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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량카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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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량카다이(Uriyangkhadai, 몽골어 : Урианхадай, [uriɑŋ.xɑˈdæ], 중국어 간체자: 兀良哈台, 병음: Wùliánghātái, 1201-1272)[1]는 몽골 제국의 우량카이(Uriankhai) 출신 장군으로, 13세기 몽골의 송 원정을 주도하였으며, 몽골군의 제1차 베트남 침공에도 참여하였다.[2][3][4] 명장 수부타이(Subutai, 速不臺)의 아들이자 아주(Aju, 阿朮)의 아버지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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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과 유럽 원정
우량카다이는 몽골 장군 수부타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출신 부족 '우량카이'로부터 이름지어졌다.[5] 젤메(Jelme)의 조카였다.[5][6] 전설에 의하면 수부타이는 다뉴브강 강둑에서 아들 우량카다이에 의해 죽기를 바랐다고 한다.[5]
1241년, 우량카다이는 몽골의 동유럽 원정에서 공적을 세웠다.[5][7] 장 피에르 아벨 레뮈사(Jean-Pierre Abel-Rémusat)에 의하면, 우량카다이는 중국으로 보내지기 전에 몽골군 키에반 루스 침공(Mongol invasion of Kievan Rus'), 몽골군 제1차 폴란드 침공(First Mongol invasion of Poland) 몽골군 게르만 정복(conquests of Germanic lands)에 참가하였다고 한다.[7]
중국 및 베트남 원정
운남·티베트 침공
몽골군의 남송 침공 제1단계에서 우량카다이는 3천명의 몽골 기병을 이끌고 사천을 공격하였다.[2] 쩐 왕조(陳朝, Trần dynasty)의 다이비엣(大越)으로 진군하는 1257년 겨울 이전에, 우량카다이는 쿠빌라이(Kubilai)를 따라 대리국(大理國) 원정을 성공하였고, 쿠빌라이가 중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는 티베트 부족간에 화약을 맺었다.[8] 우량카다이는 쿠빌라이보다 더 많은 군사 원정을 수행하였고, 전투에서 가치를 입증하였다.[8]
베트남 침공
1257년 가을, 우량카다이는 중국 화남으로 들어가는 길을 요구하면서 쩐타이똥(陳太宗, Trần Thái Tông)에게 서신을 세 통 보냈다.[9] 서신을 가져 간 세 무리의 사신단이 잇달아 수도 탕롱(Thang Long, 昇龍)에 감금되자,[10] 우량카다이는 우량카다이는 장군 트레첵두(Trechecdu)와 아주(Aju)와 함께 후면에서 침공하였다.[9] 베트남 사료에 의하면, 몽골군은 최소 3만명의 군대로 구성되었으며, 이 가운데 최소 2천명은 대리국(大理國)에서 온 이족(彝族) 군대로 구성되었으나,[1] 서방 자료에서는 몽골군이 약 3천명이었고 이족 군대는 1만명이었다고 평가한다.[4] 1258년, 우량카다이는 탕롱을 함락시켰다.[8][11][3] 중국 문헌에서는 우량카다이가 악천후로 점령 9일 만에 베트남에서 철군했다고 잘못 기록되어 있지만, 1259년까지 그의 군대는 떠나지 않았다.[11][3]
광서·호남 침공
1259년, 우량카다이는 탕롱을 떠나 남송을 공격, 오늘날 광서(廣西)로 진격하였다. 그의 공격은 몽케 칸(Möngke Khan)이 지휘하는 사천 진격군과 산동(山東) 및 하남(河南) 진격군과 협공으로 이뤄졌다.[3][12] 1259년 11월 17일경, 쿠빌라이는 호북(湖北) 악주(鄂州)를 포위하는 가운데, 전령으로부터 우량카다이의 군대가 탕롱에서 광서 영주(永州, 오늘날 광서 남녕南寧)와 계림(桂林)을 경유하여 담주(潭州, 오늘날 장사長沙)로 진군한다는 보고를 받았다.[3] 이후 우량카다이의 군대는 화북으로 돌아가고자 장강 북쪽에 있었던 쿠빌라이에게 합류하고자 싸우면서 길을 뚫었다. 이후 1259년 8월 11일, 두 군대는 몽케 칸의 사망으로 발생한 황위 경쟁으로 인해 조어성(釣魚城)을 포위하다 화북으로 돌아갔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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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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