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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남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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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李芾, ?-1276.1.18)은 자(字)는 숙장(叔章), 호(號)는 긍재(肯齋)이다.[1] 현재 호남성(湖南省) 형양시(衡陽市) 출신으로, 남송(南宋)의 항원(抗元) 명장이다. 일찍이 남안사호(南安司戶). 기양위(祁陽尉), 임안지부(臨安知府). 담주지주겸호남안무사(潭州知州兼湖南安撫使) 등의 관직을 맡았다. 담주전투 중에 전사했다.[2]
생애
요약
관점
초기 관력

이불은 어려서 총명하고 똑똑했다.[3] 또한 사람이 강직하고 아첨하지 않으며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올바르고 기민하게 일을 처리, 간사한 인물들은 그를 속이지 못했다.[4]
이불은 조상의 업적으로 일찍부터 남안사호에 임명되었고, 후에 기양위가 되었으며, 구황의 공적으로 명성이 높았다. 이불이 기양현(祁陽縣)의 지현(知縣)을 하면서, 통치를 잘한 공적으로 호남안무사의 막관(幕官)이 되었다.[5] 호남안무사 막관으로 임명되었을 때에, 이불은 영주(永州) 현지에서 장기간 항복하지 않은 도적을 성공적으로 처리하였다 이불과 참의(參議) 등형(鄧炯)은 1,300명을 이끌고 도적 장시선(蔣時選)의 소굴을 공격하였고, 장시선 부자를 생포하였으며, 잔당은 스스로 흩어져 달아났다.[6] 이불은 마침내 상담현지현(湘潭縣知縣)이 되었다. 상담현의 유력자들은 전임 지현의 관리에 훼방을 놓았으나, 이불은 이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호적을 조사하고 세금 추가 징수할 때에 이들을 피하지 않았으니, 이에 세금과 노역이 공평하게 되었다 한다.[7]
가사도에게 미움을 사다
함형(咸淳) 원년(1265), 이불은 임안부(臨安府)의 부윤(府尹)이 되었다. 당시 남송 조정은 재상 가사도(賈似道)가 정권을 장악, 전임 부윤은 모든 일을 우선 가사도에게 보고하여 실행하였다. 그러나 이불은 가사도에게 보고하지 않았으며, 또한 복왕부(福王府)에서 사람을 죽인 사건과 가사도의 집안 사람이 화공 무기를 마음대로 사용한 사건으로 인해 가사도에게 벌을 받았다. 가사도에 의해 간관(諫官) 황만석(黃萬石)으로 하여금 탐장죄(貪贓罪, 뇌물수수)로 이불을 무고하게 하였고, 이불은 부윤에서 파직되었다.[8] 사실상 이불은 평생 청렴한 관리였고 재산이 넉넉치 않았다.[9]
몽골군에 항거하다
원(元)의 몽골군이 악주(鄂州)를 공격하였을 때, 이불은 다시 기용되어 호남제형(湖南提刑)을 맡았다. 이때 호남 각 현(縣)은 도적의 소요에 시달려 백성들이 유리하였는데, 이불은 백성들을 징발하고 무장시켜 자경단을 조직하게 하였고, 민병들을 다시 형양 일대로 소집하여 방비하게 하였다. 또한 가사도의 군대가 무호(蕪湖)에서 패배하자 조정은 이불의 관직을 회복시켜 이불로 하여금 담주(潭州)를 관리하면서도 호남안무사(湖南安撫使)를 겸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 호북(湖北)의 주군(州郡)은 모두 몽골군에게 점령되었고 이불은 친구의 만류를 듣지 않고 부임하였다.[10]
덕우(德佑) 원년 7월, 이불은 담주에 도착했다. 이때 담주 군대는 모두 징발되었으나 몽골군 선두부대는 상음(湘陰)과 익양(益陽) 각 현으로 진입한 상태였다. 혼란 중에 이불은 2천명만을 소집, 이불은 유충효(劉孝忠)에게 명령하여 각 군을 통솔하게 하였다. 10월, 몽골군은 서벽(西壁)을 공격하였고, 유충효 등은 전력으로 응전하였으며, 이불은 위험을 무릅쓰고 친히 독전하였다. 부상당한 장사들에 대해 이불은 친히 안무하여 위로하였고, 매일 충의의 도로 이들을 격려하였다. 사상자 대부분은 한데 모아졌고, 사람들은 성을 올라 싸웠다. 몽골군 항복자들은 죽여서 군사들에게 보여줬다.[11]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하다
섣달 그믐날 밤, 몽골군이 성루에 올랐으나 격퇴하지 못했다. 형주태수(衡州太守) 윤곡(尹谷)은 온가족과 함께 스스로 불을 질러 죽었으며, 참의(參議) 양진(楊震)은 꽃밭 연못에 뛰어들어 죽었다.[12] 이불은 웅상각(熊湘閣)에 앉아 부하 심충(沈忠)을 부른 후에 심충에게 먼저 자신의 가족을 모두 죽여 모욕을 면하게 하였다. 심충은 거절했지만, 이불이 단호히 지시하자 심충은 울면서 승낙, 이불 전 가족을 칼로 죽이고 집을 불태웠다. 심충은 후에 집에 돌아가 자신의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다시 불이 난 이불의 집으로 와서 불에 몸을 던져 죽었다.[13] 막료(幕僚)이자 차릉(茶陵) 출신 고응혁(顧應焱), 안인(安仁) 출신 진억손(陈亿孙) 모두 자살했다. 담주 백성들은 소식을 듣고 전 집안이 자살한 경우가 많아 성에는 빈 우물이 없을 정도였으며, 혹 나무에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많았다. 오계명(吳繼明) 등이 성을 들고 투항하자, 진의(陳毅)는 포위를 뚫고 복건(福建)으로 도주하려 하였으나 중도에 전사하였다.[14]
조정에서 시호를 내리다
담주성 소식이 남송 조정에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이불에게 단명전대학사(端明殿大學士)에 증하고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불의 아들 이유손(李裕孫), 손자 이보숙(李輔叔)은 타지에 있어 죽음을 면했으며, 남송 이왕(二王)은 이들을 복건으로 불러들여 관직을 하사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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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이불의 조상은 광평(廣平, 오늘날 하북성河北省 영년현永年縣) 출신이지만 후에 개봉(開封)으로 이사했다. 고조부 이승(李升)은 진사(進士)에 합격하였으며 청렴하였다고 한다. 정강(靖康) 연간, 금(金)의 사람이 부친을 죽이려 하자, 이승은 그 앞에 가서 아버지를 보호하였고, 부자가 모두 금나라 사람에게 죽임 당했다. 증조부 이춘(李椿)은 형주(衡州, 오늘날 호남성湖南省 형양시衡陽市)로 이주했다.[16]
같이 보기
기념건물
- 형주성(衡州城) 남쪽 금오산(金鰲山)의 이불고택(李芾故宅)이 이충절공사(李忠節公祠)로 개축되었고, 이불의 부장 심충(沈忠)과 형양현령(衡阳縣令) 목연조(穆演祖)가 함께 배향되었으며, 후에 석고산(石鼓山) 남쪽 기슭로 이건되었다.[19] 1944년 형양보위전(衡陽保衛戰)에서 석고서원(石鼓書院)은 전부 일본군 비행기에 폭격되었다. 2006년, 형양시(衡陽市)가 다시 석고서원을 세우고 이충절공사도 중건하였다.[20]
- 장사(長沙) 웅상각(熊湘閣) 역시 이충절공사로 개축되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21] 그러나 지금은 천심구(天心區) 노변정소학(路邊井小學) 안에 옛터만 있다.[22]
참고자료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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