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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단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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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단(韋丹, 753~810.9.8)은 중국 의 관리이다. 자가 문명(文明)으로[1] 경조부(京兆府) 만년현(萬年縣, 현 산시 성 시안시 창안 구) 사람이다. 계보는 경조 위씨(京兆韋氏) 운공방(郧公房)으로, 북주(周周)의 대사공(大司空)을 지냈던 위효관(韋孝寬)의 6대 손이다.

생애

요약
관점

북주의 대사공을 지낸 위효관의 아들 위진(韋津)의 후손으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외할아버지이자 당의 태사였던 안진경(顏真卿)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안진경은 외손자 위단을 매우 아꼈다고 전한다.[2]

위단은 자라서 명경(明經)에 급제하여 안원현령(安遠縣令)이 되었지만, 자신의 배다른 서형(庶兄)에게 관직을 양보하였다. 이후 다시금 오경과에 급제하여 그 이름이 맨 앞에 있었으며, 이후 함양위(咸陽尉), 전중시어사(前中侍御史) 사인(舍人)을 거쳐 시봉랑중 겸 어사중승(御使中丞)이 되었다.

신라에서 원성왕이 사망(798)하고 소성왕이 뒤를 이어 즉위했음을 알려 왔을 때, 당 조정은 신라로 파견할 조문 겸 책봉 사절로 위단을 임명했다. 당시 '사적관'(私覿官)이라 하여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경우 그 사신에게는 주, 현의 관리 열 명이 할당되었는데 이 관리직의 임명권을 사신이 행사할 수 있도록 하여서, 사신이 자기 임의로 관리를 임명하고, 그 임명된 관리들로부터 재물을 받아서 사신으로서의 활동 경비에 조달하곤 하였다. 위단은 "내가 천자의 관리로서 해외의 나라에 사신으로 가는데, 비용이 부족하면 위에 청할 일이지 어찌 관직을 팔아서 돈을 받겠는가?"라며 이러한 관행을 거절하였고, 황제에게 청하여 경비를 받았다. 위단은 치청번진이 다스리던 운주에 이르러, 신라에서 소성왕이 이미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로 가지 않고 귀환하였고, 이후 당의 조정에서 위단의 이름이 크게 알려지게 되었다.

《전당문》(全唐文) 권491에 실려 있는 「봉송위중승사신라서」(奉送韋中丞使新羅序)는 위단이 책봉사의 명을 받고 신라로 떠날 때 권덕여(權德輿)가 그에게 지어준 글이다.

위단은 귀한 뒤 다시금 용주자사(容州刺史)로 임명되었다. 용주에서 그는 관내의 백성들에게 농사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학교를 세워 학문을 크게 진작시켰다. 또한 위단은 조정의 정치에 관심을 보이며 황제를 따르지 않으려 드는 번진을 적극적으로 토벌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그를 관찰사로 임명하고 무양군공(武陽郡公)으로 봉하였다. 그는 또한 재임 기간 동안 홍수와 가뭄에 대한 구제 활동을 펼치고, 부패를 금지하고, 백성을 돌보며, 선정을 장려하고, 농사와 양잠을 적극 권장하였다.

위단의 후임이 된 배의(裴誼)는 일찍이 헌종(憲宗)에게 표문을 올려서 위단을 위해 사당을 짓고 비석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위단이 사망하고 난 선종(宣宗) 때의 일이었다.

이후 위단은 강남서도관찰사(江南西道觀察使)가 되었다. 그는 관리의 일을 수행함에 청렴하고 올바르다는 평을 받았는데, 홍주자사(洪州刺史)로 있을 때는 홍주 땅에 초가집이 많아 화재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기와 굽는 기술자들을 불러다 기와를 구워서 백성들의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고쳐서 화재를 예방하게 하였으며[3] 길이가 20리(里) 되는 제방을 축조하여 강을 막고 구멍을 터놓아 넘치는 것을 막도록 하였는데,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못이 598개였으며, 12,000경(頃)에 이르는 논밭에 물을 댈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위단이 임기를 마치고 떠난 이듬해에 강남서도에 홍수가 나서 강물이 불어 거의 둑 높이까지 물이 차올랐고, 강남서도 주민들은 "이 제방이 없었으면 우리 시체가 저 바다에 떠다녔을 거야"라며 위단의 덕을 칭송하였다고 한다.[4]

하남소윤(河南少尹)을 거쳐 간의대부 등을 역임하고 원화 5년(810년) 8월 6일(양력 9월 8일)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인 원화 6년(811년) 7월 임인(양력 8월 2일) 만년현의 소릉원(少陵原)에 묻혔다.[2]

당 선종 때에 이르러 예전 원화(元和) 연간에 백성들을 다스린 수령들 가운데 누가 제일이었느냐는 선종의 물음에 앞서 강서관찰사를 지낸 적이 있었던 주지(周墀)가 나서서 위단의 이름을 언급하였다. 그는 위단을 두고 "위단의 덕이 거의 여덟 고을에 미칠 정도였고, 덕이 여덟 고을에 입히어, 죽은 지가 40년이 되었는데도 늙은이와 어린이가 생각하여 잊지 못합니다."라고 평하였고, 이에 선종은 위단의 사적을 비석에 새겨 세우게 하였다. 비문을 지은 것은 당대의 문인인 두목(杜牧)이었다. 이상은(李商隱)은 이때 건립된 위단의 비석을 가리켜 "漢江遠弔西江水,羊祜韋丹盡有碑"라고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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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

  • 위단은 일찍이 승려 영철과 알고 지냈는데, 위단이 일찍이 강남서도관찰사(江南西道觀察使)로 있을 적에 시를 보내어 “왕사는 번다하여 한가한 날이 없고, 덧없는 생은 무상하기 구름 같을 뿐이네. 내 이미 상평자처럼 돌아가 쉴 계획 했거니, 오로암 앞에서 반드시 그대와 함께할 걸세.〔王事紛紛無暇日, 浮生冉冉只如雲. 已爲平子歸休計, 五老巖前必共君.〕”라고 하였는데, 영철이 똑같이 시를 지어 화답하기를 “나이 늙고 몸 한가하여 바깥일 없으니, 삼베옷에 풀밭 자리도 몸을 용납할 만하다네. 서로 만나면 다들 벼슬 그만두고 떠난다 하지만, 숲 아래서 그런 사람 하나나 본 적 있던가.〔年老身閒無外事, 麻衣草坐亦容身. 相逢盡道休官去, 林下何曾見一人?〕”라고 하였다고 한다.[5]
  • 의 정극(鄭克)이 지은 《절옥귀감》(折獄龜鑑)에는 위단이 기한을 정해 반납 보충을 분부한 일화가 나온다.
  • 의 학자 고사기(高士奇, 1645~1704)의 《속편주》(續編珠)에는 《길흉향응록》(吉凶響應錄)을 인용하여, 위단이 어느 날 어부가 매우 큰 자라 한 마리를 잡은 것을 보고 그걸 사서 강에 돌려보냈는데, 훗날 이름을 원준(元濬)이라고 하는 장사(長史) 관직의 사람이 위단을 찾아와 자신이 위단이 살려 주었던 자라이며 자신을 살려준 것에 감사한다고 사례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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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6대 조
  • 위효관 - 북주의 운국공(郧国公)[2]으로 경조 위씨 운공방파의 파조(派祖)이다.
증조할아버지
  • 위유평(韋幼平) - 당의 기주참군(岐州参军)[1]
할아버지
  • 위포정(韋抱貞) - 재주자사(梓州刺史)[1]
할머니
  • 낭야 안씨(琅邪颜氏) - 당의 태사로 노군문충공(鲁郡文忠公) 안진경의 누이[2]
아버지
  • 위정(韋政) - 낙현현승(雒县县丞)을 지내고 괵주자사(虢州刺史)에 추증되었다.[2]
부인
  • 청하 최씨(清河崔氏) - 지강현령(支江县令) 최풍(崔讽)의 딸이다.[2]
  • 난릉 소씨(兰陵萧氏) - 중서령(中書令) 소화(蕭華)의 손녀로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소항(蕭恒)의 딸이다.[2]
자녀
  • 위치(韦寘)[2]
  • 위주(韦宙) - 검교상서좌복야 동평장사(检校尚书左仆射同平章事), 영남절도사(嶺南節度使)
  • 위수(韦岫) - 복건관찰사(福建观察使)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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