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질문
타임라인
채팅
관점
예리코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Remove ads

예리코(영어: Jericho, 아랍어: أريحا (/ʔaˈriːħaː/, 아리하)[*])는 요르단강 서안에 있는 BC 9600년경[3][4]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속하며 예리코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Remove ads
세부 사항
요약
관점
지역
성경 속 이름은 예리고(여리고)이며 현지 아랍인들은 아리하라고 부른다. 예루살렘 북동쪽 36km, 요르단강과 사해가 합류하는 북서쪽 15km 지점에 있으며 지중해 해면보다 250m나 낮다. 즉, 예루살렘은 해발 750m에 있고 여리고는 바다면보다 250m 낮은 지점에 위치해 있어 두 곳의 고저차는 1,000m나 된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출발해 여리고에 이르는 길은 내려만 가는 비탈길이다. 각종 과실수(특히 종려나무)가 우거진 오아시스로, 예로부터 종려나무 성이라 불러왔다. 본래 요르단 영토인 예리코는 1967년 6일 전쟁 때 이스라엘군이 점령한 후 줄곧 이스라엘이 장악하고 있다.
실제 역사와 성경 기록

중기 청동기 시대의 예리코는 기원전 1500년경 즘에 지진 또는 이집트의 군사적 원정[5]이나 이집트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이주한 힉소스인들에 의해 파괴되었을 것[6][7]으로 추정된다. 탄소 연대 측정 결과는 기원전 16세기를 파괴 시기로 제시하지만,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해당 파괴가 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 아흐모세 1세(기원전 16세기) 또는 예리코 북서쪽의 묘지에서 스카라베가 발견된 투트모세 3세(기원전 15세기)의 군사 원정으로 인함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8] 참고로, 예리코의 북서쪽 묘지에서는 하트셉수트, 투트모세 3세, 아멘호테프 3세[9]의 스카라베가 발견되었다.[10]
2020년 로렌조 나이그로 박사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예리코는 이러한 파괴 이후에도 재점유되었다고 한다. 나이그로 박사에 따르면, 텔(tell)의 여러 부분에서 후기 청동기 시대 II 층(기원전 1400-1200년)을 발견했지만, 철기 시대(기원전 1200-586년)의 평탄화 작업으로 인해 최상층이 많이 절단되었다고 한다. 나이그로 박사는 이가 예리코의 이 시기의 유적과 흔적의 희소성을 설명한다고 한다.[11]
구약성경에 의하면 BC 15-14세기 또는 13세기경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예리코성이 함락되었다(여호수아 6장)고 한다.
예리코는 기원전 26-25세기에도 파괴를 경험했으며, 이를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과 연관시키는 학자들도 존재한다. 이들은 수정연대기[12]를 사용하여 고왕국 시대를 기원전 15세기까지 낮추거나 출애굽부터 성전의 건립일까지의 기간이 480년이 아니라 1480년[13]이나 그 이상으로 보아 출애굽을 기원전 26-25세기 무렵, 즉, 고왕국 시대의 사건으로 보고 있으며,[14] 해당 설에서는 예리코와 아이(Et Tell)가 기원전 26-25세기에 파괴를 경험했다는 것,[15][16] 하솔이 기원전 2500년 무렵부터 기원전 2300-2200년까지 버려져 있었다는 것,[17] 그리고 MacGregor plaque, 제1왕조의 파라오 카아의 Abydos ivory tablet를 통해 고왕국 시대 이전부터 셈족 유목민들이 이집트로 노예나 포로로 끌려왔었다는 것 등이 근거로써 작용한다. 베냐민 부족(Binu-Jamina)이 이집트 제11-12왕조 시절인 고바빌로니아 왕국 시절(기원전 2000-1595년) 초기의 기록에서 메소포타미아를 위협하는 강렵한 유목민 부족으로 등장하고 심지어 우루크의 왕인 신카시드 왕(기원전 1801년 ~ 기원전 1771년)이 해당 부족 출신으로 기록된다는 것[18]은 적어도 출애굽이 기원전 2000년대 무렵보다는 이전에 발생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들은 요셉은 제3왕조의 파라오 조세르의 재상이자 최초의 피라미드를 세운 임호텝과 동일시한다. 참고로, 아랍 전통에서는 출애굽 당시 바로의 신하의 이름을 하만으로 언급하며, 그는 주로 기원전 26세기의 파라오인 제4왕조의 쿠푸의 신하이자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세운 건축가 헤몬/헤미우누(Hemon/Hemiunu)로 식별되곤 하는데, 이를 바탕으로 보면, 출애굽은 쿠푸의 치세 동안 발생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19] 또한, 제3왕조와 제4왕조 모두 아직 이집트에 전차나 말이 없었던 시절이지만, 성서 속 전차, 병서, 말 등에 대한 언급은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의 성서 명화에서 성서 속 인물들이 유럽인의 복장이나 아랍인의 복장 등 당시의 복장과 물건들과 함께 등장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로 볼 수 있다. 구전되던 전승이 사본에 적히게 되거나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사본이 새로운 사본으로 옮겨지던 과정에서 시대에 맞춰 독자들과 청자들을 위해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약시대의 예리코는 구약시대의 예리코보다 남쪽 6km쯤에 있는 툴룰·아브엘 알라이크라고 부르는 폐허이다. 이 곳은 헤로데 대왕의 겨울궁전이 있던 곳이며, 세리장 자캐오의 회심과 구원(루가 19장)이 이루어진 곳이라고 한다.
Remove ads
유적
현재의 예리코는 비잔틴 시대의 터 위에 재건되었으며, 옛 예리코는 텔 에스술탄으로 20세기 초에 발굴되었다고 한다.
생활 방식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에 의해 BC 9000년경으로 측정된 먼 옛날에 중석기의 수렵민들이 찾아왔으며, 그들의 후손이 오랜 기간에 걸쳐 정착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BC 8000년경에는 주민들이 마을 주위에 거대한 돌로 벽을 두르거나, 적어도 어느 한 곳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거대한 돌탑을 세울 수 있을 정도의 조직된 공동체로 발전해 있었다.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던 마을은 도시라는 용어에 걸맞게 규모가 컸으며, 주민은 약 2,000~3,000명에 이른 듯하다. 이 1,000년 동안에 생활방식은 수렵생활에서 완전한 정착생활로 발전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로 농업이 발달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으며, 재배종의 밀과 보리의 낱알들이 발견됨으로써 농업 발달의 증거를 제공하는 장소의 하나가 되었다. 충분한 경작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반드시 관개시설을 고안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팔레스타인 최초의 신석기 문화는 순전히 독자적으로 발전한 토착 문화였다고 한다.
엘리사의 샘
수량이 풍부한 샘이이며, 물이 귀한 이스라엘에서 큰 샘 중의 하나다. 분당 4,000l 이상의 물이 솟아나는 샘이다. 구약시대 예언자였던 엘리사가 이 샘의 수질을 좋게 변화시켰다는 전승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Remove ads
기후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Wikiwand - on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
Remove a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