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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군 (강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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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기원전 121년, 구 회남나라·강도나라의 관할을 받던 행정구역이 재편되면서 형산군과 구강군의 일부 영역을 떼어내 신설했다. 이름은 이전에 양쯔 강 이남에 존재한, 여강수를 끼고 있는 여강군에서 비롯했다(여강수는 구 여강군의 폐지 이후 단양군의 영역에 있었다). 양주자사부에 속했다.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12만 4383호, 45만 7333명이 있었다. 누선관(樓船官)이 있었다. 아래의 속현 목록은 한서 지리지를 따른 것으로 원연 · 수화 지간(기원전 8년)의 현황으로 여겨지며, 일반적으로 첫 현이 군의 치소이다. 대략 현대의 안칭시와 루안시 남부 지역에 해당한다.
신나라
다음 현의 이름을 고쳤다.
후한
현한·후한 초, 이 군의 서현을 중심으로 신나라 출신의 이헌이 회남나라를 세웠으나 30년 후한 광무제에게 멸망했다.
37년(후한 광무제 건무 13년) 육안국이 통폐합되면서 군역이 확장되었다. 14성 101,392호 404,683명을 거느렸다.[3] 후한말 태수 육강이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원술이 보낸 손책에 의해 함락되었다.
삼국
214년(후한 헌제 건안 19년), 환현, 임호현, 양안현의 3개현은 손권이 점령, 그 자리에 서릉군을 신설하면서 오나라에 편입되었고 나머지는 위나라에 여강군 그대로 편입되었다. 한편 220년 안풍군이 분리되었다.
진
오나라를 무너뜨리고 삼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오나라의 서릉군, 기춘군 심양현을 여강군에 통폐합시켰다. 본래 10현 4,200호를 거느렸다. 304년(서진 혜제 영흥 원년), 심양현과 무창군 시상현이 심양군으로 분리되었다. 영가의 난이 발발한 310년(서진 회제 영가 4년) 대부분의 현이 폐지되었다.[4]이후 회남지방에 예주가 교치되면서 예주로 소속이 바뀌었으나 회남군처럼 군이 교치되는 것은 면했다. 동진 안제시기 군의 남부지역, 지금의 안칭시일대가 진희군으로 분리되었다.[5]
유송
3현 1,909호 11,997명을 거느렸다.[5]
수
개황초기, 군현제가 폐지되고 주현제가 실시되면서 여강군또한 폐지되었다. 폐지된 여강군 자리에는 여주(廬州)가 설치되었다가 수양제시기 여강군으로 바뀌었다. 7현 41,632호를 거느렸다.[6]
당
620년(당 고조 무덕 3년), 주현제가 실시되면서 여주가 다시 설치되었고 여주는 합비현, 신현, 여강현의 3개현만을 차지했다. 624년(당 고조 무덕 7년), 소주(巢州)가 폐지되면서 소현(巢縣)이 본주로 내속되었다. 742년(당 현종 천보 원년), 군현제가 재실시되면서 여주가 여강군으로 바뀌었다. 758년(당 숙종 건원 원년), 주현제가 다시 실시되면서 여주로 바뀌었다. 본래 중급주였지만 상급주로 격상되었다. 본래 5현 43,323호 205,396명을 거느렸다.[7]
장관
여강연솔
- 이헌 (? ~ 23년)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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