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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수
조선의 무신 (1546–1608)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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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수(權應銖, 1546년~1608년)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여러 전투에 참여해 큰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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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전력
본관은 안동, 자는 중평(仲平), 호는 백운재(白雲齋), 시호는 충의(忠毅)로 경상북도 영천 출신이다.
1583년 별시 무과에 병과(丙科) 105위, 전체 122위로 급제해[1] 훈련원부봉사로 임명되어 북변 수비에 종사했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로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박홍의 휘하에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의병을 일으켜 영천성을 탈환하여 병마우후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8월 당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박진의 휘하로 경주성(1차 전투) 탈환에 가담하였으나 박진의 삽질로 패배했다.
이후에도 문경의 당교 전투, 울산 1차 2차 전투와 밀양성 전투, 황룡사전투, 달성전투 등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전공을 세워 경상도병마절도사 겸 방어사로 특전하여 1594년 충청도방어사를 겸직했고 1597년 정유재란 당시에는 경주를 방어하였다. 전쟁 종결 후 1599년에 밀양 부사가 되었고 1604년에는 선무 공신 2등으로 화산군에 봉해졌고 오위도총관까지 겸하였다. 1606년 경상도 방어사, 1608년 남영장도 겸하였다.
특히 영천성 탈환전투는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성곽을 공격해 승리한 육상 전투로 일부 임진왜란 연구자들은 이 전투를 ‘임진왜란 지상전 최초의 승리’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권응수 장군을 포함한 영천복성 공신들은 업적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선무공신녹권(宣武功臣錄券)’, ‘권응수 장군 영정’, ‘태평회맹도병풍(太平會盟圖屛風)’, 장검, 유지(有旨) 및 장군간찰(將軍簡札), 교지(敎旨), 유서(諭書) 등 권응수 장군의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물은 지난 1980년 8월 23일 보물 제668호로 지정돼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1608년(선조 41) 7월 13일 한성부에서 별세하였으며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고 신녕의 경덕사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백운재실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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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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