. 오쿠다 시게모리의 양자. 치카마츠 칸로쿠의 이복 동생. 향년 26세.
早水藤左衛門満尭
하야미 토자에몬 미츠타카
우마마와리, 150석 (2대). 칼부림 사건의 1보를 에도에서 아코로 전함. 향년 40세.
킨부교・젠반모토카타・요모노카타, 20석 5인부지. 오노데라 히데토미의 형. 키라 저택에 출입하는 다인들에게 접근하여 12월 14일에 키라 저택에서 다회가 있다는 것을 들었다. 해학을 잘하고 하이쿠인 타카라이 키카쿠와 교류가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송포의 북(松浦の太鼓)」의 외전이 만들어졌다. 향년 32세. 사세구 「梅で呑む茶屋もあるべし死出の山」.
矢頭右衛門七教兼
야토 (야코베) 에모시치 노리카네
헤야즈미 (후다이). 아버지 나가스케와 함께 의맹에 가담했지만, 습격 전에 아버지는 병사했다. 향년 18세.
조두 1천석. 개성공순파(開城恭順派)로 의맹에는 참가하지 않음. 습격 후, 형 마고자에몬과 동생 사몬 등 친족에게 불의를 당했고, 동생이 카이샤쿠역을 맡았고, 12월 28일에 할복했다.
테라이 겐케이
번 의사 3백석 5명부지. 마루야마 회의 이전부터 낭사들의 활동을 지지하고 있어, 습격에 참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겐케이는 무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쿠라노스케에게 거절당했다.
탈맹한 전 아코번사
타카타 군베에
에도즈메 2백석 15명부지.
습격에 참가한 호리베, 오쿠다와 같은 호리우치 도장의 동문이었기 때문인지, 에도급진파의 한명으로써 두사람과 같이 행동해, 키라를 토벌하도록 오오이시에게 강요했음에도 불구하고, 탈맹했다. 친가 쪽의 큰아버지가 타카타를 양자로 삼고싶다고 말한 것을 거절할 수 없어서, 중개를 맡은 타카타의 형이 원수에 대한 이야기를 큰아버지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타카타는 호리베와 상의하여 큰아버지를 납득시키기 위해 탈맹했다. 최초의 탈맹자가 되었다. 겐로쿠 14년 12월경의 일이다.
습격 후 센가쿠지로 향하는 아코 낭사들에게 달려갔지만, 호리베 이외의 전원으로부터 무시당했다. 그 후, 술을 가지고 아코 낭사들이 있는 센가쿠지에도 갔지만, 아코 낭사로부터 "밟아 죽이고싶다" 라고 매도받았다.
의맹에 참가하지만, 아버지가 다른 가문의 사관의 일자리를 찾아내 승낙을 받아버린다. 사이에 끼인 산페이는 겐로쿠 15년 1월 14일, 할복으로 자살한다.
『카나데본 츄신구라』의 히라노 칸페이 (早野勘平)의 모델
하시모토 헤이자에몬
우마마와리 1백석. 의맹에 참가하지만 오사카에서 시지미가와의 찻집 아와지야(淡路屋)의 유녀 "하츠"에게 빠져 둘이서 동반 자살하고 말았다.
두사람의 동반 자살은 겐로쿠 15년 7월 15일의 일이라고 하는데, 사사 코자에몬이 하야미 토자에몬에게 보낸 편지로는 11월의 일이라고한다.
오쿠노 쇼겐 사다요시
조두 1천석. 의맹에 참가하여 오오이시 요시오를 보좌하였으나, 원수를 갚기로 결정한 마루야마 회의 후 다시 한번 집안 재흥을 탄원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탈맹하였다. 탈맹은 오오이시가 키라를 베지 못하였을때를 대비한 2순위였다는 설도 있다.
신도 겐시로 토시모토
아시가루가시라 4백석. 오오이시 요시오의 친척으로 의맹에 참가하지만, 마루야마 회의 후에 탈맹. 오오이시는 재고를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오야마 겐고자에몬 요시모로
아시가루가시라 3백석. 오오이시 요시오의 친적으로 의맹에 참가하지만, 마루야마 회의 후에 탈맹. 오오이시는 재고를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또한 오야마와 야마시나 회의 때, 이미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지만, 동시에 뒤로는 호리베 등의 급진파에 동조하는 서한도 보내고 있었다. 따라서 호리베 급진파는 오야마를 믿고, 오오이시를 빼고 오야마를 급진파의 우두머리로 추켜세우려고 획책했지만, 야마시나 회의에서의 태도를 보고 호리베 등 급진파는 격노했다.
또한 오야마의 딸 유우는 47사 중 한명인 우시오다 마타노죠에게 시집갔으나, 겐고자에몬의 탈맹으로 인해 친정으로 돌려보내지고, 겐고자에몬도 마타노죠에게 의절당했다.
오오이시 마고시로 노부오키
오오이시의 친족. 마루야마 회의에는 출석했지만, 그대로 탈맹했다.
실제 기록인 『아코 의사 전일석화(赤穂義士伝一夕話)』에서는 습격과 노모를 돌보는 일 중 어느 쪽을 할지 동생인 오오이시 세자에몬과 제비뽑기를 했다고 되어있으나, 역사적 사실로는 그러한 일이 없고, 오오이시 마고시로는 탈맹으로 47사 중 한명인 동생 오오이시 세자에몬에게 의절당했다.
모치즈츠가시라. 아시가루가시라 4백석. 개성 즈음에 오오이시의 탄원서를 막부 메츠케에게 제출하려했지만 그르쳤다. 마루야마 회의 후에 탈맹.
타나카 사다시로
150석. 아사노 나가노리의 유해를 인수해 매장했다. 카타오카 타카후사와 행동을 함께하는 급진파. 습격을 앞두고 자취를 감췄다. 주색에 빠져 신세를 망쳤다고 한다. 병때문에 얼굴까지 변했다고 한다.
오야마다 쇼자에몬
에도즈메 1백석. 의맹에 가입하지만, 47사중 한명인 카타오카 겐고에몬에게 코소데와 금 3냥을 훔쳐 달아났다. 후카가와 회의가 있던 겐로쿠 15년 11월 2일의 일이었다. 술 때문에 돈이 궁했다고 한다. 쇼자에몬의 아버지 잇칸은 이 사실을 알고는 칼날로 앞가슴에서 등 뒤의 벽까지 꿰뚫을 정도로 센 힘으로 자살했다.
와타나베 한에몬
47사의 한명인 타케바야시 타다시치의 형. 당초 맹약에 참가하고 있었지만, 타케바야시로부터 자신을 대신에 부모를 돌봐달라고 설득당해 이탈했다.
나카무라 키요에몬
늙은 어머니를 두고 맹약에 참가했지만, (노모의 시중을 부탁한 인물로 생각됨) 타로자에몬이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반협박과 같은 형태로 습격을 단념하게 되었다.
세오 마고자에몬
오오이시 요시오의 가신. 야마시나에서 에도행이 중지되어 화를 내, 에도까지 따라왔다. 그리고 쿠라노스케의 동쪽으로 내려가는 것에 선행하여 시험역을 하거나 히라 미무라의 임시 숙소를 알선하거나 하는 활약이 있었지만, 자취를 감췄다.
탈맹한 날짜는 12월 6일로 알려져있지만, 『테라사카 사기(寺坂私記)』에 따르면 12일이며, 이것이 사실이라면 최후의 탈맹자로 알려진 모리 코헤이타보다도 나중에 탈맹한 것이 된다.
일설에서는 아코로 돌아와 삭발하고 큐신(休真)이라고 호를 붙였다고 한다.
야노 이스케
세오 마고자에몬과 함께 탈맹
모리 코헤이타
다이나토역 20석 5인부지. 의맥에 참가해, 새 다이묘의 하인으로 위장해 키라 저택에 잠입. 적의 동태를 보고하는 등 활약했지만, 침입 직전 탈맹, 최후의 탈맹자가 되었다.
동지들은 모리가 정말로 탈맹했는지 몰랐고, 습격 전날이 되어서도 오오이시는 모리를 동지의 한사람으로 세고 있었다고 한다.
키라 요시히사의 정실. 키라가가 본소에서 저택이 바뀐 것을 기회로 키라와 별거해 친정인 우에스기로 돌아간다.
키라 사베에 요시치카
고가하타모토. 키라 요시히사의 양자. 칼부림 사건 후 키라가의 당주가 된다. 습격 당시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다. 사건 후에 키라가의 영지가 몰수되어 신슈 타카시마에 유배되었다.
아코 낭사 습격 시, 언월도로 상대를 베었지만, 자신도 이마와 허리에서 등에 걸쳐 상처를 입어 기절했다. 그 후,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 코즈케노스케를 찾으러 침실로 향했지만, 찾지 못하고 낙담해 다시 또 기절하였다.
그런데도 사베에는 괘씸(不届き)하고 부모의 치욕은 자식으로써 둔갑하기 어렵게 있다(親の恥辱は子として遁れ難く)는 이유로 시나노타카시마번 번주 스와 아키노카미 타다토라에게 맡겨졌다. 그곳에서 죄인이라고 사카야키 깎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생활을 하다가, 호에이 3년, 20살 정도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대하내문서(大河内文書)』에는 아코 낭사의 키라 저택 침입때, 도망치려고 하는 것을 아코 낭사들에게 잡혀, 낭사들이 "코즈케노스케(요시히사)는 어딨나?"라고 물었는데, "신분이 미천한 자라서 모른다"라고 대답해도, 낭사들이 "신분이 미천한 자가 비단 옷을 입고 있을리가 없다"라고 말하고 그의 목을 쳤다고 한다.
한편, 아코 쪽의 오치아이 요자에몬 (요젠인 측 요닌)의 글이라고 하는 『강적견문기(江赤見聞記)』에는 「코바야시 헤이하치는 창을 들고 격렬하게 싸워, 코즈케노스케를 잘 지켰지만, 많은 아코 낭사와 싸워 결국 살해당했다.」라고 쓰여있다.
그러나 아사노의 불행을 기초로 하타모토가 된 형태이므로, 세상의 평판은 악화되었다. 그 때문인지 카지카와는 나중에 아사노의 억울함을 생각했어야했다고 후회한 취지를 적고 있지만, 그러한 논의는 「친구의 의(朋友への義)」에 지나지 않고, 「상(上)」에 대해서는 이러한 논의는 필요없다고 변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