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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바야마성 전투

사이토씨와 오다 노부나가의 마지막 전투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이나바야마성 전투m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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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바야마성 전투(稲葉山城の戦い, 이나바야마조 다타카이)은 1567년에 오다 노부나가사이토씨를 그들의 산꼭대기 성에서 격파하고 일본 미노국을 정복하기 위한 마지막 전투였다.

간략 정보 이나바야마성 전투, 날짜 ...

신장공기에 따르면[1] 1567년 9월 13일부터 27일까지, 즉 일본력으로는 에이로쿠 10년 8월 1일부터 15일까지 2주간의 짧은 공성전이 벌어졌다. 이 공성전은 노부나가 연합군의 결정적인 전투와 승리로 끝났고, 그 결과 사이토씨와 그 가신 및 동맹국이 정복되었다. 이 승리는 지난 6년 동안 간헐적으로 진행된 노부나가의 미노 정복의 정점이었다. 이로써 20여년 전 노부나가의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사이토 도산 사이에 시작된 오와리국 오다 가문과 미노 사이토 가문 사이의 경쟁이 종식되었다.

사이토 가문의 지도력이 약했기 때문에 많은 사무라이 지도자들이 전투 전에 노부나가에게 항복했고, 다른 지도자들은 전투 후에 기꺼이 복종했다. 이 승리로 노부나가는 광대하고 비옥한 미노국을 장악하고 수많은 지지자와 자원을 얻었다. 노부나가는 이나바야마성을 수리하고 기후성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호쿠리쿠 지방으로 진출하고 교토로 진격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마련했다. 기 성은 1575년 부분적으로 완성된 아즈치성으로 이전할 때까지 그의 주요 거주지이자 군사 본부로 기능했다.

노부나가의 젊은 가신 기노시타 도키치로는 이나바야마성에서 승리를 거두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투가 시작되기까지 몇 년 동안 그는 지역 군벌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협상을 벌여 공격 당시 기성 군대를 확보했으며 적 영토 가장자리에 성을 건설하여 오다군의 집결지를 만들었다. 이러한 준비에 더해 도키치로는 소규모 부대로 성을 습격하는 것과 같은 대담한 계획을 고안하고 주도하였고, 실제 이 계획을 성공시켜 이나바야마성 전투에서 성문을 여는 공을 세웠다. 도키치로의 노력으로 이나바야마성 전투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에 이후 노부나가는 도키치로를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 따라서 이 전투는 노부나가의 교토 진군을 위한 계획에서 중요성을 가질뿐만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후 권력을 잡는 데 있어 중요한 첫 단계로 평가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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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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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3년경의 오다 노부나가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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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가와 요시이쿠사이토 다쓰오키 (19세기)

1549년, 훗날 일본 오와리국의 주요 다이묘가 되고[Notes 1] 16세기 일본 통일을 시작할[2] 젊은 오다 노부나가(1534–1582)는 이웃한 미노국의 경쟁 상대인 사이토씨의 지도자 사이토 도산의 딸 노히메와 결혼했다.[3] 노부나가는 오다씨의 수장인 오다 노부히데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당시 노부히데는 오와리국의 북쪽과 동쪽 국경에서 적들과 싸우고 있었고, 내부 분쟁으로 인해 상황이 더욱 복잡했다.[4] 미노의 영주인 사이토 도산은 강력하고 무자비한 지도자였지만, 내부 분쟁으로 사이토 가문은 여러 파벌로 나뉘기 시작했다.[5] 두 가문 모두 더 시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잠시 휴식이 필요했고, 이에 노부나가와 노히메의 정략결혼은 두 가문의 경쟁과 국경 분쟁을 종식시켰다.[3]

1555년, 도산의 맏아들 사이토 요시타쓰는 자신의 상속권이 빼앗길 것이라 생각하고 두 동생을 살해했다. 이듬해 그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군대를 모아 아버지에게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6] 도산은 실제로 유언장을 변경하여 사위인 오다 노부나가를 법적 상속인으로 지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산은 나가라강 전투에서 요시타쓰의 가신에게 살해당했다. 당시 노부나가는 장인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고, 사이토 가문의 내전은 오다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전에 곧 끝났다. 1561년 요시타쓰가 나병으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 사이토 다쓰오키가 가문의 지도자가 되었다.[7] 당시 다쓰오키는 어렸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동료들과 가신들에게 효과적인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여겨졌고, 부하들에게 경멸받았으며, 심지어 지역 농민들에게도 미움을 받았다.[8][9]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오다 가문이 이마가와씨를 물리치고, 곧이어 마쓰다이라씨와 동맹을 맺은 후, 노부나가는 북쪽 이웃인 사이토 가문에 집중할 수 있었다.[10] 노부나가의 미노 침공 계획은 명목상 장인인 사이토 도산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명분으로 삼았다.[8] 그러나 요시타쓰는 노부나가가 공격하기 전에 사망했다. 그 결과, 노부나가는 요시타쓰의 상속인인 다쓰오키도 도산의 죽음으로 이득을 보았다고 판단하고 복수를 구실로 침공 계획을 계속 진행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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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국 정복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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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마타성, 2008년

1561년, 노부나가는 본거지를 고마키성으로 옮기고 미노국에서 전쟁을 시작하여 같은 해 6월 모리베 전투[11]:216주시조 전투에서 다쓰오키를 격파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1561년과 1563년에 미노 영토를 침략하여 짧은 전투를 벌였다. 각 원정에서 노부나가는 해당 지역 다이묘가 최대 3,000명의 병력을 빠르게 모아 수적으로 압도당했다. 개방된 곳에서 방어를 조직할 수 없었던 그는 매번 자신의 본거지로 후퇴했다.[12] 기후시의 향토사에 따르면 1564년 노부나가는 사이토 가문의 본거지인 이나바야마성을 공격하기까지 했다.[6] 성은 이나바산 꼭대기에 위치했는데, 북쪽 경사면은 스노마타강 기슭까지 가파르고 험준했으며, 남쪽 경사면을 따라 구불구불한 도로를 통해 접근할 수 있었다.[13] 거의 난공불락으로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14][15] 다쓰오키는 여장에서 도망쳐 성 안으로 숨었고, 그의 가신 다케나카 한베에안도 모리나리가 방어를 지휘했다.[6][16] 노부나가는 그 후 곧 떠나거나 쫓겨났다.[6] 훗날 노부나가는 이 패배를 기록에서 삭제하고 노부나가 연대기에서도 누락시켰다.[1][12][17]

1564년부터 오다 노부나가는 그의 신발 운반자이자 충실한 가신인 기노시타 도키치로를 미노 지역에 파견해 많은 영주들에게 아낌없이 뇌물을 주고 이들을 오다 가문이 이끄는 연합군에 합류하게 하는 작업을 맡겼다.[12] 기노시타는 탁월한 전략가로 여겨지지만 독실하게 은둔하며 살던 다케나카 한베에에게도 접근하여 그를 설득하려 했다. 사이토씨의 가신들은 다쓰오키의 불명예스러운 행동에 좌절했지만, 자신의 충성심을 변덕스럽게 보이고 싶지 않아 주군을 대신하여 기노시타의 제안을 거절했다.[18] 기노시타는 그의 성실함에 감명받아 그를 자신의 집으로 손님으로 초대하여 장기 체류하도록 했다. 한베에는 사이토 가문이 다쓰오키 아래에서 더 이상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인정했고, 기노시타에게 사이토 가문의 지도부가 기노시타의 손에 넘어갈 경우 관용을 베풀겠다는 약속을 대가로 기노시타의 초대를 수락했다.[19]

1566년, 다가오는 전쟁을 예상하여 기노시타는 오다 군대의 집결지 역할을 할 성을 이나바야마성 근처에 건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14] 노부나가는 이에 동의하고 기노시타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20] 이를 위해 하치스카 고로쿠의 지원을 받아 기노시타는 사이토 영토 맞은편 사이강 강변에 스노마타성을 건설했다.[21] 적에게 성이 가깝다는 장점은 건설 중에도 문제가 되었다. 성이 완성될 때까지 기노시타의 병사들은 강 건너편의 수륙양용 공격에 취약했다.[12] 전설에 따르면 기노시타는 성을 하룻밤 만에 지었다고 한다.[22] 턴불은 이 방어시설을 단순한 구조물로 보았다[23] 성을 서둘러 건설한 이유는 그의 병사들에게 유리한 지점을 제공하고 적을 놀라게 하고 동요하게 하기 위함이었다.[21] 적의 경계심을 이용하여 기노시타의 병사들은 연약한 골조를 빠르게 기능하는 요새로, 그리고 완전한 성으로 변모시킬 수 있었다.[24] 노부나가는 기노시타에게 성의 관리인으로 남아있으라고 명령하고 히데요시라는 이름을 하사했다.[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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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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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당시 이나바야마로 알려진 긴카 산

1567년, 오다 노부나가미노국사이토씨를 공격했다. 사이토 가문의 본거지이자 미노국의 행정 중심지는 이나바 산 꼭대기에 위치한 산악 요새인 이나바야마성이었다 (현 기후시). 가문의 다이묘인 사이토 다쓰오키가 겁 많고 무능한 통치자로 드러나자 다케나카 한베에가 쿠데타를 일으켜 성과 그 수비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다쓰오키는 명목상 가문의 수장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지만, 전투 결과에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 오다 군대가 미노에 진입하자 한베에는 성 방어를 위해 수비대를 준비시켰다.[12][16]

신장공기에 따르면 전투 준비는 1567년 9월 13일(에이로쿠 10년, 8월 1일)에 시작되었다.[1] 노부나가는 이 지역으로 진입하여 동맹군과 접촉했고, 노부나가 군의 핵심 병력 약 5,000명이 기소강을 건넜다.[12][27] 병력이 강 건너편에 집결하자 노부나가는 두 명의 사자 무라이 사다카쓰시마다 히데미쓰를 사이토 가문의 최고 가신 세 명, 즉 미노 삼인방에게 보내 다가오는 전투에서 협력을 요청했다. 기노시타 히데요시가 설득하여 전향한 미노 영주들은 노부나가의 군대에 추가 병력을 이끌고 왔다.

노부나가에게 충성하는 병력이 평원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동안, 침략군을 격퇴하려는 헛된 시도로 여러 차례의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1] 노부나가 군은 그 후 이나바야마성 아래에 있는 이노구치 마을에 진입했다. 시야를 확보하고 공성군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기노시타 히데요시의 선봉대는 마을에 불을 질렀다. 일부 병사들이 이노구치 산과 인근 능선에 자리를 잡는 동안, 주력군은 공성전을 시작하기 위해 이나바 산 앞에 자리 잡았다.[12] 사이토 가문의 전 가신들과 동맹국들의 깃발로 휘날리며 크게 증강된 군대는 성의 수비수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1] 그 후 며칠 동안 기노시타는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사람들을 파견했는데, 특히 기꺼이 돕고자 하는 농민들로부터 정보를 얻었다. 기노시타는 지역 주민인 호리오 요시하루를 만나 산 북쪽 경사면으로 이어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길을 안내받았다.[15] 성 아래 북쪽 경사면은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대규모 병력의 공격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전투 시작 시 수비수들은 사실상 이 지역을 무시하고 있었다.[12]

최종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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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키오카 요시토시의 이나바 산의 달 (1885): 기노시타 히데요시가 이나바 산을 오르는 모습

9월 14일에서 25일 사이에 전장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불확실하다. 노부나가의 공격적인 전투 스타일,[28] 당시의 지배적인 공성 전술, 일본의 성의 배치,[29] 그리고 이후에 벌어진 사건들을 고려할 때, 노부나가 군대가 공격을 감행하여 이나바야마성의 외곽 방어선을 돌파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12] 그러나 유능한 전략가로 여겨지는 구로다 간베에가 주요 공격을 지휘하고 조정하는 책임을 맡았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30] 또한 기노시타 히데요시가 소수의 병력이 산의 북쪽 경사면을 기어 올라가 성에 침입하여 공성군을 위해 성문을 열 계획을 고안했다는 것도 확실하다.[12] 노부나가는 이 계획을 승인하고 기노시타에게 습격을 이끌도록 맡겼다. 기노시타는 자신의 팀으로 호리오 요시하루, 하치스카 고로쿠, 그리고 다른 다섯 또는 여섯 명의 병사들을 선택했다.[12] 9월 26일, 노부나가는 기노시타의 계획과 전투 결과에 너무나 확신하여 전장에 진마쿠를 설치하고 최고 장교들과 회의를 열어 전투 후 성 재건과 관련된 임무를 할당했다. 그는 또한 그의 대담함에 경악한 미노 삼인방의 다이묘들을 맞이하고 사케를 대접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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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오 요시하루기노시타 히데요시와 그의 팀을 이끌고 이나바야마성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

9월 26일 밤, 기노시타는 그의 팀을 모았고, 늦여름의 더위와 다가올 노고를 염려하여 그들에게 신선한 물이 담긴 박류를 제공했다. 호리오 요시하루는 기노시타 히데요시와 소수의 습격대를 산 뒤편으로 안내했고, 그들은 보름달 빛 아래 가파른 경사면을 기어 올라갔다.[12] 새벽녘, 기노시타의 임무가 진행되는 동안, 구로다 간베에가 이끄는 주력군은 성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12][30]

새벽 이후, 기노시타의 팀은 성에 잠입하여 창고와 화약고에 불을 지른 다음, 앞문을 열기 위해 달려가 길을 가로막는 자들을 베었다.[12] 화약고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다른 건물들이 맹렬히 타오르자, 충격받고 지친 수비수들은 뒤에서 전면적인 공격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성 방어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밤샘 노고로 더러워지고 피 묻은 칼을 휘두르며 주마당을 가로지르는 기노시타의 병사들은 이러한 인상을 더했다. 병사들이 존재하지 않는 공격에 맞서기 위해 여장에서 끌려 내려오고, 다른 병사들은 무기를 던지고 항복하면서 성 수비대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기노시타의 팀이 성문에 도달하자 그들은 박류를 창에 묶어 아래의 동맹군에게 흔들어 위치를 알렸다.[23] 그러자 구로다의 보병대가 열린 성문으로 돌격하여 성 수비대의 남은 병력을 압도했다.[12] 구로다의 병사들이 마지막 저항을 진압하는 동안, 기노시타의 팀은 쉴 곳을 찾았고, 호리오 요시하루는 성의 보급품에서 가져온 커다란 사케 박을 돌려 마시게 했다.[12] 1567년 9월 27일이 끝날 무렵, 이나바야마성은 함락되었고, 미노국의 남은 영주들은 노부나가에게 공식적으로 항복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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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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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의 기후성 지도

약 2주 만에 노부나가는 광대한 미노국에 진입하여 군대를 일으키고 산꼭대기 성에 있는 사이토씨를 정복했다. 전투 후, 노부나가의 정복 속도와 기술에 경외감을 느낀 미노 삼인방은 노부나가와 영구적으로 동맹을 맺었다.[1] 노부나가는 성을 수리하고 기후성으로 이름을 바꿨다.[31] 이노구치 성곽 마을도 중국 통일 작전을 시작한 무왕이 산에서 이름을 따온 것처럼 기후로 개명되었다.[14] 노부나가는 성산 기슭에 호화로운 저택을 지었다. 그 후 그는 주요 거점과 거주지를 고마키성에서 기후로 옮겼고, 이듬해 교토시로 향하는 역사적인 진군을 시작했다. 그는 1575년 부분적으로 완성된 아즈치성으로 옮길 때까지 기후성을 주요 거주지이자 본부로 계속 사용했다.[6]

사이토 다쓰오키는 전투에서 살아남았는데, 그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최소한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다쓰오키는 최종 공격 전날 밤 성을 버리고 배를 타고 스노마타강을 따라 도망쳤다.[12]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주 성문이 뚫린 후 히데요시는 다쓰오키와 그의 일행이 궁지에 몰린 주 탑으로 사자를 보내 사이토 저항군이 항복하면 관용을 베풀겠다는 확약을 전달했다. 다쓰오키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노부나가 군대가 두 줄로 도열한 가운데 다쓰오키는 가족과 수행원들과 함께 주 탑에서 나왔다.[31] 어쨌든 다쓰오키는 결국 나가시마, 이세국으로 향했다. 그는 잠시 망명 생활을 했지만,[1] 결국 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피난처를 찾았다. 그는 1573년 이치조다니성 전투에서 26세의 나이로 전사했다.[12]

승리의 주역이었던 기노시타 히데요시의 노력은 노부나가에게 인정받았고 그의 위상도 그에 따라 높아졌다.[20] 전투 후, 기노시타는 승진하여 새로 정복한 미노국 북부의 세 개 지역 영주가 되었고,[31] 얼마 지나지 않아 하시바라는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노부나가가 나중에 그에게 야전 지휘권을 주었을 때, 히데요시는 이나바야마성에서의 성공을 기념하여 황금 박류 이미지를 그의 전장 표준으로 사용했다.[23] 시간이 지나 그는 성을 다시 도요토미로 바꿨다. 정면 공격을 이끌었던 구로다 간베에와 성 방어를 지휘했던 다케나카 한베에는 모두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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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구성

공성전 초기에 노부나가는 동맹군과 가신들의 병력을 예비대와 선봉대를 포함하여 여러 부대로 편성했다.[12]

같이 보기

  • 기후성 전투 (1600)

내용주

  1. 오와리국은 현재의 아이치현 나고야시와 그 서부 지역이다.

각주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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