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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우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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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우리아(고대 그리스어: Ἰσαυρία)는 소아시아 내륙 내 험한 고립된 지방을 가리키는 고대 지명으로, 시대에 따라 매우 다른 범위를 띠었으나,[1] 일반적으로 오늘날 콘야주 내 보즈크르구와 그 주변 지역이나 타우루스산맥 중심지에 해당한다. 이사우리아 해안 범위는 킬리키아와 경계를 맞대고 있다.

호전적인 이사우리아 부족 및 '이사우라 팔라이아'(Ἰσαυρα Παλαιά, 라틴어 지명: 'Isaura Vetus', '구 이사우라')와 '이사우라 네아'(Ἰσαυρα Νέα, 라틴어 지명: 'Isaura Nova' '신 이사우라')라고 하는 쌍둥이 취락에서 지명이 유래했다.
이사우리아인들은 격렬한 독립성을 지닌 산악 민족으로, 마케도니아와 로마가 지배하던 시기에도 주변 지역을 약탈하며 큰 소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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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요약
관점
초기
이사우리아의 항구적 중심지는 타우루스산맥 북쪽으로, 이코니움과 리스트라의 바로 남쪽에 위치했다. 리카오니아에는 이코니아 평야가 있었지만, 이사우리아에는 구릉지대가 바로 이어졌다. 이사우리아의 토착 도시인 이사우라 네아와 이사우라 팔라이아 중 하나는 구릉지대(도리아)에, 다른 하나는 분수령 지대(젱기바르 칼레시)에 위치했으며,[1] 두 곳은 보즈퀴르 인근 북위 37°29′, 동경 32°12′ 부근에 자리한다.
기원전 4세기에, 이사우리아는 이사우라 팔라이아와 칼리카드노스강 발원지 주변의 험한 산악 지대를 일컬었다.[1] 중심 도시이자 타우루스산 아래 강력히 요새화 된 도시인 이사우라(Isaura, 이사우라 베투스 또는 이사우라 팔라이아로 알려짐)가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마케도니아의 섭정 페르디카스에게 포위되었을 때, 이사우리아인들은 점령되드니 차라리 그곳에 불을 질러 불길 속에서 파괴되도록 내버려 두었다.[1][2]
로마 지배기

로마인들이 처음으로 이사우리아인들과 접촉했을 때 (기원전 1세기 초), 로마인들은 킬리키아 트라케아를 이사우리아의 일부로 여겨서, 이사우리아는 지중해까지 범위가 확장되었으며 따라서 이 범주의 이사우리아가 두 세기 동안 흔하게 사용되었다. 칼리카드노스 유역 전체가 이사우리아의 일부로 인지되었고, 칼리카드노스강의 남쪽 지류에 있던 도시들은 이사우리아 데카폴리스를 형성하였다.[1]
이사우리아인들은 일부가 로마인들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기원전 76–75년). 로마가 킬리키아 및 다른 해적들과 전쟁을 벌이던 때, 이사우리아인들의 해적 활동이 너무나 활발하여 프로콘술인 P. 세르빌리우스는 이사우리아인들의 바위 투성이 본거지로 추적하여 이들 전부를 복속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았고, 이를 이룩함으로써 그는 이사우리쿠스 (Isauricus)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기원전 75년).[1]
서기 6년에 카시우스 디오는 이사우리아인들이 아시아 속주를 돌아다니며 약탈을 벌이다가 전면전에 돌입하게 되어 패배했다고 언급했다.[3]
이사우리아인들은 이후 갈라티아의 왕 아민타스의 지배 시기를 겪었지만 이들은 약탈 행위 및 사실상의 독립 유지를 이어나갔다. 3세기에 이들은 황제 자리를 두고 반란을 일으킨 트레벨리아누스를 숨겨주었다.[1]
4세기 초에 킬리키아 전역은 행정적 이유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명에 따라 타우루스산맥 불쪽에서 분리되었다. 처음에는 '이사우리아 리카오니아'(Isauria-Lycaonia) 이후에는 '이사우리아'라고 불린 속주는 갈라티아 경계까지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타우로스 산맥을 넘어가지는 않았다. 일부가 이사우리아와 같은 속주 속해 있던 피시디아도 분리되어, 이제 이코니온을 포함하는 행정 구역으로 재편되면서 이사우리아는 팜필리아 동부 지역과 합해졌다.[1] 셀레우키아 메트로폴리스의 해안 지역은 이사우리아 속주의 중심지로 지정되었다.[4]
4세기에도 여전히 이사우리아인들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게 소아시아의 인접한 속주들의 재앙으로 묘사되었고, 서기 404년에서부터 409년에 걸친 연속된 대규모 약탈이 벌어졌는데, 이 중에는 이들을 뿌리 뽑으려는 동로마의 사령관 아르바자키오스가 이끈 토벌 활동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이들이 복속된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제위 때라고 한다.
일부 비잔티움 황제들이 이사우리아 혈통이었으며 이사우라 현지식 인명이 타라시코디사 루숨블라다디오테스(Tarasicodissa Rousoumbladadiotes)이었던 제논, 그의 아들 레오 2세 및 695년부터 698년까지 재위한 레온티오스 등이 있었다.[a] 비잔티움 제국은 이사우리아인들을 병사와 장군으로 기용했고 어느 시점에서 이사우리아인들은 황제의 개인 경호대인 엑스쿠비토레스가 되기도 했다.[4] 하지만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은 이사우리아인들을 야만인으로 여겼고,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이사우리아 반란군과 오랜 기간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이사우리아 전쟁, 492년–497년).
이후
이사우라 팔라이아의 유적지는 이곳의 뛰어난 위치, 요새 시설, 무덤으로 유명하다. 이사우라 네아의 유적지는 사라졌지만, 도를라의 저택에 설치된 다량의 비문 및 여러 석비 등이 이곳이 이사우라 네아임을 증명한다. 세르빌리우스가 식수 공급을 차단하며 복종시킨 도시는 후자가 아닌 전자의 도시이다. J. R. S. 스터릿은 1885년에 이사우리아 고지대를 탐방했으나 철저하게 이뤄지지는 못 했다. 이곳 유적지는 1901년에 W. M. 램지를 통해 확인되었다.[1]
램지는 대개 기독교 내용을 담은 50개 이상의 그리스 그리스 비문을 비롯해 장엄한 묘지 유적들을 발견했다.[5] 이 기념물들은 3-5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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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바울이 당시 이사우리아에서 유일한 로마 식민지였던 클라우디오폴리스에서 전도 활동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7]
이사우리아 교회는 본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관할 하에 있었으나 7세기 말이나 8세기 초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관할로 편입되었다.[4]
451년경의 인물 아이티우스[8]가 비문에서 이사우로폴리스와 이사우라 팔라이아의 주교로 기록되어 있지만, 노티티아 에피스코파투움에서는 이사우라나 이사우로폴리스가 전혀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9] 램지는 이사우라 노바 교구가 초기부터 레온토폴리스 교구와 합쳐졌다고 추정하며 레온토폴리스는 이사우라 팔라이아의 보다 최근 명칭으로, 모든 노티티아(Notitiae)’에 언급되어 있다.[6]
비교 관점
이사우리아의 호전적 평판은 동로마 제국의 체제에 이용되었고, 이사우리아의 많은 사람들이 제국의 병력을 채우기 위해 모집되었다. 역사가 Gang Hao Poh가 전하길, 이사우리아인들의 이야기는 후한 시기 장패의 태산군과 많은 유사성을 담고 있다. 두 집단 정체성 모두 전투 능력 및 내전 시기 제국 내 여러 파벌이 그들의 능력과 인원을 활용하고자 했던 욕구와 분리될 수 없었다. 삼국 시대 이른바 도적 연합체와 마찬가지로, 이사우리아인들과 이들의 산악 요새는 이사우리아 지역의 정치화가 산지가 저항과 문명의 지속적인 은신처로 기능했던 사실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음을 증명해주었다. 제국 내 영토를 상당 부분을 나눠가진, 이사우리아의 산악 군주들과 반란군은 자신들의 황무지를 완전히 굴복시키기에는 제국이 무능력했기에 자신들의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사우리아의 산악 지역은 비잔티움 제국의 직접적인 지배권에서 벗어나게 한 핵심적 요소이었다.[10]
각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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