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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냐초 로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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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디 베네데토 아퀼로 델리 아퀼리(이탈리아어: Antonio di Benedetto Aquilo degli Aquili, 1430년경~1508년 4월 17일)은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화가로, 안토냐초 로마노(이탈리아어: Antoniazzo Romano)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5세기 후반 로마 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오래된 이미지를 다시 채색하거나 해석하여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새로운 신앙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특화되어 있었으며,[1] 특히 그 시대에는 드물었던 금박 배경 양식을 자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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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관점

안토냐초는 로마의 콜론나 구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역시 화가였다. 젊은 시절 그는 거리에서 싸움을 벌여 벌금을 물기도 했다.[2]
그는 처음에는 베노초 고촐리와 프라 안젤리코의 장식적인 화풍, 그리고 라치오 지역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첫 작품은 1461년에 제작한 것으로, 페사로의 영주 알레산드로 스포르차를 위해 로마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 있던 기적의 성 루카 성모자상을 모사한 작품(현재는 전해지지 않음)이다.[3]
1464년부터 그는 교황청을 위해 일했으며, 처음에는 리에티에서 성모자와 성인들을 그린 삼면 제단화를 제작하였다. 그는 교황 바오로 2세의 즉위식을 위해 현수막과 장식을 제작하는 화가들 중 한 명으로 고용되었다.[4] 1467년에는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멀지 않은 산티 아포스톨리 성당에 있는 베사리온 추기경의 장례 예배당 장식을 완성하였다. 장식의 중심에는 성모 이콘이 있었는데, 현재는 성 안토니오 예배당에 있으며 로마의 그리스인 성당인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에 있던 비잔틴 이콘을 모사한 것이다. 산티 아포스톨리의 이 이콘은 안토냐초가 비잔틴 도상을 본떠 제작한 많은 성모상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예에 속한다. 그는 실제로 아이콘을 모사하는 화가로 큰 인기를 얻었다. 이후 그는 로마 토르 데 스페키 수도원의 프란체스카 로마나 성녀의 일대기를 그린 프레스코화 연작과 베네치아 궁전의 공용 공간 장식 작업에 참여했다. 조르조 바사리는 당시 안토냐초를 로마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으로 꼽았다.[5]
1470년대에 안토냐초는 페루지노, 멜로초 다 포를리, 기를란다요와 같은 화가들과 함께 바티칸 궁전의 장식 작업에 참여하였다.[6] 이들의 영향을 받아 그의 인물 표현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의복에는 장식적인 무늬가 더해졌으나, 여전히 중세적인 요소들을 유지하고 있었다.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서는 《수태고지》(1500)를 그렸다. 이 그림에는 도미니코회 추기경 후안 데 토르케마다(1468년 사망)가 등장하여, 수태고지 길드에서 마련한 지참금을 받는 가난한 소녀들을 성모 마리아께 봉헌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토르케마다 추기경은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이 길드를 창설한 인물이었다.[7]
1475년에서 1480년 사이에, 교황 식스토 4세가 성모 신심을 장려한 덕분에 안토냐초는 제단화와 성모상을 그린 패널화 제작을 늘렸다. 약 1480년경 그는 티볼리에 있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의 클레멘테 브리가테 콜로나 경당을 위해 단일 패널 제단화를 그렸다.[8]
그의 후기 작품에서는 점점 매너리즘적 특징이 두드러졌고, 이는 후대 여러 화가들에 의해 모방되었다. 이 화가들의 작품은 종종 안토냐초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그는 1478년 로마 화가와 채색가들의 길드인 산 루카 아카데미아의 세 명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서 정관에 서명하였다. 그의 마지막으로 알려진 작품은 1497년의 것이다. 그는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에 있는 가족 예배당에 묻혔다.[9]

미국 텍사스주의 휴스턴 미술관에 소장 중인 안토냐초의 작품 《성모자와 시주자》의 일부는 1991년 미국 우정국의 크리스마스 기념 우표 도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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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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