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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의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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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의 기독교인은 가장 오래되고 지속적인 중요한 기독교 공동체 중 하나이다. 이라크 기독교인의 대다수는 고대 아시리아에서 유래한 토착 아시리아인이며, 다음으로 아르메니아인과 아랍 기독교인이 뒤따르며, 쿠르드족 기독교인, 샤바크인 및 이라크 투르크멘 기독교인은 매우 소수이다. 이라크의 기독교인들은 주로 시리아 기독교 전통과 의식을 따르며 동북부 신아람어 방언을 사용하지만, 투로요어도 소규모로 존재한다. 일부는 칼데아 가톨릭교인, 칼데아-아시리아인 또는 시리아인과 같이 종교적 교파와 민족 정체성의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종교적 소속(칼데아 가톨릭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 시리아 정교회, 시리아 가톨릭교회, 아시리아 오순절교회 등)에 관계없이 이라크와 주변 국가의 아시리아 기독교인들은 유전적으로 동질적인 민족이며, 고대 아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유한 역사를 가진 이 나라의 다른 집단과는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다.[1]


기독교인들은 약 2,000년 동안 현대 이라크 지역에 거주해 왔으며,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주변 지역으로 조상을 거슬러 올라간다. 위대한 족장 아브라함은 우르(현대 나시리야) 출신이며, 이사악의 아내 리브가는 아시리아(현대 이라크 북서부) 출신이다. 또한 다니엘은 그의 삶의 대부분을 이라크에서 살았고, 선지자 에제키엘은 이라크 남부 출신이며 그의 성지는 그곳에 위치해 있다. 선지자 요나와 성 게오르기우스의 성지도 그곳에 위치하며, 다른 많은 성서 선지자들과 성인들도 그곳 출신이라고 한다. 아담과 하와도 이라크 출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성서의 에덴 동산이 종종 이라크 남부에 위치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시리아 기독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설립되었으며, 이 전통의 특정 하위 집단(즉, 동방교회와 그 후계 교회)은 이라크 북부와 중남부에 설립되었다. 이는 중동과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기독교 교회 중 하나가 되었고, 동쪽으로는 인도와 중국까지 퍼졌다.[2]
1991년 걸프 전쟁 이전에는 이라크의 기독교인 수가 100만 명에 달했다.[3] 이는 1987년 인구 조사 수치에서 볼 수 있듯이 절반 정도 과소평가되었을 수도 있다. 사담 후세인은 반기독교 폭력을 통제했지만, 기독교인들은 일부 "재배치 프로그램"에 시달렸다.[3] 주로 민족적, 언어적으로 구별되는 아시리아인들은 아랍인으로 자신을 식별하도록 압력을 받았다. 이라크 전쟁 동안 기독교인 인구는 약 80만 명으로 감소했다.[3] 2013년-2017년 이라크 전쟁 동안 ISIS가 서부 지역을 빠르게 휩쓸자, 기독교인들은 이슬람 무장세력의 박해를 두려워하여 도망쳤는데, 그들은 수니 교파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처형"할 것이라고 했다.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이 바그다드로 도망쳐 피난처와 적절한 주택을 찾았고, 그들 중 일부는 이라크에서 ISIS가 완전히 패배한 후 바그다드를 새로운 영구 거주지로 선택했다.[4] 수천 명은 또한 시아파가 다수인 나자프와 같은 이라크 남부의 다른 지역으로 도망쳤는데, 나자프는 ISIS로부터 도망친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을 이슬람 성지 안에 수용했다.[5] 많은 사람들이 ISIS의 패배 후 대규모로 고향으로 돌아왔고, 니나와 평원 보호부대와 그 동맹의 보호 아래 안전하게 기독교 축제를 기념할 수 있었다.[6][7] 비영리 단체 슐라마 재단에 따르면 2024년 현재 아시리아인의 수는 14만 명 미만이라고 한다.[8][9] 더 넓은 종교적 정체성을 기준으로 하면 기독교인 수는 약간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이라크의 기독교인들은 이라크 사회에 잘 통합되어 학자, 연구원, 학자, 경제학자로서 크게 기여했다. 이라크 기독교인들은 타비트 압둘누르와 타리크 아지즈와 같이 정부의 고위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연예인, 예술가, 여배우, 가수 등 많은 인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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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요약
관점

이라크의 기독교는 서기 5세기 동방교회의 개념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으며, 이는 이라크 지역에 이슬람이 존재하기 전부터 존재했다.[10] 이라크 기독교인들은 주로 동방 고대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 아시리아 오순절교회, 아시리아 복음주의 교회, 마르 토마 교회, 칼데아 가톨릭교회, 시리아 가톨릭교회 및 시리아 정교회에 속하는 토착 아시리아인이다.[10][11] 이라크에는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동안 튀르키예에서 도피한 조상들을 둔 상당수의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도 있다.[10][11] 기독교인 인구는 1947년 55만 명(전체 인구 460만 명의 12%)에서 1987년 140만 명(추정 인구 1630만 명의 8%)으로 증가했다.[12]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후 납치, 고문, 폭탄 테러, 살인 등의 보고서와 함께 기독교인에 대한 폭력이 증가했다.[13][14][11] 이라크 전쟁 (2003-2011)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민족적, 종교적 박해로 인해 남은 기독교 공동체의 상당 부분을 고향에서 이주시켰다.[15][16][17][18][19]
초기 교회
기독교는 1세기에 사도 토마와 마르 아다이 (에데사의 아다이) 그리고 그의 제자들인 아그가이와 성 마리에 의해 이라크에 전파되었다. 토마는 열두 사도 중 한 명이었고, 전통에 따르면 아다이는 70명의 첫 제자 중 한 명이었다.[20] 이라크의 동아람어를 사용하는 아시리아 공동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동체 중 하나로 여겨진다.
아시리아인은 1세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였고,[3] 현대 이라크 북부는 1세기부터 중세까지 동방 기독교와 시리아어 문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시리아인들 사이에서 기독교는 처음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종교와 공존했지만, 후자는 4세기에 쇠퇴하기 시작했다.
7세기 아랍 이슬람 정복 이후 초기 몇 세기 동안 아시리아(일명 아투라 및 아소리스탄)는 아랍인들에 의해 지정학적 실체로서 해체되었다. 그러나 토착 아시리아인(아랍인들은 아슈리윤이라고 불렀다)은 학자이자 의사로서 이라크에서 영향력 있는 역할을 계속했다.
이슬람의 부상
히르미스 아부나에 따르면, 서기 750년 아바스 칼리파국이 수립되기 전 기간에 목축을 하던 쿠르드족은 불안정한 상황을 이용하여 페르시아 아제르바이잔에서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이동했다. 아시리아 북부 및 북동부 도시들은 페르시아 아제르바이잔의 쿠르드족에 의해 습격당하고 공격받았으며, "그들은 토착민들을 죽이고 약탈하고 노예로 삼았다"고 아부나는 말하며, 쿠르드족은 동부 아시리아의 여러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연대기 작가 이븐 하우칼은 샤라조르 지역이 황폐해진 상태에 대해 언급하며, 그곳을 "쿠르드족에게 점령당했고, 이라크까지의 주변 지역은 번성하고 있었다"고 묘사했다. 또 다른 동시대의 자료는 아디아베네 지역을 이렇게 묘사했다: "...하디압 평원은 전적으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들이 거주했지만, 쿠르드족이 그곳을 점령하고 주민들을 내쫓았다."[21]
이후 셀주크 왕조는 쿠르드족 족장과 부족의 지원을 받아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여성들을 붙잡아 노예로 삼았다. 역사가 이븐 할둔은 쿠르드족이 "모든 곳을 황폐화시키고 공포를 퍼뜨렸다"고 기록했다.[21] 시간이 지나면서 인구 변화는 아시리아와 대아르메니아의 대부분을 실질적으로 쿠르디스탄으로 만들었다.[22]
아시리아 동방교회는 현재의 튀르키예 남동부와 아소리스탄(사산조 아시리아)에 기원을 둔다. 13세기 말까지 베이징시에서 사마르칸트까지 띠 모양으로 열두 개의 네스토리우스 교구가 있었다. 이라크 북부는 14세기 튀르크몽골 전통의 이슬람 군벌 티무르가 이란, 메소포타미아, 시리아를 정복할 때까지 주로 아시리아인, 동아람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이었다. 이무르의 침략으로 민간인 인구는 격감했으며, 고대 도시 아수르는 4000년의 역사 끝에 아시리아인들에 의해 마침내 버려졌다. 티무르는 티크리트에서 7만 명의 아시리아 기독교인들을 참수했고, 바그다드에서는 9만 명을 더 참수했다.[23][24] 티무르는 쿠르드족의 지원에 대해 "그들을 황폐화된 지역에 정착시켜, 그때까지 동방교회 추종자들이 살던 곳을 주었다"며 보상했다.[25]
오스만 지배
16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충성스러운 수니 쿠르드족 부족들과 함께 동부 국경을 강화했다. 그들은 이 지역에 쿠르드족 부족을 정착시켰고, 1583년에 무라트 3세 술탄은 "모크리 쿠르드족 부족에게 거대한 주를 주었다". 아부나에 따르면, "수많은 아시리아와 아르메니아 유적지와 수도원이 있던 많은 지역은 찰디란 전투 이후 쿠르드족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었고", 쿠르드족 역사가들은 "이때 땅이 정리되었고, 토착민들은 강제로 쫓겨났다"고 기록했다. 쿠르드족 역사가 알리 알 쿠라니는 사르싱이 "아시리아 마을이었고, 그곳에 정착한 쿠르드족은 페르시아 아제르바이잔에서 온 이민자였다"고 확인했다. 피비 마르는 "북부에서도 많은 페르시아 쿠르드족 부족이 이라크로 이주했다"고 언급했다. 영국 여행자 제임스 리치는 이라크 북부에서 "페르시아에서 온 쿠르드족의 급속한 유입... 그리고 그들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관찰했다. 그는 "7만 명을 포함하는 약 1만 가구가 끊임없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사우스게이트도 그 당시 "페르시아에서 이라크 북부로 쿠르드족이 급속히 진출하고 정착했다"는 것을 관찰했다.[26] 그랜트 박사는 "베스 가르나에(아르빌-키르쿠크 지역)는 한때 많은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들이 살았지만, 지금은 몇 개의 흩어진 마을로 줄었다... 지난 6년 동안 라반두스와 아마디아의 쿠르드족이 연이어 그곳을 휩쓸었다"고 목격자 증언을 공유했다.[27] 17세기에는 바스라의 에미르 아프라시압이 포르투갈인들에게 바스라 시 외부에 교회를 건설하는 것을 허용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이라크 북부, 터키 남동부, 시리아 북동부, 이란 북서부의 아시리아인들은 아시리아인 집단학살을 겪었으며, 이는 전체 아시리아인 인구의 최대 65%에 달하는 사망자를 낳았다.[3]
아시리아인 집단학살과 전후 시대


1930년대 초, 이라크 아랍 정부는 쿠르드족에게 아시리아인 학살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전단을 배포했다.[28] 이 요청은 이슬람 신앙에 호소하여 아랍인과 쿠르드족을 "이교도" 기독교인에 대항하여 단결시켰다.[28] 1933년 8월 11일 시멜레 학살 직전, 쿠르드족은 아시리아인 정착촌에 대한 약탈 캠페인을 시작했다.[28] 아시리아인들은 시멜레로 도망쳤지만, 그곳에서도 박해를 받았다. 1933년 이라크가 공식적으로 독립한 직후, 쿠르드족 장군 바크르 시드키가 이끄는 이라크군은 이전에 영국 식민 행정을 지지했던 시멜레 시의 아시리아인에 대해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3] 일부 연구에 따르면, 많은 목격자들은 아랍인과 쿠르드족이 아시리아 여성에게 자행한 많은 잔학 행위를 증언했다.[28]
1950년대까지 니나와 평원(모술 평원이라고도 함)은 항상 칼데아인의 문화적 중심지였다.[29] 많은 기독교인들이 1933년 이후 남쪽으로 이주했다.[29] 1832년에는 기독교인의 70%가 모술 주변에 살았다.[29] 1957년에는 47%만이 남아 있었다.[29] 1958년, 이라크 왕국은 압둘 카림 카심이 이끄는 군 장교 그룹에 의해 전복되었다.[29] 이라크 기독교인들은 카심을 지지했다.[29] 그러나 1963년 쿠데타 동안 이 지역의 기독교인 인구는 더욱 감소했는데, 많은 카심 지지 및 공산주의 지지 기독교인들이 바트당의 보복을 피해 도망쳤기 때문이다.[29] 1979년까지 이라크 기독교인의 절반은 바그다드에 살았으며, 도시 인구의 14%를 차지했다.[29]
바트당 통치 하에서 기독교인들은 번영했다.[29] 그러나 주로 아시리아인으로 자신을 식별하는 기독교인들의 민족 정체성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29] 1972년 정부는 아시리아인들이 언론, 교육, 통신에서 시리아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그들의 문화적 권리를 인정했다. 그러나 이 법령은 시행되지 않았다.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부는 기독교인을 포함한 소수 민족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여러 보고서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은 아랍인 또는 쿠르드족으로 등록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 따르면, 정부 보호는 아시리아 기독교인들이 민감한 정치적 영역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보존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사담 후세인의 세속주의 정권 하에서 기독교인들은 용인되었다. 고등 교육을 받은 공동체로서 기독교인들은 효과적인 행정가, 공무원, 관료로서 유용했다.[30] 사담은 그들 중 한 명인 타리크 아지즈를 자신의 부통령 겸 외무장관으로 만들었다.[30] 아지즈는 이라크 역사상 가장 선구적인 외교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었다.[30] 교회와 대성당은 정부의 보호를 받았다.[30] 아지즈 외에도 군에서 잘 알려진 기독교인으로는 조르주 사다, 카멜 하나 게게오, 말코 하나 등이 있었다.[30] 기독교인들은 또한 정부의 보안, 대통령, 시장 부문에서도 직책을 제안받았다. 1987년 이라크 인구조사에서는 140만 명의 기독교인이 집계되었다.[30]
이라크 전쟁, 2008년~2017년 불안정 및 ISIS


2007년 6월 21일 기준으로 유엔난민기구는 220만 명의 이라크인들이 인접국으로 이주하고 200만 명이 국내에서 이주했으며, 매달 거의 10만 명의 이라크인들이 시리아와 요르단으로 도피했다고 추산했다.[31] 이 난민들과 국내실향민 중 일부는 기독교인이었다.[32][33] 2007년 5월 25일 기사에는 지난 7개월 동안 이라크 출신 중 난민 지위를 미국에서 부여받은 사람이 69명에 불과하다고 언급되었다.[34]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후 기독교인에 대한 폭력이 증가했으며, 납치, 고문, 폭탄 테러, 살인 등의 보고서가 있었다.[35] 일부 기독교인들은 죽음이나 추방의 위협 아래 이슬람교로 개종하도록 압력을 받았고, 여성들은 이슬람 복장을 착용하도록 명령받았다.[35][36]
2004년 8월, 인터내셔널 크리스천 컨선은 11명을 살해한 이라크 기독교 교회에 대한 이슬람주의자들의 공격에 항의했다.[37] 2006년, 정교회 사제 보울로스 이스칸더는 몸값 지불에도 불구하고 참수되고 훼손되었으며, 2008년에는 아시리아인 성직자 파울로스 파라즈 라호 대주교가 모술의 칼데아 가톨릭교회에서 납치된 후 살해되었다.[35] 2008년 1월, 9개 교회 밖에서 폭탄이 터졌다.[35]
2007년, 칼데아 가톨릭교회 사제 라기드 간니 신부와 부제 바스만 유세프 다우드, 와히드 한나 이쇼, 가산 이삼 비다웨드가 모두 모술에서 살해되었다.[38] 간니는 세 명의 부제들과 함께 차를 몰고 가다가 멈춰 세워져 이슬람으로 개종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들이 거부하자 총에 맞았다.[38] 간니는 모술의 성령 칼데아 교회 목사였으며 2003년 로마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 교황청 대학교에서 교회 일치 운동 신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6개월 후, 모술 대주교 파울로스 파라즈 라호의 시신이 모술 근처에서 매장된 채 발견되었다. 그는 2008년 2월 29일 경호원과 운전사가 살해될 때 납치되었다.[39]
2010년 모술에서는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신분증을 요구받고 아시리아인이나 기독교인 혈통을 나타내는 이름이나 성을 가지고 있으면 총에 맞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보도가 나왔다.[40] 2010년 10월 31일, 바그다드의 한 아시리아 시리아 가톨릭교회에 대한 공격으로 41명의 인질과 사제를 포함한 58명이 사망했다.[41] 알카에다와 연계된 그룹인 이라크 이슬람 국가는 이라크의 토착 기독교인들이 "합법적인 목표물"이라고 밝혔다.[42] 11월에는 바그다드의 기독교 아시리아인 다수 지역을 대상으로 일련의 폭탄 테러와 박격포 공격이 있었다.[42]
2014년 6월 북부 이라크 공세 동안 이슬람 국가는 7월에 통제 지역 내 모든 기독교인들이 가족당 약 470달러의 특별 세금을 지불하거나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죽어야 한다는 법령을 발표했다.[43] 그들 중 다수는 인근 쿠르드 통제 지역과 시아파 성지인 나자프와 카르발라로 피신했다.[44][45][46][47][48] 기독교인들의 집에는 아랍 문자 ن (눈)이 칠해져 있었는데, 이는 나사라(아랍어로 "기독교인" 또는 문자적으로 "나자렛 사람"을 의미)를 나타내며, 이슬람 국가의 소유라는 선언도 함께였다.[49] 7월 18일, 지하디스트들은 입장을 바꿔 모든 기독교인들이 떠나지 않으면 살해될 것이라고 발표했다.[50][51] 도망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귀중품을 도난당했다.[52][44]
수많은 기독교 민병대가 창설되어 ISIS가 점령한 영토 해방을 도운 인민동원군에 합류했다.[53] 칼데아 가톨릭 총대주교 루이 라파엘 1세 사코에 따르면, 2015년 모술에는 국가 역사상 처음으로 남아있는 기독교인이 없었다고 한다.[54] 그러나 2017년 모술 해방 이후 기독교 가정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55]
현재 상황
2003년 미국과 그 동맹국의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후, 기독교인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표적이 되었다.[56] 그들 중 많은 수가 바그다드와 다른 지역에서 쿠르디스탄 지역으로 도망쳤다.[57] 너무 가난하거나 고대 고향을 떠나기를 꺼렸던 기독교인들은 주로 아르빌의 기독교 교외 지역인 안카와로 도망쳤다.[40] 영국에는 약 1만 명의 이라크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으며, 아타나시오스 다우드 대주교가 이들을 이끌고 있으며, 그는 정부에 더 많은 난민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다.[58] 이민 외에도 기독교인 인구 비율은 무슬림 인구에 비해 낮은 출산율과 높은 사망률로 인해 감소하고 있다.[59] 이 전쟁으로 인해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이라크를 떠나게 되었다.[60]
오늘날, 2003년 110만 명에서 감소한 15만 명에서 40만 명으로 추정되는 기독교인들이 이라크에 남아 있다.[60] 전쟁은 끝났지만, 두려움과 긴장은 여전히 존재한다.[61] 많은 기독교인들이 역사적인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모술로 돌아온 가정은 거의 없다.[62][63] 2014년 ISIS의 모술 침공 10년 후, 교황청 자선 단체인 고통받는 교회 돕기가 주최한 온라인 컨퍼런스에서 아르빌의 칼데아 대주교 바샤르 와르다는 모술과 니네베에서 이라크 쿠르디스탄으로 도망친 13,200가구 중 약 9,000가구가 돌아왔지만, 기독교 공동체는 새로운 탈출을 막기 위해 여전히 국제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64]
헌법에 따라 기독교인들은 이라크에서 인정되는 종교 집단 중 하나이다.[65] 헌법은 기독교 지역에서 아람어를 공식 언어로 인정한다.[65] 기독교 교회 지도자 협의회는 기독교인들을 위한 공식 기관이다.[66] 기독교인들은 이라크의 정치 생활에 참여하지만,[67] 인구 감소로 인해 정치적 영향력은 제한적이다.[67] 헌법 제3조에 따르면 모든 이라크 공동체와 종파는 내각에 대표되어야 한다.[65] 기독교인들은 바그다드, 바스라, 모술, 키르쿠크, 다후크 선거구에서 의회에 5개의 할당된 의석을 가지고 있다.[67] 이라크에는 칼데아 민주당, 아시리아 민주 운동, 칼데아 국민 회의, 벳 나흐라인 민주당, 바빌론 운동과 같은 여러 기독교 정당 및 조직이 있다.[67] 이 정당들 중 일부는 의석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정당들은 의석을 얻지 못했다. 이라크에서 결성된 기독교 민병대는 정당, 인민동원군 또는 쿠르드 정부와 제휴되어 있다. 많은 민병대들이 여전히 이라크의 기독교 지역을 보호하며, 쿠르드 페슈메르가 또는 인민동원군 내에서 활동한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이 다수인 지역, 이라크 쿠르디스탄, 이라크 남동부의 시아파 다수 주에서 잘 통합되어 있다.[61][68] 그들은 정부 직업을 가질 수 있고, 교육에 접근할 수 있으며, 다른 시설들을 이용할 수 있고, 정치적 차별에 직면하지 않는다.[69] 바스라에서 기독교인들은 지방 의회(최고 지방 입법 및 감독 권한)에 할당된 의석을 가지고 있다.[61] 35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이 의회는 만다인보다 더 선호된다.[61] 수십 명의 기독교인들도 다양한 정부 기관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그들 중 의사들은 뛰어난 전문적 명성을 누리고 있다.[61] 그들은 자체적인 신분법을 가지고 있으며 시리아어는 이라크의 공식 언어로 인정된다.[67] 2021년 3월 5일부터 8일까지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라크를 사도 방문하여 나자프, 바그다드, 우르, 모술, 카라코시, 아르빌 도시를 방문했다.[70] 그는 알리 알시스타니 아야톨라와 만나 이라크에서 기독교인과 무슬림 간의 공존 메시지를 전달했다.
교황청 자선단체인 고통받는 교회 돕기가 2024년에 주최한 온라인 컨퍼런스에서 이라크 북부 아디아베네의 시리아 가톨릭 대주교 니자르 세마안은 사회적 파편화의 위험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라크의 문제는 우리가 각 공동체를 위한 고립된 섬을 만들려고 노력하며, 공통된 삶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험합니다. 당신은 원하는 곳 어디든 살 수 있고, 당신의 정체성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지만, 당신의 섬을 다른 사람들에게 닫지 마세요." 그는 또한 기독교인들이 이 지역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이곳 사람들은 올리브 나무와 같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베거나 태울 수 있지만, 10년 또는 20년 후에도 그들은 계속해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시도했지만, 우리는 남아 있으며, 교회로서 우리는 희망의 표시를 주기 위해 모든 것을 합니다"라고 덧붙였다.[71]
기독교인들은 많은 다른 그룹과 교파로 나뉘지만, 교파 간 결혼이 흔하며 이러한 차이는 풀뿌리 수준에서는 종종 무시된다. 제도적 수준에서는 이슬람 국가에 의한 박해 이후 교회 일치 관계가 개선되었으며, 9월에 매년 공동으로 기념하는 성십자가 현양 축일이 절정이었다. 국제 가톨릭 자선 단체인 고통받는 교회 돕기에 말하면서 칼데아 가톨릭 대주교 바샤르 와르다는 "모든 교회의 젊은이들이 함께 축제를 계획하고, 기도, 스포츠, 마라톤, 콘서트, 어린이 게임, 문화 행사를 조직했습니다. 그들의 협력은 새로운 미래의 가시적인 신호가 되었습니다. 나이든 세대는 젊은이들이 자신들을 하나로 묶는 것, 즉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자신들을 나누는 것보다 훨씬 위대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을 감탄하며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의 손에서 이라크의 기독교 연합이라는 꿈은 이미 살아있는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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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기독교인과의 관계
요약
관점
13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기독교 아시리아인들은 종교적, 민족적 박해를 겪었으며, 여기에는 다수의 학살과 집단 학살이 포함된다.[40]
2010년, 잘랄 탈라바니 대통령은 전 이라크 외무부 장관 타리크 아지즈의 사형 선고에 서명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타리크 아지즈가 이라크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동정심을 가졌다"고 말했다.[73] 이는 또한 교황청의 선고 집행 반대 요청 이후에 나온 것이었다.[74] 2015년 6월 5일, 아지즈는 나시리야의 알-후세인 병원에서 우울증, 당뇨병, 심장병, 궤양으로 고통받다가 사망했다.[75][76]
박해
이라크 기독교인들은 특히 알카에다와 ISIS와 같은 수니파 근본주의 단체에 의해 처형, 강제 이주 캠페인, 고문 및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이라크 기독교인들은 나라를 떠났고, 그들의 인구는 민주 정부 하에서 붕괴되었다.[77]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라크 쿠르디스탄이나 해외로 도망쳤다. 슐라마 재단의 인구 프로젝트는 2020년 7월 기준으로 이라크에 15만 명의 기독교 아시리아인이 남아 있으며,[78] 이는 2003년 약 150만 명에서 감소한 수치라고 추정했다.[79]
2003년에 이라크 기독교인들은 극단주의 수니파 이슬람주의자들의 주요 표적이었다. 많은 납치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포기하거나 고문을 당하도록 강요받았다.
2004년 8월 1일, 이라크의 두 도시 바그다드와 모술의 교회에서 일요일 저녁 미사 중에 일련의 자동차 폭탄 공격이 발생하여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요르단-이라크 수니파 아랍인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가 이 공격의 책임자로 지목되었다.
2006년, 정교회 사제 보울로스 이스칸더는 수니파 도시 모술의 길거리에서 몸값을 요구하는 수니파 단체에 의해 납치되었다. 그의 시신은 나중에 팔다리가 잘린 채 발견되었다.
2007년에 바그다드 남부의 역사적인 기독교 교외 지역인 도라에서 기독교인들을 쫓아내려는 작전에 대한 보고가 나왔는데, 일부 무슬림 아랍인들은 기독교인들을 미국인들의 동맹자라고 비난했다. 2007년에서 2009년 사이에 239건의 유사한 사건이 경찰에 등록되었다.[80]
2008년, 라기드 간니라는 이름의 사제가 세 명의 동료와 함께 교회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다. 같은 해, 많은 기독교 학생들이 괴롭힘을 당했다는 보고가 나왔다.
2008년, 자선 단체 바르나바스 에이드는 이라크 쿠르디스탄으로 도피한 250명의 이라크 기독교 국내실향민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여, 거의 절반이 교회나 기독교인에 대한 공격을 목격했거나 개인적으로 폭력의 표적이 되었음을 발견했다.
2009년, 쿠르디스탄 지역 정부 (KRG)는 바그다드, 바스라, 모술에서 4만 명 이상의 기독교인들이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도시로 이주했다고 보고했다. 기독교인 가족들이 이라크 쿠르디스탄으로 이주하는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이 가족들 중 11,000명은 KRG로부터 종종 고용 형태의 재정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81]
2010년 10월 31일, 수니파 이슬람주의자 단체들이 일요일 저녁 미사 중에 바그다드의 시리아 가톨릭 교회를 공격하여 60명 이상의 이라크 기독교인을 살해하고 78명에게 부상을 입혔다.[82]
2011년, 수니파 극단주의자들이 저격 소총을 사용하여 기독교인을 무작위로 암살했다. 사건 두 달 전, 다른 두 명의 기독교인이 모술에서 수니파 지하디스트에게 총을 맞았고, 또 다른 두 명은 바그다드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총을 맞았다.
2011년 5월 30일, 모술에서 한 기독교인이 수니파 남성에게 참수되었다.[83]
2011년 8월 2일, 키르쿠크의 투르크멘 지역에서 수니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가톨릭 교회가 폭파되어 23명 이상의 기독교인들이 부상을 입었다.
2011년 8월 15일, 알카에다에 의해 키르쿠크 중심부의 한 교회가 폭파되었다.[84]
2013년 11월 24일, 한 기독교 언론인이 모술에서 표적 공격으로 총에 맞아 사망했다.
2013년 12월 25일, 바그다드에서 수니파 극단주의자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기독교인들을 표적으로 한 두 발의 폭탄을 바그다드 알-라시드 지역의 알-도라 지역에서 터뜨렸다. 먼저, 주로 기독교인들이 거주하는 아토히옌 (하예 알-아토리옌) 동네 시장에서 폭탄이 터져 최소 11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나서, 성 요한 로마 가톨릭 교회 밖에서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는 신자들을 표적으로 한 폭탄이 터져 27명이 사망하고 56명이 부상을 입었다.[85]
2014년 2014년 8월 북부 이라크 공세 동안, 이라크 군이 붕괴된 통제 지역 내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ISIS는 가족당 약 470달러의 특별 세금을 지불하거나 수니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죽음을 택하라고 명령했다. 그들 중 다수는 인근 쿠르드족 및 시아파 다수 지역으로 피신했다.
2025년 4월 1일, 도끼를 든 공격자가 이라크 다후크에서 새해를 축하하는 아시리아 기독교인들의 행렬을 공격하여 3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슬람 구호를 외치고 이슬람 국가를 지지하는 이 공격자는 17세 소년, 75세 여성, 지역 보안관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 공격은 이라크와 디아스포라 출신 아시리아인들이 참여하는 연례 아키투 축제 중에 발생했다. 폭력에도 불구하고 아시리아 공동체는 회복력을 보여주며 축하를 계속했다. 지역 지도자들은 이 공격을 비난하고 극단주의를 다루기 위해 교육 과정을 검토할 것을 촉구했다.[86]
쿠르드화

많은 아시리아인 활동가들은 아랍화뿐만 아니라 이라크 쿠르디스탄, 주로 쿠르디스탄 민주당 (KDP) 통제 지역에서 쿠르드화를 겪었다고 주장한다. 아시리아 활동가들은 이라크 쿠르디스탄에 거주하는 기독교인 수가 감소했다고 주장했다.[note 1] 이라크 쿠르디스탄은 2012년부터 2016년 사이에 이라크의 다른 지역에서 도망친 20만 명 이상의 기독교인 난민과 국내실향민을 받아들였다.[90]
많은 아시리아 조직들은 쿠르디스탄 지역 정부 (KRG)가 국제 원조가 기독교 아시리아인들에게 도달하는 것을 방해했으며 때로는 아시리아 아람어 학교를 막으려 했다고 주장했다.[91] 그러나 KRG의 연례 보고서는 정부가 이 지역에 있는 20개 이상의 기독교 교회를 재건하고 개조했으며 105개 이상의 기독교 마을을 재건했다고 밝혔다.[92]
이라크 쿠르디스탄으로 국내실향민으로 도착한 아시리아인들은 KRG로부터 더 많은 권리를 요구했고, 이는 심각한 분쟁으로 이어졌다. 2014년, 아시리아 국제 통신사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라크 쿠르디스탄 지역의 기관과 정부 기관은 두 언어를 모두 사용한다. 헌법은 또한 투르크멘어와 시리아어가 해당 언어 원어민이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행정 단위에서 공식 언어라고 규정하고 있다 (법률에는 아르메니아어도 투르크멘어 및 시리아어와 함께 포함되었다). 헌법은 어떤 지역이나 주도 주민 다수가 총 국민 투표에서 이에 동의하면 추가 언어를 "지역 공식 언어"로 채택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고용을 얻기 위해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KDP 다수 지역에서 KDP에 가입해야 하며 KDP 대표가 아시리아 마을에 정착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불평하기도 했다.[91] 일부 기독교 국내실향민들은 아랍인, 쿠르드인, 이슬람주의자들이 아시리아인들이 공격에 직면하여 보호 수단이 없다는 것을 완전히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2005년 미국 국무부의 2005년 이라크 인권 보고서는 니나와 평원의 대부분 비무슬림 주민들이 1월 선거에서 투표할 수 없었으며 이라크 전쟁 동안 유권자 사기와 협박 사건이 발생했다는 보고를 공유했다. 쿠르드 보안군이 일부 기독교 마을에 투표함이 도착하는 것을 막았는데, 이는 기독교인들이 이라크 중앙 정부를 선호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보고되었다.[93] KDP 회원에 의한 기독교 아시리아 땅의 불법 토지 및 재산 압류 사례도 주장되었다.[93]
아시리아 전문가 마이클 유아쉬는 보고서에서 KRG가 모든 기독교인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KDP가 수만 명의 기독교 아시리아 가족이 아랍 지역에서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안전한 곳으로 오고 있다고 홍보하지만, "수십만 명"의 기독교인들은 (이라크)를 완전히 떠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이 "불법 토지 압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93]
2003년 이라크 전쟁 동안 쿠르드 보안군이 이라크 북부에서 일부 기독교인에게 학대를 자행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여기에는 위협과 협박부터 구금과 고문까지 포함되었다.[94] 1992년,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지지했던 아시리아인들은 북부 이라크에서 진행 중인 쿠르드화 과정에 대해 경고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쿠르드족 지도부는 잘 계획된 프로그램으로 사르산크, 바르와리 발라 등 아시리아 지역 주변에 쿠르드족을 대규모로 정착시키기 시작했다. 그들은 쿠르드족 주택 프로젝트가 몇 년 만에 기독교 지역의 인구, 경제, 시민 구조를 바꾸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기독교인들이 '쿠르드족'에게 빈집을 빼앗기면서 이주할 수밖에 없는 과정이었다."[95] 프랜시스 유세프 샤보는 아랍화 과정에서 강제 이주당한 기독교 아시리아인들의 불만과 그 마을들이 나중에 아랍인과 쿠르드인에 의해 재정착된 문제들을 다루었던 기독교 아시리아 정치인이었다.[95]
휴먼 라이츠 워치는 일부 쿠르드족과 기독교인을 포함한 소수 민족들이 토지 분쟁을 겪었다고 보고했다. 사담 후세인의 쿠르드족 표적 학살 캠페인으로 인해 많은 쿠르드족이 마을로 돌아왔지만, 그들은 안팔 작전 동안 자신들에 대한 사담의 학살 캠페인을 지지했다고 비난하는 지역 주민들(기독교 아시리아인 포함)과 심각한 문제를 겪었다. HRW에 따르면, 분쟁 중인 마을의 소수 민족들은 쿠르드 당국의 강압적인 전술, 즉 "임의 체포 및 구금, 그리고 쿠르드족의 팽창주의 계획에 저항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협박"에 희생되었다. 이러한 분쟁은 소수 민족, 특히 종교적 기독교 소수 민족을 살해하는 캠페인을 계속하는 수니파 아랍 극단주의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HRW는 쿠르드족이 니나와 평원을 정치적으로 이라크 쿠르디스탄에 편입시키기 위해, 그 지역의 쿠르드 당국이 두 가지 접근 방식을 취했다고 보고했다. 즉, 니나와 평원의 소수 민족들에게 유인책을 제공하는 동시에,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억압을 가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접근 방식이 샤바크인과 야지디 공동체가 민족 쿠르드인으로 자신을 식별하도록 유도하고, 기독교인들이 분쟁 지역의 미래에 관한 국민 투표에서 쿠르드 정부의 입장에 동조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주장한다.
쿠르드 당국은 수백만 이라크 디나르를 사용하여 친쿠르드 후원 시스템을 구축하고, 소수 공동체를 부유하게 만들고, 설립된 그룹(대부분 쿠르드 통치에 반대하는 그룹)과 경쟁하고 약화시키며 도전하기 위해 대안적인 시민 사회 조직에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소수 공동체의 호의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KRG는 또한 이라크 당국이 실패한 외부 폭력으로부터 소수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설 민병대에도 자금을 지원했지만, 이는 주로 쿠르드족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으로, 쿠르드족 지도부는 기독교 및 야지디 종교 지도자들의 금고를 풍요롭게 하고 값비싼 새로운 예배 장소를 지어 소수 종교 기관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했다.
2009년 이라크 전쟁 동안 HRW는 "KRG 당국은 분쟁 지역에 대한 의제에 대한 소수 공동체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노력에서 실제 폭력보다는 협박, 위협, 임의 체포 및 구금에 의존했다. 칼데아-아시리아 지도자는 휴먼 라이츠 워치에 쿠르드족 캠페인을 "매우 효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권이 공포를 통해 많은 인구를 통제하는 포괄적이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영향력"이라고 묘사했다."[96]
2011년 다후크 폭동 동안, 쿠르드족 급진 이슬람주의자 집단이 기독교 아시리아인, 야지디족, 비무슬림 쿠르드족의 재산을 공격했다. 공격자들은 이라크의 다른 지역에서 온 급진 성직자들의 금요 예배 설교에 의해 선동되었다.[97][98][99][100][101][102]
유아쉬 마이클에 따르면, 2008년에 페슈메르가 병력은 니나와 평원의 보안을 감독하여 KDP가 니나와 평원의 소수 민족들에게 선거에서 그들의 의지를 표현할 기회를 박탈하도록 허용했다. 그는 또한 쿠르드족이 두 명의 난민의 땅을 압류했으며 KRG는 "원주 아시리아 주민"에게 땅을 반환하도록 요구하는 어떤 법령도 시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93]
종교의 자유
2023년, 이 나라는 종교의 자유에 대해 4점 만점에 1점을 받았다.[103] 같은 해, 기독교인으로서 살기 가장 나쁜 곳 세계 18위로 선정되었다.[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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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통계

2022년,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인 수가 2003년 이전 추정치인 150만 명 미만에서 15만 명으로 감소했다고 보고한다.[105] 그러나 공식 인구 조사가 없어 그 수를 추정하기 어렵다.[106] 종교부 기독교국에 따르면 이라크에는 약 35만~40만 명의 기독교인이 거주한다.[107]
이라크 기독교인의 80%는 칼데아 가톨릭교회에 속하며, "칼데아"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는 아시리아 및 시리아 교회와 마찬가지로 주로 민족 아시리아인으로 구성된다.[108] 칼데아 가톨릭교회는 17세기 아시리아 동방교회의 분파로, 오늘날까지 일부 추종자를 유지하고 있다.[109] 이슬람이 도래하기 전에는 현재의 이라크에 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리아 기독교, 동방 정교회, 가톨릭교, 유대교 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종교를 따랐다. 이라크의 아르메니아인은 약 6만 명으로,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또는 아르메니아 가톨릭교회를 따른다. 그리스 정교회 또는 멜키트 가톨릭교회에 속하는 수천 명의 아랍계 기독교인들은 주로 바그다드에 집중되어 있다.[110] 다른 기독교인들은 주로 바스라, 모술, 아르빌, 키르쿠크, 그리고 북부 니나와 평원, 다후크, 자호 (이라크)의 아시리아 고향 지역에 거주한다.[3]
기독교 공동체



시리아 전례 교회
대부분의 이라크 기독교인은 시리아 기독교의 지부에 속하며, 그 추종자들은 주로 동시리아 전례와 서시리아 전례를 따르는 아시리아인이다.
아르메니아 전례 교회
이 교회들의 추종자들은 거의 전적으로 아르메니아인이며, 아르메니아 전례를 사용한다.
- 아르메니아 가톨릭교회
-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비잔틴 전례 교회
이 교회들의 추종자들은 멜키트로 알려진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교회 (이라크 총대주교 엑사르카테 소속)
- 멜키트 정교회 (바그다드 대교구 소속)
기타 교회 및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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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인물
정치
- 타비트 압둘누르 (1890–1957), 석유부 국장 및 기독교인 대표
- 유수프 살만 유수프, "파흐드 동지"로도 불리며, 이라크 아시리아인, 이라크 공산당의 창립자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
- 타리크 아지즈 (1936–2015), 칼데아 가톨릭교인, 사담 후세인 시대 부총리 겸 외무부 장관
- 바심 벨로 (1963–2024), 텔 케페 지구 최장수 시장.
- 바흐남 자야 불로스, 전 교통부 장관
성직자
- 아나스타제-마리 알-카르말리 신부
지식인
- 유세프 가니마
스포츠
- 아모 바바, 이라크 아시리아인 축구 선수 겸 감독
- 아유브 오디쇼, 이라크 아시리아인 축구 선수 겸 감독
- 저스틴 메람, 이라크 아시리아인 축구 선수

예술가
- 세타 하고피안, 유명한 아르메니아 가수, "이라크의 따뜻한 목소리"이자 "이라크의 파이루즈"로 불림
- 아피파 이스칸다르
- 무니르 바시르
- 린다 조지, 이라크 아시리아인 가수
- 시모르 잘랄, 이라크 아시리아인 가수
- 베아트리체 오하네시안, 이라크 아르메니아인 피아니스트
- 하이탐 유시프, 아시리아인 가수, 아랍 세계에서 "사랑의 왕자"로 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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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내용주
- 아시리아 역사가 에덴 나비에 따르면, 아시리아인과 쿠르드족의 관계는 "쓰라린 역사"로 점철되어 왔는데, 이라크, 터키 남동부, 시리아 북동부, 이란 북서부의 쿠르드족 부족장들이 기독교 부족을 정기적으로 공격하고 약탈했기 때문이다. 에덴 나비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쿠르드족이 "특히 아시리아인에게 저지른 대부분의 잔학 행위에 책임이 있었는데, 이는 근접성과 아시리아 기독교인을 약탈하고 여성과 물품을 강탈할 쿠르드족의 오랜 인지된 권리 때문이었다"고 기록하며, "쿠르드족의 확장은 아시리아인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고 썼다.[87][88][89]
각주
추가 자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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