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질문
타임라인
채팅
관점
요제프 알버스
독일계 미국 화가, 디자이너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Remove ads
요제프 알버스(Josef Albers, 1888년 3월 19일~1976년 3월 25일)는 독일 태생의 미국인 예술가이자 시각 예술 교육자로, 미국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 교육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1][2] 1888년 독일 베스트팔렌 보트로프의 장인 배경을 가진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난 알버스는 어린 시절 유리 인그레이빙, 배관 및 배선과 같은 다양한 실용 기술 훈련을 받았다. 그는 1908년부터 1913년까지 학교 교사로 일했으며, 1918년에 첫 공공 의뢰를 받았으며, 1919년에 뮌헨으로 이주했다.
1920년 알버스는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의 학생으로 입학하였고, 1922년에 강사가 되어 수공예 원리를 가르쳤다. 1925년 바우하우스가 데사우로 이전하면서 교수로 승진했고, 이 기관의 학생이자 섬유 예술가인 아니 플라이슈만과 결혼했다. 데사우에서 알버스는 가구 디자인과 유리 제작 작업을 강의하였으며, 파울 클레와 같은 저명한 예술가들과 협력했다. 1933년 나치 독일의 명령으로 바우하우스가 폐쇄된 후, 알버스는 미국으로 이민하여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실험적인 리버럴 아츠 기관인 블랙마운틴 칼리지에서 1949년까지 가르쳤다.
블랙마운틴에서 알버스는 루스 아사와와 로버트 라우션버그와 같은 예술가들을 가르쳤다. 1950년 그는 예일 대학교로 떠나 디자인 학과장을 맡았고, 그래픽 디자인 프로그램에 크게 기여했다. 디자인에서 실용적인 경험과 비전을 우선시하는 알버스의 교육 방법론은 전후 서양 시각 예술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1963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색채의 상호작용"은 색 이론에 대한 중추적인 저작으로 간주된다.[3]
교사이자 추상 화가이자 이론가였던 알버스는 중첩된 정사각형으로 색채 상호 작용을 탐구하고 사용된 색상을 꼼꼼하게 기록한 시리즈 정사각형에 대한 경의(Homage to the Square)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뉴욕시의 코닝 글래스 빌딩과 타임 & 라이프 빌딩을 위한 벽화와 같은 작품을 제작하였다. 1970년, 그와 그의 아내는 오렌지 (코네티컷주)에 살면서 개인 스튜디오에서 계속 작업했다. 1971년 알버스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단독 전시회를 가진 최초의 생존 예술가가 되었다.[4] 알버스는 1976년 3월 25일 심장 질환으로 예일-뉴헤이븐 병원에 입원한 후 수면중에 사망했다.
Remove ads
생애
요약
관점

독일 시절
베스트팔렌
알버스는 1888년 독일 제국 베스트팔렌 보트로프의 로마 가톨릭 장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로렌초 알버스(Lorenzo Albers)는 주택 도장공, 목수, 잡역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그의 어머니는 대장장이 가문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 요제프는 유리 조각, 배관, 배선 등 실용적인 훈련을 받아 다양한 재료를 다루는 데 다재다능하였으며, 평생의 자신감을 얻었다.[6][7] 그는 1908년부터 1913년까지 고향에서 학교 교사로 일했으며, 1913년부터 1915년까지 독일 베를린의 베를린 왕립 예술 학교에서 미술 교사 교육을 받았다. 1916년부터 1919년까지 에센의 응용예술학교에서 판화가로 활동하며 네덜란드 예술가 요한 쏜 프리커에게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을 배웠다.[8] 1918년 그는 처음으로 보트로프의 한 교회를 위한 스테인드글라스(Rosa mystica ora pro nobis) 제작 의뢰를 받았다.[6] 1919년 그는 독일 뮌헨으로 이주하여 뮌헨 미술원에서 막스 되르너와 프란츠 폰 슈투크의 가르침을 받았다.[9]
바우하우스 입학

알버스는 1920년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의 예비 과정 학생으로 입학했다. 알버스는 회화를 공부했지만, 1922년 바우하우스 강자로 합류한 것은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자 자격이었다. 그는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을 건축의 구성 요소이자 독립적인 예술 형태로 접근했다.[10] 바우하우스의 교장이자 설립자인 발터 그로피우스는 1923년 그에게 디자인 학부의 예비 과정에서 신입생들에게 수공예 원리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알버스가 그 배경 출신이며 적절한 실습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5년 바우하우스가 데사우로 이전한 해에 알버스는 교수로 승진했다. 이때 그는 이 기관의 학생이었던 아니 알버스(플라이슈만)와 결혼했다. 데사우에서는 가구 디자인과 유리 작업 등의 교육을 맡았다. 젊은 강사로서 그는 오스카 슐렘머, 바실리 칸딘스키, 파울 클레와 같은 저명한 예술가들과 함께 바우하우스에서 가르쳤다. "형태 스승"이라고 불리는 클레는 "공예 스승"이었던 알버스의 유리 공방에서 형식적인 측면을 가르쳤고, 그들은 몇 년 동안 협력했다.
미국 이민
블랙마운틴 칼리지
1933년 나치즘의 압력으로 바우하우스가 폐쇄되자 예술가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대부분은 나라를 떠났다. 알버스는 미국으로 이민했다. 당시 뉴욕시 뉴욕 근대미술관의 큐레이터였던 건축가 필립 존슨은 알버스가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새로운 미술 학교인 블랙마운틴 칼리지의 학과장 자리를 맡도록 주선했다.[11] 1933년 11월, 그는 이 대학의 교수진에 합류하여 1949년까지 회화 프로그램의 책임자를 맡았다.
블랙마운틴에서 그의 학생 중에는 루스 아사와, 레이 존슨, 로버트 라우션버그, 사이 트웜블리, 수잔 웨일 등이 있었다. 그는 또한 빌럼 데 쿠닝과 같은 중요한 미국 예술가들을 여름 세미나에 초청하여 가르쳤다. 웨일은 알버스에 대해 교사로서 "그는 그 자체로 학원이었다"고 말했다. 알버스는 그녀도 "학교에 있을 때는 예술가가 아니라 학생"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예술가로서 자신의 길을 시작할 때는 자기 표현을 매우 지지했다고 말했다.[12] 알버스는 이 시기에 많은 목판화와 나뭇잎 연구를 제작했다.
예일 대학교
1950년 알버스는 블랙마운틴을 떠나 뉴헤이븐에 있는 예일 대학교 디자인 학과장을 맡았다. 예일대 재직 중 알버스는 신생 그래픽 디자인 프로그램(당시 "그래픽 아트"라고 불림)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디자이너 앨빈 아이젠만, 허버트 매터, 앨빈 러스티그를 고용했다.[13] 알버스는 1958년 은퇴할 때까지 예일대에서 일했다.
1962년, 예일 대학교의 석좌교수으로서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전시회와 강연을 위해 그레이엄 미술 재단으로부터 보조금을 받았다. 알버스는 또한 예일 대학교 교수이자 건축가인 킹루이 우와 협력하여 일부 프로젝트를 위한 장식 디자인을 만들었다. 이 중에는 라우스와 듀폰트 하우스의 독특한 기하학적 벽난로 제작, 예일 대학교의 비밀 고학년 그룹 중 하나인 Manuscript Society의 파사드(1962), 그리고 베델 침례교회를 위한 디자인(1973)이 포함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그는 구조적 구성 작품들을 작업했다.
그는 1973년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석학회원으로 선출되었다.[14] 1970년 알버스와 그의 아내는 오렌지 (코네티컷주)로 이사하여 개인 스튜디오에서 계속 작업했다. 알버스는 1976년 3월 25일 예일-뉴헤이븐 병원에 심장 질환으로 입원한 후 수면중에 사망했다.[15]
커맨드 레코드
요제프 알버스는 1959년부터 1961년까지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음반 커버를 제작했다. 알버스의 커맨드 레코드용 음반 슬리브 7장은 원과 점의 격자무늬와 같은 요소를 포함했는데, 이는 그의 작품에서 매우 드문 것이었다. "반세기 전에 커맨드 레코드가 제작한 일련의 음반들은 오늘날에도 오디오 애호가들에게 울림을 주며, 시선을 사로잡는 커버로 인해 중세기 현대 디자인 감정가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요제프 알버스와 이녹 라이트라는 두 사람의 협력 덕분이었다. 두 사람 모두 – 한 명은 영향력 있는 교사이자 예술가였고, 다른 한 명은 스테레오 녹음의 선구자였다 – 각자의 분야에 대한 강한 신념과 열정으로 움직였다."
Remove ads
작품
요약
관점

정사각형에 대한 경의
디자이너, 사진작가, 타이포그래퍼, 판화가, 시인으로서 알버스는 추상 화가이자 이론가로서의 작업으로 가장 잘 기억된다. 그는 특히 수백 점의 회화와 판화로 구성된 정사각형에 대한 경의(Homage to the Square) 시리즈에서 구도에 대한 매우 절제된 접근 방식을 선호했다. 1949년에 시작된 이 엄격한 시리즈에서 알버스는 중첩된 정사각형으로 색채 상호 작용을 탐구했다. 일반적으로 프레스보드에 그림을 그렸으며, 유화 물감으로 팔레트 나이프를 사용해 작업했고 종종 작품 뒷면에 사용된 색상을 기록했다. 각 그림은 네 가지 다른 배열 중 하나로 이루어지는데, 각 정사각형은 내부에 세 개 또는 네 개의 단색 정사각형이 중첩되며, 크기는 406×406mm에서 1.22×1.22m까지 다양하다.[16]
벽화

1959년, 맨해튼 코닝 글라스 빌딩의 로비에 알버스의 금박 벽화인 Two Structural Constellations가 새겨졌다.[17] 타임 & 라이프 빌딩 로비 입구에는 두 개의 포털(1961)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두 개의 청동 중심부로 흰색과 갈색의 번갈아 가며 나타나서 깊이의 착시를 생성하는, 유리 띠로 이루어진 42피트 x 14피트의 벽화이다.[18] 1960년대에 발터 그로피우스는 에머리 와 피에트로 벨루스키와 함께 팬암 빌딩을 설계하면서 알버스에게 벽화를 의뢰했다. 알버스는 1929년 바우하우스에서 디자인했던 샌드블라스트 유리 구조물인 '시티'를 재작업하여 맨해튼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검은색, 흰색, 빨간색 줄무늬가 서로 엮인 기둥으로 배열된 이 거대한 추상 벽화는 높이 28피트, 폭 55피트였으며 건물 로비에 설치되었으나, 2000년경 로비 재설계 중에 제거되었다. 1976년 사망하기 전에 알버스는 작품이 쉽게 복제될 수 있도록 정확한 사양을 남겼고, 2019년에 복제되어 현재 메트라이프로 이름이 바뀐 팬암 빌딩의 원래 위치에 재설치되었다.[19][20] 1967년에는 그의 채색 벽화 Growth (1965)와 벽돌 부조 Loggia Wall (1965)이 로체스터 공과대학교 캠퍼스에 설치되었다. 다른 건축 작품으로는 캔자스시티 (미주리주)의 그랜드 애비뉴 국립은행 로비에 설치된 스테인리스강 부조 Gemini[21] (1972)와 1980년에 파괴된 맨해튼 셀라니스 빌딩의 모자이크 벽화 Reclining Figure (1972)가 있다. 옛 제자였던 호주 건축가 해리 시들러의 초청으로 알버스는 시드니의 Mutual Life Centre를 위한 벽화 Wrestling (1976)을 디자인했다.
Remove ads
색 이론
1963년, 알버스는 색채 연구 및 교육의 경험적 방법을 기록한 <색채의 상호작용>(Interaction of Color)를 출판했다. 그는 색상이 "실제로 보이는 그대로는 거의 보이지 않으며" "색상은 끊임없이 속인다"고 주장하며, 색상은 실험과 관찰을 통해 경험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제안했다. 매우 희귀한 초판은 단 2,000부 한정 인쇄되었으며 150개의 실크스크린 판화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작품은 이후 재출판되었으며, 현재는 iPad 앱으로도 이용 가능하다.[22]

알버스는 그의 강의 마지막에 (그리고 <색채의 상호작용> 끝부분에) 색상 시스템을 제시했는데, 여기에는 기본색, 보조색, 3차색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그가 삼각형 색상 모델에서 특정 색상에 부여한 다양한 함의가 포함되어 있었다.[23]
자신의 작품에 관해서, 알버스는 마치 색상이 광학 실험의 목록화된 구성 요소인 것처럼, 작품 뒷면에 자신이 사용한 특정 제조사의 색상과 바니시를 꼼꼼하게 나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24]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유럽 미술과 새로운 미국 미술 사이의 전환을 나타낸다.[25] 구성주의자와 바우하우스 운동의 유럽적 영향을 통합했으며, 그 강렬함과 작은 규모는 전형적인 유럽적 특성이었지만,[25]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미국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25] "하드 에지" 추상 화가들은 그의 패턴 사용과 강렬한 색상에서 영감을 받았고,[26] 반면 옵 아티스트와 개념 예술가들은 그의 지각에 대한 관심을 더욱 탐구했다.[25]
1950년에 출판된 작가에 대한 기사에서 일레인 드 쿠닝은 그의 그림들이 처음에는 아무리 비인격적으로 보일지라도, 그들 중 어느 하나도 "요제프 알버스 자신 외에는 아무도 그릴 수 없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6]
교육과 영향
알버스는 학생들에게 색채의 상호 작용 원리를 가르치는 것을 우선시했지만, 모든 재료와 디자인에 재료를 활용하는 일반적인 접근 방식을 주입함으로써 많은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알버스는 "이론보다 실천을 우선시하고 경험을 중요시했으며, '중요한 것은 소위 사실에 대한 소위 지식이 아니라 비전, 즉 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초점은 과정에 있었다."[27] 로버트 라우션버그는 나중에 알버스를 자신의 가장 중요한 스승으로 꼽았다.[28] 알버스는 20세기 시각 예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사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29]
알버스의 유명한 제자들
- 리처드 아누슈키에비츠 (화가)
- 루스 아사와 (조각가)
- 피터 비어드 (사진작가, 콜라주 예술가)
- 바루잔 보고시안 (콜라주 예술가이자 조각가)
- 노먼 칼버그 (조각가, 교육자)
- 제인 데이비스 도겟 (그래픽 디자이너)
- 로버트 엥맨 (조각가)
- 어윈 하우어 (조각가)
- 에바 헤세 (조각가)
- A. B. 잭슨 (화가) (화가)
- 로버트 L. 레버스 주니어 (1930–1992; 화가,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미술 교수)
- 로널드 마크맨 (화가이자 조각가)
- 빅터 모스코소 (그래픽 예술가)
- 찰스 O. 페리 (조각가)
- 어빙 페틀린 (화가)
- 조셉 라파엘 (화가)
- 로버트 라우션버그 (화가이자 조각가)
- 로버트 리드 (예술가) (화가, 교육자)
- 윌리엄 라이만 (조각가, 교육자)
- 어윈 루빈 (건축 및 콜라주 예술가, 교육자)
- 스테파니 스쿠리스 (조각가, 교육자)
- 아리에 샤론 (건축가)
- 해리 시들러 (건축가)
- 리처드 세라 (조각가)
- 세웰 실먼 (화가, 교육자)
- 로버트 슬럿스키 (1929–2005) 화가, 회화 및 건축 교사
- 줄리안 스탄차크 (화가)
- 테오 스타브로풀로스 (화가, 1930–2007)
- 코라 켈리 워드 (화가)
- 닐 웰리버 (화가)
- 베라 윌리엄스 (아동 작가이자 삽화가)
Remove ads
작가의 인용문
- – "모든 색채 지각은 환상이다.. ..우리는 색을 실제 모습으로 보지 않는다. 우리의 지각 속에서 색은 서로를 변화시킨다."[30] [1949년경, 알버스가 첫 정사각형에 대한 경의를 그리기 시작했을 때]
- – "예술의 기원: 물리적 사실과 심리적 효과 간의 불일치. 예술의 내용: 삶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 예술의 척도: 노력과 효과의 비율. 예술의 목적: 비전의 계시와 환기."[31] [1964년, 그의 글 "정사각형에 대한 경의"에서]
- – "나에게 추상은 실제적이며, 아마도 자연보다 더 실제적일 것이다. 나는 더 나아가 추상이 내 마음에 더 가깝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보는 것을 선호한다."[30] [1966년]
- – "예술은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예술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예술을 지각하려면 우리는 수용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예술이 지금 우리를 만나는 곳에 있다. 예술의 내용은 삶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예술의 척도, 노력 대비 효과의 비율, 예술의 목적은 비전의 계시와 환기이다.[32] [1968년, 요제프 알버스 구술 역사 인터뷰에서]
- – "나는 1933년 11월 블랙마운틴 칼리지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입에 올린 영어 문장을 진실로 만들었다. 한 학생이 내가 무엇을 가르칠 것이냐고 묻자 나는 '눈을 뜨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이 내 모든 가르침의 모토가 되었다."[33] [1970년, 'A conversation with Josef Albers'에서]
Remove ads
전시회 (일부 목록)
개인전
그룹
사후
- 요제프 알버스, 1888–1976 (1976년 3월 26일 – 4월 19일) 뉴욕 근대미술관, 뉴욕[39]
- 요제프 알버스 재단 소장품 선별: 요제프 알버스 사진전 (1988년 1월 27일 – 4월 19일) 뉴욕 근대미술관, 뉴욕[40]
- 종이에 그린 그림 – 미국의 요제프 알버스 (2010) 피나코테크 데르 모데르네, 뮌헨; 퐁피두 센터, 파리, 그리고 모건 라이브러리 & 뮤지엄, 맨해튼. 이전에 한 번도 전시되지 않은 유화 작품 80점.[41]
- 요제프 알버스 (2011) 팔라치나 데이 지아르디니, 모데나, 이탈리아[6]
- 알버스와 상속인들: 요제프 알버스, 닐 웰리버, 제인 데이비스 도겟 (2014) 엘리엇 박물관, 플로리다
- 하나와 하나는 넷: 요제프 알버스의 바우하우스 포토콜라주 (2016년 11월 23일 – 2017년 4월 2일) 뉴욕 근대미술관, 뉴욕[42]
- 멕시코의 요제프 알버스 (2017년 11월 3일 – 2018년 4월 4일)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43]
- 알버스와 모란디: 끝나지 않은 작품: 요제프 알버스와 조르조 모란디의 작품 (2021) 데이비드 즈위르너 갤러리, 뉴욕[44]
Remove ads
유산
요제프 알버스의 1929년부터 1970년까지의 문서와 자료는, 1969년과 1970년에 작가에 의해 스미스소니언 협회의 미술 자료 보관소에 기증되었다. 1971년(사망하기 약 5년 전) 알버스는 요제프 앤 아니 알버스 재단(Josef and Anni Albers Foundation)을 설립했는데,[45] 그는 이 재단이 "예술을 통한 비전의 계시와 환기"를 더욱 발전시키기를 희망했다. 오늘날 이 조직은 요제프 알버스와 그의 아내 아니 알버스의 유산 관리를 담당하며, 두 예술가의 작품에 초점을 맞춘 전시회와 출판물을 지원한다. 재단 건물은 베서니 (코네티컷주)에 위치하며, "재단의 미술 소장품, 도서관 및 자료 보관소, 사무실을 수용하는 중앙 연구 및 자료 보관 센터와 방문 예술가를 위한 거주 스튜디오를 포함한다."[46] 요제프 알버스 유산의 두 번째이자 상당한 부분은 그가 태어난 독일 보트로프의 요제프 알버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47] 두 기관 모두 작가의 명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요제프 앤 아니 알버스 재단은 세계 세 곳에서 세 가지 거주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코네티컷 주 베서니, 아일랜드 카라이그-나-캣, 세네갈 스레드에 위치하고 있다. 거주 기간은 보통 1~2개월이다.[48]
2019년, 그의 "거대한" 벽화인 맨해튼은 거의 20년 동안 사라졌다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뉴욕 200 파크 애비뉴(메트라이프) 빌딩에 다시 설치되었다. 메트라이프 관계자는 2000년 철거 당시 "예술계에서의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더 이상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49] 20년 후, 이 작품은 다시 건물의 활기찬 중심 작품으로 찬사를 받고 있으며, 알버스 재단의 이사가 작품 재헌정식에 참석했다: "이것이 그에게 예술이었다. 당신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 어쩌면 기차로 서두르거나 역에서 직장으로 서두르는 사람들의 삶에 약간의 기쁨을 줄 수 있는 것."[50]
Remove ads
비판
요제프 알버스의 저서 <색채의 상호작용>은 그가 사망한 후 제기된 여러가지 비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981년 앨런 리는 색채 경험에 대한 알버스의 일반적인 주장(색채는 끊임없이 속인다)을 반박하고, 알버스의 지각 교육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주장하려 했다.
리는 알버스의 색채 설명에서 네 가지 주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가산 혼합 및 감산 혼색; 색채의 톤 관계; 베버-페히너의 법칙; 그리고 동시 대비. 각 경우에 리는 알버스가 색채에 대한 자신의 주장과 교육학적 방법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 근본적인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리는 알버스의 색채 착시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이 미적 감상(시각적 지각에 대한 어떤 혼란에 의존한다는 것)에 대한 오해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리는 알버스가 제시한 개념 대신 에드윈 H. 랜드의 과학적 색채 가설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리는 알버스 작품의 기초를 이루는 색채 개념에 대한 성공적인 도전에 이어 알버스 예술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51][52]
도로시아 제임슨은 알버스의 회화와 교육학적 접근 방식이 안료를 다루고 혼합하는 예술가들의 경험을 강조했으며, 이는 투사된 빛이나 회전하는 색상 디스크를 사용한 색채 이론 실험에서 예측되는 것과는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고 주장하며 리의 알버스 비판에 이의를 제기했다. 또한 제임슨은 가법 및 감법 혼색에 대한 리 자신의 이해가 결함이 있다고 설명한다.
Remove ads
미술 시장 가치
알버스의 정사각형에 대한 경의 시리즈 중 여러 그림은 예상치를 뛰어넘는 가격에 팔렸는데, 그 중 '정사각형에 대한 경의: 기쁨 (1964)'은 2007년 소더비 경매에서 150만 달러(예상치의 거의 두 배)에 팔렸다.[53] 2015년에는 '정사각형에 대한 경의를 위한 연구, R-III E.B. (1970)'가 "활발한 시장의 최고점"에서 785,000 파운드에 팔렸다.[54]
다작 예술가인 알버스는 그의 작품이 전시된 박물관 외에도 수많은 판화와 드로잉을 제작하였다.
요제프 알버스와 아니 알버스의 유산의 주요 수혜자인 알버스 재단은 예술가의 작품과 명성을 보호한다. 1997년, 경매 회사인 소더비스가 앙드레 에머리히 갤러리를 인수한 지 1년 후, 요제프 앤 아니 알버스 재단은 갤러리와의 3년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다.[55] 재단은 또한 위조품을 적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6]
같이 보기
- 바우하우스
- 아키타입 알버스 (포스터 및 표지판용 기하학적으로 구성된 스텐실 유형에 대한 알버스의 1927–1931년 실험을 기반으로 한 대형 서체)
각주
더 읽어보기
외부 링크
Wikiwand - on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
Remove ad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