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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카와 겐지로
일본의 물리학자 (1854~1931)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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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카와 겐지로(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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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유년기

1854년 에도 막부 무쓰국에 속한 아이즈번의 번사 야마카와 시게카타(山川 重固)의 3남으로 태어났다.
1868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고 그가 살던 고향도 아이즈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으나 전쟁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고 병역을 면제받아 전쟁에 참전하는 대신 프랑스어를 공부하게 된다. 이후 그는 영어와 수학을 비롯한 서구 학문을 배우게 된다.[3]
미국 유학
1870년 일본 정부는 홋카이도 개척을 위해 서구 학문을 배운 인재를 필요로 했고 이때 추운 도호쿠 지방 출신이였던 야마카와는 홋카이도의 추위를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되어 미국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된다. 이후 1871년 홋카이도 개척사 차관이던 구로다 기요타카는 야마카와를 포함한 7명의 유학생들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4]
동년 미국에 도착한 야마카와는 현 예일 대학교 공학부의 전신인 셰필드 과학 학교(Sheffield Scientific School)에 입학하여 물리학과 토목공학을 배우고 1875년 일본으로 귀국한다.[2][3]
일본 귀국 이후
그가 일본으로 귀국했을 당시에는 외국에서 초빙한 교수진들이 일본인들로 대체되고 있는 추세였고, 이러한 흐름에 따라 야마카와는 1876년 도쿄 대학 이학부 조교수로 취임했고 이후 1879년 정교수로 승진한다.[3]
말년

말년의 야마카와는 과학 연구보다는 교육에 전념하였다. 1903년 그는 도쿄 제국대학의 총장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1913년 규슈 제국대학 총장으로 임명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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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에도 시대 일본은 인공섬 데지마에서 네덜란드와의 제한적 교역을 통하여 서구 학문을 들여와 "난학"이라는 학문을 발전시켜왔다. 난학은 네덜란드 교역의 산물이였기에 일본어 번역은 네덜란드어 번역으로 통일되었다.[6]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다양한 국가들과 교류를 하며 번역의 대상이 되는 외국어 또한 영어나 프랑스어 등 다양해졌고 이러한 외국어 단어의 번역들이 통일이나 표준화 없이 난립하게 되었다. 이는 여러 혼란을 야기했으며 일본에 물리학을 이식하는 데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6]
또한 야마카와가 일본으로 귀국했을 당시에는 서구 학문을 외국어로 가르치는 고용 외국인 교수진들이 본국으로 귀국하고 일본 본토의 일본인 교수들로 대체되는 추세였기에 외국어로 이루어진 물리학 용어의 일본어 번역이 더욱 필요한 실정이였다.[7]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1883년 야마카와와 다나카다테 아이키쓰를 비롯한 도쿄 대학 1기 졸업생들은 "물리학 역어회"(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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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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