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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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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환(安淳煥, 1871년 2월 8일~1942년 10월 1일)은 대한제국 말기 궁내부 전선사 장선·주선과장을 지낸 관료이자, 명월관을 설립하고 인사동 태화관을 운영한 외식업 경영인이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을 낭독했을 당시 건물의 주인이자 운영자로서 장소를 제공했고, 통고 절차를 수행했다.[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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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안순환은 경상북도 영주군 순흥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순흥, 호는 죽농이다.[1] 어려서 서당에서 유학을 배웠고 가세가 기울어 관립 영어학교와 무관학교에 진학했으나 생활고로 중퇴했다.[1] 1898~1899년경 대한제국 탁지부 전환국의 건축 감독과 기수로 궁정 업무에 참여했고, 1909년 1월 21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궁내부 전선사 장선을 맡았다.[1][4] 1932년에 이름을 안교환(安敎煥)으로 개명했고, 1942년 10월 1일 일월시보사 사장 재임 중 사망하였다.[1]

경력

  • 1898~1899년: 탁지부 전환국 건축 감독·기수(技手).[1]
  • 1909년 1월 21일~1910년 8월 29일: 궁내부 전선사 장선(掌膳)·주선과장.[4]
  • 1903년 9월 17일: 명월관 개점(학계 일치되지 않음, 아래 참조).[5]
  • 1918년: 명월관 본점 화재 소실.[6]
  • 1918~1919년: 인사동 태화관(명월관 분점 격) 개설·운영.[2]
  •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독립선언 장소 제공 및 총독부 통고 수행.[3]
  • 1920년대 초: 명동에 조선요리옥 식도원 설립·운영.[1]
  • 1930년: 시흥 송록동에 녹동서원 창건, 구로 일대에 단군묘 조성.[1]
  • 1930년대: 조선유교회 창립·명교학원 운영(전국 유생 무료 교육).[1]
  • 1939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 선임.[1]

명월관

명월관은 대한제국기 궁중 연향과 어선을 담당하던 안순환이 설립한 조선요리옥(한정식 계열의 근대적 요릿집)이다.[2] 개점 연도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백과는 1909년 개점을 서술하지만,[1] 주영하의 2011년 연구는 당시 신문·잡지를 검토해 1903년 9월 17일 문을 연 것으로 비정한다.[5] 1918년 본점이 화재로 전소된 뒤 분점 격의 태화관을 마련하였다.[6][2]

명월관은 교자상(交子床)을 소규모 테이블 코스로 개량해 4인상 한정식 형태를 정착시켰다는 평가가 있다.[7][8]

태화관과 3·1 운동

1918년 명월관 소실 이후 안순환은 순화궁(현 서울 종로구 인사동 194) 일대에 태화관을 열었다.[2] 1919년 3월 1일 정오 무렵 민족대표 29인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준비했고, 최린의 지시에 따라 안순환은 조선총독부에 선언 사실을 통고했다. 곧 일본 경찰이 건물을 포위하는 가운데 한용운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한 뒤 일행은 연행되었다.[3] (현지 설명 자료의 영문판도 태화관이 명월관 분점이었음을 병기한다.)[9]

식도원

1920년대 초 명동에 조선요리옥 식도원을 열어 문인과 언론인, 서화계 인사의 집회 공간으로 기능하게 하였다.[1]

종교·사회 활동

1930년 경기도 시흥 송록동에 안향을 모신 녹동서원을 창건하고, 구로 일대에 단군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조선유교회를 창립하고 명교학원을 운영해 전국에서 선발한 유생에게 무료 교육을 제공했다.[1] 관련 기념 표석과 지역 자료에서도 당시 사업의 실체가 확인된다.[10]

예술 활동

안순환은 서화를 수집·거래했을 뿐 아니라 묵죽·묵란에 능하여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경력이 있는 것으로 기록된다.[7] 일부 서화경매 기록은 그의 서화 활동과 장례, 묘소 위치를 전한다.[11]

평가

근대 외식산업에서 명월관·태화관·식도원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경영은 조선요리옥의 표준화와 공적 사교 공간의 형성에 기여한 것으로 연구된다.[5] 한정식의 형식화 과정에서도 명월관의 교자상 개량이 뿌리로 지목된다.[8]

논란

안순환은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가 유림을 동원해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의 평의원에 선임되었다.[1] 이로 인해 일제 협력 인물로 분류되어 관련 연구·사전류에 수록되었다.[12]

개인사

그는 1932년에 안교환(安敎煥)으로 개명하였다.[1] 1942년 10월 1일 사망했으며, 시흥 송록동 일대에 묘소가 조성되었다.[1][11]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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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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