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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오티스 하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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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오티스 하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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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오티스 하워드(Oliver Otis Howard, 1830년 11월 8일 ~ 1909년 10월 26일)는 미국 육군 장교이자 남북 전쟁에서 북군장군이었다. 포토맥 군의 여단장으로서 하워드는 1862년 6월 페어 오크스/세븐 파인스 전투에서 아메리카 연합국 군대에 맞서 병사들을 이끌다가 오른팔을 잃었으며, 이 행동으로 인해 나중에 명예훈장을 받았다. 군단장으로서 그는 챈슬러즈빌 전투에서 큰 패배를 겪었고, 1863년 5월과 7월 게티즈버그 전투에서의 그의 행동은 의문의 여지가 있었다.[1] 그러나 그는 성공적인 군단 및 나중에는 군대 지휘관으로서 경력의 좌절을 극복하고, 1864년 7월 27일부터 1865년 5월 19일까지 테네시강군을 지휘하며 에즈라 교회 전투, 존즈버러 전투, 셔먼의 대행진, 서부 전역캐롤라이나 전역에서 군대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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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깊은 복음주의적 신앙에 기반하여 정책 결정을 내리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기독교 장군'"으로 알려졌던[2] 그는 1865년 중반 해방노예국의 책임을 맡아 재건 시대의 두 번째 단계 동안 전 노예들을 남부 사회와 정치에 통합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하워드는 노동 정책을 담당하여, 해방된 사람들이 해방노예국이 백인 지주들과 협상한 조건에 따라 해방노예국이 정한 임금으로 전 농장 토지에서 일하도록 요구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하워드의 해방노예국은 주로 해방 노예들의 법적 문제에 책임이 있었다. 그는 해방된 흑인들을 적대적인 환경으로부터 보호하려고 노력했지만, 적절한 권한이 부족했고, 앤드루 존슨 대통령에게 거듭 좌절했다.

하워드의 동맹인 공화당 급진파는 1866년 선거에서 의회의 통제권을 얻었고 급진적 재건을 강요하여 해방 노예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해방노예국의 도움과 조언으로 해방 노예들은 공화당 연합에 가입하여 대부분의 남부 주에서 투표에서 승리했다. 하워드는 또한 해방 노예를 위한 고등 교육을 장려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워싱턴 D.C.하워드 대학교를 설립하고 1867년부터 1873년까지 총장을 역임한 것이며, 1867년에 하워드 대학교와 애틀랜타 대학교(현재 클라크 애틀랜타 대학교)의 설립을 도왔다.

1874년 이후 하워드는 미국 서부에서 군대를 지휘하며 네즈 퍼스 부족의 조셉 추장이 이끄는 유명한 전역을 수행했다. Utley(1987)는 그가 1872년 아파치족, 1877년 네즈 퍼스, 1878년 배넉족파이우테족, 1879년 시피터족에 대항한 그의 지도력이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넬슨 마일즈만큼 많이 싸우지는 않았지만 긴 기록을 더한다고 결론지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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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년

올리버 하워드는 리즈 (메인주)에서 롤랜드 베일리 하워드와 엘리자 오티스 하워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로저스 스틴치필드와 증조부의 형제 토마스 스틴치필드는 리즈를 설립했다. 농부였던 롤랜드는 올리버가 9살 때 사망했다.[4] 올리버는 몬머스 아카데미에서 공부했고,[5] 켄츠 힐 고등학교[6]를 거쳐 1850년 19세의 나이로 보딘 칼리지를 졸업했다. 그 후 그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854년에 졸업했는데, 46명의 사관생도 중 4등으로 졸업하여 병참 소위명예진급했다. 그는 트로이 (뉴욕주) 근처의 워터블리트 병기창에서 근무했으며, 오거스타 (메인주)케네벡 병기창의 임시 지휘관이었다. 1855년 그는 엘리자베스 앤 와이트와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다. 1857년 그는 세미놀 전쟁을 위해 플로리다로 전출되었다. 플로리다에서 그는 복음주의적 기독교로 개종했고 목사가 되기 위해 육군을 그만둘 것을 고려했다. 그의 종교적 성향은 나중에 그에게 "기독교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게 했다. 하워드는 1857년 7월 중위로 진급했고, 다음 9월에 웨스트포인트로 돌아와 수학 강사가 되었다. 섬터 요새 전투로 남북 전쟁이 시작되면서 성직에 대한 생각은 접어두고 조국을 위해 봉사하기로 결심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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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전쟁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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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1864년 사이의 소장 올리버 오티스 하워드

하워드는 제3 메인 보병연대의 대령으로 임명되었고[8] 제1차 불런 전투에서 임시로 여단을 지휘했다. 그는 1861년 9월 3일자로 준장으로 진급했고 그의 여단의 영구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그 후 그는 조지 B. 매클렐런 포토맥 군에 합류하여 반도 전역에 참여했다.

1862년 6월 1일, 페어 오크스에서 연방군 여단을 지휘하던 중 하워드는 오른팔에 두 번 부상을 입었고, 그 후 절단되었다. (그는 페어 오크스에서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1893년에 명예훈장을 받았다.) 왼팔을 잃은 필립 커니 준장은 하워드를 방문하여 함께 장갑을 사러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농담했다. 하워드는 앤티텀 전투에 참전할 만큼 빨리 회복되었고, 그 전투에서 제2군단의 사단 지휘관으로 승진했다. 그는 1862년 11월에 소장으로 진급했고 다음 4월에 프란츠 시겔 소장을 대신하여 제11군단의 지휘권을 맡았다. 군단은 주로 독일 이민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새로운 지도자에 대해 불만을 품고 시겔의 복직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챈슬러즈빌에서의 실패

챈슬러즈빌 전투에서 하워드는 두 차례의 심각한 군사적 좌절 중 첫 번째를 겪었다. 1863년 5월 2일, 그의 군단은 챈슬러즈빌의 교차로 북서쪽에 있는 연방군 전선의 우익에 있었다. 로버트 E. 리토마스 J. "스톤월" 잭슨 잭슨 중장은 잭슨의 전체 군단이 비밀리에 연방군 측면을 우회하여 공격할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당시 포토맥 군을 지휘하던 조셉 후커 소장은 하워드에게 그의 측면이 강과 같은 자연적인 장애물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공중에 떠 있다"고 경고했으며, 남군 병력이 그의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워드는 경고를 무시했고 잭슨은 해가 지기 전에 공격하여 제11군단을 격파하고 연방군의 계획에 심각한 혼란을 초래했다.

게티즈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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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즈버그에 있는 하워드 기념비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여전히 5월의 굴욕으로 훈계받은 제11군단은 1863년 7월 1일 오후에 전장에 도착했다. 하워드의 하급 사단장 중 한 명인 프랜시스 C. 발로우 준장이 방어선을 잘못 배치하여 리처드 유얼 중장의 남군 군단이 이를 활용했고, 다시 한번 제11군단은 붕괴되어 게티즈버그 거리를 통해 후퇴해야 했고, 많은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다. 도시 남쪽의 묘지 언덕에서 하워드는 윈필드 스콧 핸콕 소장과 누가 방어 지휘를 맡아야 하는지에 대해 다투었다. 핸콕은 조지 G. 미드 소장의 서면 명령을 받고 지휘를 맡기 위해 왔지만, 하워드는 자신이 현재 최고 계급의 장군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양보했다. 논란은 세 가지 점에 집중된다. 1) 하워드가 묘지 언덕을 방어의 핵심으로 선택한 것; 2) 하워드가 도시 북쪽과 서쪽의 위치를 포기하라는 오후 중반 명령의 타이밍; 그리고 3) 하워드가 자신보다 하급인 핸콕이 자신을 대체했음을 인정하기를 꺼린 것. 역사가 존 A. 카펜터는 하워드만이 현명하게 묘지 언덕을 선택했으며, 철수 명령은 아마도 타당했을 것이고, 하워드와 핸콕 사이의 갈등은 미드 자신이 현장에 있었다면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9]

하워드는 자신의 군단의 실패가 실제로는 서쪽의 애브너 더블데이 소장의 제1군단의 붕괴로 인해 발생했으며, 이것이 더블데이가 군단 지휘에서 해임된 부분적인 이유라고 유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변명은 역사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실제로는 그 반대였다), 제11군단의 명성은 실추되었다. 일부는 하워드가 게티즈버그에서 궁극적인 성공을 거둔 데 어느 정도 공헌했다고 주장하는데, 그는 그의 사단 중 하나(아돌프 폰 슈타인베어 소장)를 묘지 언덕에 예비 병력이자 중요한 후속 방어선으로 현명하게 배치했기 때문이다. 사흘간의 전투 중 나머지 기간 동안 군단은 묘지 언덕 주변에서 방어 태세를 유지했으며, 7월 2일 주발 얼리 소장의 공격을 견뎌냈고, 7월 3일 피켓의 돌격에 대한 방어의 주변부에 참여했다. 또한 게티즈버그에서 하워드의 남동생인 찰스 헨리 하워드 소령은 그의 부관으로 복무했다.[10]

서부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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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테쿰세 셔먼 소장과 그의 장군들. 1. 올리버 O. 하워드 소장; 2. 존 A. 로건 소장; 3. 윌리엄 B. 헤이즌 소장; 4. 윌리엄 테쿰세 셔먼 소장; 5. 제퍼슨 C. 데이비스 소장; 6. 헨리 워너 슬로컴 소장; 7. 조셉 A. 모어 소장; 8. 프란시스 P. 블레어 주니어 소장 (일부 잘림)

하워드와 제11군단은 동료 장군 헨리 슬로컴의 제12군단과 함께 서부 전선으로 전출되어 테네시주컴버랜드군의 일부가 되었으며, 다시 "싸우는 조" 후커의 지휘를 받았다. 채터누가 전투에서 군단은 미셔너리 릿지를 점령하고 브랙스턴 브래그 장군의 후퇴를 강요한 충동적인 공격에 참여했다. 1864년 7월, 제임스 B. 맥퍼슨 소장의 사망 이후, 테네시강군의 임시 지휘권은 그날 현장에 있던 최고 계급 장교인 존 A. 로건 소장에게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명령으로 주어졌다. 애틀랜타 전투의 성공 직후, 셔먼(육군사관학교 졸업생에게 지휘권을 부여하는 것을 선호했다)은 하워드를 테네시강군의 영구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1864년 9월 10일 존 A. 로건 소장이 제출한 "사후 작전 보고서" 말미에 로건은 테네시강군 사령관으로 불과 4일 동안 복무했음을 언급했다. 로건의 상세 보고서는 이렇게 끝났다. "저는 26일 밤에 테네시강군을 철수시켰고, 군의 중앙 및 우익 후방을 따라 프록터 크릭 건너편 위치로 이동시켰습니다. 그날 밤 군을 배치한 후 저는 하워드 소장에 의해 해임되었습니다." 하워드는 이후 윌리엄 테쿰세 셔먼 소장의 유명한 바다로의 행진의 우익을 이끌고,[11] 조지아주를 거쳐 캐롤라이나 전역으로 향했다. 셔먼은 테네시강군의 영구 지휘권에 로건보다 하워드를 선호했지만, 애틀랜타에서의 로건의 성공을 인정했다. 애틀랜타에서 로건이 보여준 탁월한 리더십을 인정하여, 셔먼은 하워드에게 1865년 5월 워싱턴에서 열린 대규모 퍼레이드에서 로건이 테네시강군을 의례적으로 이끌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셔먼이 하워드에게 기독교 신사로서 호소하자 하워드는 동의했다. 결국 전쟁이 끝날 무렵, 셔먼 장군은 하워드를 "최고의 기술, 정확성, 정밀성"을 갖춘 군단장으로 칭찬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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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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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거버너스섬에서 군복을 입은 하워드

해방노예국

1865년 5월부터 1874년 7월까지 하워드 장군은 해방노예국 (육군 난민, 해방 노예 및 버려진 토지국) 위원장으로 재건 시대에 큰 역할을 했으며, 해방 노예(이전 노예)를 미국 사회에 통합시키는 일을 담당했다. 하워드는 배급, 학교 교육, 법원, 의료와 같은 사회 복지 형태를 포함한 광범위한 프로그램과 지침을 고안했다. 하워드는 해방노예국의 복지 측면을 강력히 싫어하고 특히 남부 백인들에게 정치적 권력을 되돌려주려고 노력했던 앤드루 존슨 대통령과 자주 충돌했다. 그러나 하워드는 의회의 공화당 급진파의 지지를 받았다. 공화당 급진파가 1867년에 권력을 얻자, 그들은 남부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새로운 선거를 치렀으며, 해방노예, 남부로 내려온 북부 공화당원들(경멸적으로 카펫배거라고 불림), 그리고 재건을 지지한 남부인들(스캘러왜그라고 불림)의 공화당 연합이 승리했다 (버지니아 제외). 해방노예국은 흑인들이 정치적으로 조직하는 것을 돕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따라서 정파적 적대감의 표적이 되었다.[12]

존슨 대통령은 하워드를 광신자라고 불렀다.[13] 재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해방노예국이 민간 및 군사 권력을 모두 남용하여 중앙 집권적 독재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워드는 그의 막대한 권한의 범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거의 무제한의 권한이 나에게 활동의 범위와 자유를 주었다... 입법, 사법, 행정 권한이 내 임무에 결합되었다.[14]

앤드루 존슨은 민간인에 대한 그러한 무제한적인 행동 범위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외부 링크

요약
관점

틀:Gettysburg figures

자세한 정보 군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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