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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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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Appius Claudius Caecus, 활동 시기 312년경–279년)는 로마 공화정 시기의 정치인이자 저술가이다. 최초의 로마 대로인 아피아 가도와 로마 시내 최초의 수도교인 아쿠아 아피아 등 두 개 대형 건설 작업을 진두지휘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생애를 어느 정도 역사적으로 확실하게 추적할 수 있는 최초의 로마 공적 인물이다. 또한 그는 논란의 민중 지향성 개혁을 실시하였으며 게다가 법학 논문, 도덕 에세이 모음집, 그리고 여러 편의 시를 저술한 것으로 여겨지며 그를 로마의 초기 문필가로 평가받게 하고 있다.[3][4][5]
저명한 혈통의 파트리키 출신인 카이쿠스는 기원전 312년에 감찰관 지위로 승진하며 처음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5년간 수행했다. 카이쿠스가 공직을 맡는 동안, 건설 프로젝트를 제외하고 그는 몇 차례 논란의 대상이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헌정 개혁을 실시하였는데 그는 입법 기구에서 빈자들과 토지가 없는 이들의 투표권을 늘렸고, 하층 계급 시민들을 로마 원로원에 들였으나 이러한 조치들은 분개한 귀족 계층들에 의해 전면적으로 실시되지는 못했다. 이 이외에도, 카이쿠스는 원로원 의원의 공식적인 목록을 작성한 최초의 감찰관이었다. 이러한 개혁들은 과거에는 하위 정무관에 불과했던 감찰관의 권위를 대단히 키워냈다. 집정관 (기원전 296년) 그러고 나서 법무관 (기원전 295년)을 거친 뒤, 카이쿠스는 에트루리아인과 삼니움인 등을 상대로 군사 원정을 이끌었다. 이후 노년에 눈이 멀게 되고 나서 (장님을 뜻하는 별칭인 caecus가 이때부터 붙음) 그는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와의 평화 협정을 반대하는 연설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의 개혁은 어느 정도 반발을 불러일으켰는데, 그가 다수의 확립된 전통을 깨트렸기 때문이었다. 아피우스는 몇 차례 격렬한 정치적 다툼에 휘말렸으며, 특히나 파비우스 씨족 (로마의 강력한 가문)과 분쟁을 겪었다. 초기 로마의 역사가이자 파비우스 가문 출신 인물인 파비우스 픽토르는 카이쿠스를 겨냥한 상당한 비방의 근원지였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를 부패하고 부도덕한 선동가이 무능한 사령관이라 비판한 바 있다. 사료들 사이의 큰 차이 때문에, 현대 학자들은 카이쿠스의 행적에 대해 매우 다른 해석을 내놓았는데 그를 클레이스테네스와 페리클레스 같은 아테네 시대 인물과 견줄 수 있는 혁명적이고 사회의 반동자이자 독재자 또는 위대한 개혁가가 될 수 있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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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배경
본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7]라는 이름이었던 카이쿠스는 당대 가장 핵심적인 로마 가문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씨족 출신의 파트리키로 태어났으며, 클라우디우스 씨족 인물들은 공화정이 시작된 이래로 로마 정부의 고위 공직을 역임했었다. 클라우디우스 씨족은 로마의 사료에서 대단히 보수적인 관점을 가진 거만한 귀족 계층으로서 널리 묘사되며,[8] 이런 편견은 카이쿠스가 사망한 뒤에 오랜 기간에 만들어진 것이었다.[9] 카이쿠스의 아버지는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인레길렌시스(Gaius Claudius Inregillensis)라 불린 자로, 기원전 337년에 독재관으로 임명되었다가 아우구르들이 이 결정에 종교적 결점이 있는 점을 발견하고 나서 곧바로 사임한 것만이 알려져 있다.[10][11][12]
그의 어머니는 알려진 것이 없고, 카이쿠스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라고 하는 무척 나이가 어린 남동생이 있었는데 카이쿠스의 장자에 이어 기원전 264년부터 4년간 집정관을 맡았다. 카이쿠스의 아들들이 그가 죽고 나서 28년 이상을 집정관이 되었기에, 그는 최소한 두 차례 결혼을 했을 것으로 보이며 그럼에도 아내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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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생애
감찰관직 이전 카이쿠스의 초기 생애에 대해 알려진 유일한 정보는 로마의 포룸에 놓여 있던 그에 대한 송덕문이었다. 여기 그의 생애에 대한 요약문에서 그가 맡았던 모든 책무들을 열거하고 있고, 그 중에는 일부 하위 직위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한편으로 문헌 자료에서는 고위 직위 (감찰관, 집정관, 법무관 등)만을 기록하고 있는데, 시기를 나타내지 않아 이 직위들은 연대기순으로 나열된 것이 아니다.[14] 송덕문은 그가 세 차례 트리부누스 밀리툼, 한 차례 재무관, 두 차례 조영관을 맡았다고 전한다. 이 하위 정무관직은 기본적인 것들이고 모든 로마 정치인들의 경력에서 발견되자만, 그가 맡았던 횟수는 통상적인 것보다 훨씬 많다. Endre Ferenczy는 카이쿠스가 그의 가문이 쇠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찰관직 이전에 이러한 직위들을 맡았다고 여기며, 가문의 쇠타가 그로 하여금 대중적 지지를 쌓도록 반복적으로 업무를 맡게 했을 것이고 (특히나 조영관직이 그랬는데, 이 직위는 오락 경기를 관리했었다), 이런 점이 그의 초기 감찰관직을 설명해준다는 것이었다.[14] 그렇지만, 그의 이론은 비판을 받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스티븐 오클리는 당대 대부분의 직무들이 알려진 것이 없어서 트리부누스 밀리툼과 조영관 직위에 대한 반복이 정말로 당대 예외적이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충분한 자료가 없다는 점을 언급했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쿠스가 감찰관 전에 트리부누스 밀리툼이었다는 것은 확실한데, 집정관으로 선출되기 앞서 이 직위가 필요했고, 감찰관을 마치자마자 그는 집정관이 되었다.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 그는 당대 이탈리아 내 최대 분쟁이었던 제2차 삼니움 전쟁에 분명히 참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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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관 (기원전 312년–308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는 기원전 312년부터 기원전 308년까지 감찰관이었고, 그 이전에 집정관을 지낸 적은 없었으나 집정관 경력은 훗날 검열관직에 오르기 위한 전제 조건이 되었다.[16] 감찰관으로서 이 기간에 그는 해방노예의 자손들이 원로원에서 활동을 허용하고 토지가 없었던 교외 부족들의 사람들에게도 투표권을 확장시킴으로써 하층 계층으로부터 지지를 구하려 했었다. 제2차 삼니움 전쟁 시기 그는 삼니움족과 에트루리아인들에 맞서 요새 역할을 할 라티움과 캄파니아 지역 네 식민지 (콜로니아) 건립을 주장했었다.
아피우스는 감찰관으로서 두 차례 건설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가장 유명하며 바로 로마에서 남쪽 방향으로 베네벤툼까지 이어지는 최초의 로마 시대 주요 도로인 아피아 가도 (틀:Langx)와 로마 내 최초의 수도교인 아쿠아 아피아이었다.[17]
법률 기여
아피우스의 주요 법적 기여는 '레기스 악티오네스'(legis actiones, 법률 사무의 방식)의 출판에서 시작되었다. 이 출판물은 로마의 소송 절차에 대한 지침 역할을 했다. 또한 여기에는 법정 개정일 목록도 함께 실려 있었다.
후기 생애 (기원전 307년–280년)
이 시기에 그는 기원전 307년과 기원전 296년 등 두 차례 집정관을 맡았고, 그는 또한 기원전 285년에 독재관으로 임영되었다. 아피우스는 피로스의 특사이던 키네아스에 대해 이 시기 가장 유명한 연설을 하였으며, 로마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였다.[18] 이 연설은 "모든 사람들은 자기 삶의 설계자다"(라틴어: quisque faber suae fortunae)라고 하는 격언의 출처이며, 키케로 시대에도 여전히 알려져 있었고[19] 기원전 279년에, 아피우스는 리비우스에 따르면 저주로 인해 눈이 멀어 있었다.[출처 필요]
저술 활동
아피우스는 생애 동안 서적 몇 권을 저술했다. 그는 '센텐티아이'(Sententiae)라고 하는 책을 집필했으며, 그리스 시 형태를 기반으로 했고 '문학적 성격을 띤 최초의 로마 서적'이었다.[20] 아피우스는 또한 De Usurpationibus ('강탈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썼으며, 현재는 전해져 있지 않아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밖에도 아피우스는 아피우스는 오늘날까지 이름이 전해지는 가장 이른 시기의 로마 산문 및 운문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문학과 수사학에도 관심을 가졌고, 라틴 철자법에 개혁을 시행하여, 전해지기로는 문자 Z의 사용을 끝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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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
그의 네 아들들에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루수스 (기원전 268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기원전 249년 집정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켄토 (기원전 240년 집정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기원전 202년 집정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조부) 등이 있었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는 키케로의 '카일리우스 변호 연설'에서 클로디아의 엄격하고 못마땅한 조상으로 등장한다. 키케로는 가차없는 의인법 방식으로 키케로의 발언을 구사하는데, 여기서 카이쿠스는 상류층 파트리키 대신에 중간 계층의 기사 계급 출신 카일리우스와 엮이게 된 것에 대해 클로디아에게 분노한다. 아피아 가도 및 아쿠아 아피아 등 카이쿠스의 업적들은 클로디아의 행동을 통해 모독되어 언급된다.
아피우스 카이쿠스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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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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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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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정관 |
Ap. 크라수스 인레길렌시스 362년 독재관, 349년 집정관 | |||||||||||||||||||||||||||||||||||||||||||||||||||||||||||||||
C. 인레길렌시스 337년 독재관 | |||||||||||||||||||||||||||||||||||||||||||||||||||||||||||||||
Ap. 카이쿠스 312년 감찰관 307, 296년 집정관 285년 독재관 | Ap. 카우덱스 264년 집정관 | ||||||||||||||||||||||||||||||||||||||||||||||||||||||||||||||
Ap. 루수스 268년 집정관 | Ti. 네로 | P. 풀케르 249년 집정관 | C. 켄토 240년 집정관, 225년 감찰관 213년 독재관 | ||||||||||||||||||||||||||||||||||||||||||||||||||||||||||||
Ti. 네로 | P. 네로 | Ap. 풀케르 212년 집정관 | C. 켄토 200년 레가투스 | ||||||||||||||||||||||||||||||||||||||||||||||||||||||||||||
C. 네로 207년 집정관 204년 감찰관 | Ti. 네로 202년 집정관 | Ap. 네로 195년 법무관 | Ap. 풀케르 185년 집정관 | P. 풀케르 184년 집정관 | C. 풀케르 177년 집정관 169년 감찰관 | Ap. 켄토 175년 법무관 | C. 켄토 155년 레가투스 | ||||||||||||||||||||||||||||||||||||||||||||||||||||||||
각주
참고 문헌
추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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