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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즈키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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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즈키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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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즈키의 난(秋月の乱)은 1876년 10월 27일 후쿠오카현 아키즈키(현재의 아사쿠라시 아키즈키)에서 발발한 메이지 정부에 대한 사족 반란 중 하나이다.

간략 정보 아키즈키의 난, 날짜 ...

개요

1876년 10월 24일구마모토현에서 일어난 신푸렌의 난에 호응하여 이전 아키즈키번사족 미야자키 샤노스케, 이소 아츠시, 도하라 야스우라, 이소 헤하치, 도나미 한구로, 미야자키 테츠노스케, 토키 키요시, 마스다 시즈가타, 이마무라 햐쿠하치로 등 약 400명이 일으킨 반란이다.

신푸렌의 난 3일 후인 10월 27일, 이마무라를 대장으로 하는 ‘아키즈키 당’이 거병하자 우선 명원사에서 설득에 나섰던 후쿠오카 현 경찰 호나미 한타로를 살해(일본 최초의 경찰관의 순직)했다. 옛 아키즈키번의 사족은 미리 옛 도요쓰번 사족, 스기우 쥬로 등과 동시에 궐기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이후 도요쓰번으로 가서 10월 29일에 도착한다. 그러나 이 때 전 도요쓰 사족은 궐기하지 않을 방침을 굳히고, 스기우 등이 감금되어 담판을 벌이던 중 도요쓰 측의 연락을 받고 도착한 노기 마레스케가 이끄는 오구라 진대가 아키즈키 당을 공격했다. 아키즈키 측은 사망자 17명을 남기고 (정부군 사망자 2명) 에가와 마을 구리카와치(현 아사쿠라 시 구리카와치)로 퇴각했고, 10월 31일에 아키즈키 당은 해산했다. 이소, 미야자키, 토키 등 일곱 번사는 할복했다. 항전파 이마무라는 다른 26명과 함께 아키즈키로 돌아와 아키즈키 소학교에 설치되어 있던 아키즈키 당 토벌 본부를 습격하여 현 고위 관계자 2명을 살해하고, 반란에 가담한 사족을 억류하고 있던 주점 창고를 불태운 후, 갈라져서 도망을 하였으나, 11월 24일에 체포되었다. 또한 마스다는 거병 이전 10월 26일에 옛 사가번 사족의 동시 궐기를 모색하기 위해 사가로 향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체포되었다.

12월 3일 후쿠오카 임시 법원에서 관계자의 판결이 선고되어 주모자로 지목된 이마무라와 마스다는 당일 참수되었고, 약 150명에게 징역, 평민 강등 등의 징계가 내려졌다.

현재 아키즈키의 아키즈키 향토 자료관에 간부 친필 절명시 등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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