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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

신라의 승려 (?–527)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이차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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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異次頓, 506년(지증왕 7)[1] ~ 527년(법흥왕 14)[2] 9월 15일(음력 8월 5일[3][4]))은 신라 법흥왕(法興王)의 근신이자 불교 순교자이다. 거차돈(居次頓)이라고도 하며, 《삼국유사》에는 염촉(厭觸 또는 猒觸), 이처(伊處), 처도(處道)라는 다른 이름 표기도 소개되어 있다. 신라의 불교 전래 과정에서 있었던 재래 종교와의 갈등을 상징하는 인물로 한국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꼽힌다.

간략 정보 이차돈, 법명 ...

이름

'염(厭)·이차(異次)·이처(異處)'가 중세어 '앛-(싫어하다)'의 원형인 '잋-'의 차자표기라고 주장한 양주동(1947)의 견해[5]는 후대 연구자들에게 지지와 비판을 받으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관련 연구자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언어학적 비판

  • 이기문(1998)은 잋의 음소 변화 없이 새김만 고대어 '싫다(厭)'가 중세어 '피곤하다(困)'로 연신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6]
  • 도수희(1998)는 이차돈의 자(字) 염촉(厭髑)의 '厭(싫어하다)'와 '잋다(피곤해하다)'의 새김 불일치와 '잋'이 '아쳗'으로 변형될 수 없는 점을 비판하여 음가는 '이쳐도'이고 중세어 '아쳗(싫어하다)'의 원형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7]
  • 김지형(1998)은 도수희의 '아쳗-'에 동의하지만 인명표기가 동사 형태인 점을 비판하여 '읻(싫어하는)'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8]

이름(字)의 부정적 의미에 대한 비판

  • 양주동 스스로 이후(1965) 자신의 견해를 '잋(싫어하다)'에서 '읻(곱다ㆍ좋다)'으로 수정하였다.[9]
  • 강헌규(1988)는 이를 수용·보완하여 ‘읻~, 이대, 이ᄃᆞᆫ’으로 해석하였다.[10]
  • 한연석(2015)은 한자 '猒'의 본래 뜻이 "싫도록(실컷) 먹다"라는 점을 근거로 '이쳐도ㆍ이ᄎᆞ도'가 원래 '美'의 긍정적인 의미였으나 중세어 '싫다'로 연신되었다는 한문학적 견해를 제시하였다.[11]
  • 조경철(2024)은 '구하다ㆍ사랑하다' 등을 뜻하는 범어 'icchā를 '선한사람ㆍ좋은사람'으로 의역한 것이 '염촉(厭觸)'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12]

고슴도치 설

  • 이병도(1999)는 '‘猒'의 정자(正子)가 '猬(고슴도치)'이며 이차돈은 신라어로 고슴도치를 의미하는 '이츠도치'라는 주장을 하였다.[13]
  • 강헌규(2000)는 '猒'만 고슴도치로 해석할 수 있고 음가도 '이츠'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14]

‘頓, 髑, 道’ 등은 일연이 말한 것처럼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로 보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한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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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의 이차돈

『삼국사기』[16]에는 불교를 공인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김대문의 『계림잡전』(鷄林雜傳)을 인용하여,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할 당시 대신들[17]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고[18] 이때 이차돈이 나서서 불교를 공인할 것을 적극 주장하며[18] 자신을 죽임으로서 왕의 위엄을 세우고 신하들의 반대를 가라앉힐 것을 청했다.

이에 왕은 대신들을 모아 놓고 불교를 공인할 지의 여부를 의논하였고, 대부분의 대신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이차돈이 나서서 찬성하였다. 왕은 대신들이 모두 반대하는데 이차돈 혼자서 찬성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그를 처형할 것을 명했다. 이차돈은 죽기 직전에 "부처께서 계신다면 내가 죽은 뒤 이적(異蹟)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그의 목이 베여 떨어지는 순간 붉은색이 아닌 흰색의 피가 한 길 넘게 솟구쳤고, 하늘이 컴컴해지면서 꽃비가 내렸다. 대신들은 이후 불교를 받아들이는 것에 어떠한 반대를 하지 못했고,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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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이차돈

《삼국유사》권제3 흥법(興法)제3 '원종흥법염촉멸신'조는 헌덕왕(憲德王) 9년(817년)에 작성된 《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과 《향전》의 두 가지 자료를 인용하였다. 불교를 공인하고자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친 법흥왕에게 사인(舍人) 염촉이 나아가 "거짓 명령을 전한 죄를 물어 신을 형벌에 처하여 목을 베시면 만백성이 모두 복종하여 감히 하교를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청했다. 왕은 염촉의 말대로 온갖 형틀을 갖추어 놓고 신하들을 불러 "과인이 절을 짓겠다는데 왜 일부러 늦추느냐?" 라며 꾸짖었고, 신하들은 겁에 질려 그런 일이 없다고 변명했다는 기록과 함께, 주석으로 처리된 《향전》에는 거꾸로 염촉이 왕명을 내세워 절을 지으라는 뜻을 신하들에게 전하자 신하들이 달려와 왕에게 반대하고 나섰고 왕은 염촉이 왕명을 거짓으로 전달했다며 염촉에게 책임을 물었다고 전하고 있다.[19]

왕은 염촉을 불러 꾸짖은 뒤 처형했고, 염촉은 죽음을 앞두고 "대성법왕(大聖法王)께서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시므로 나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세상의 인연을 버리오니, 하늘은 상서로움을 내리시어 사람들에게 두루 보이소서"라고 맹세하였다. 그의 베어진 목에서 흰 젖이 한 길이나 솟구치고 하늘은 어두워지면서 석양이 그 빛을 감추었고 땅이 흔들렸으며 비가 떨어지는 등 온갖 자연현상들이 일어났으며, 베어진 염촉의 시신은 북망산 서쪽 고개에 묻히고 아내가 그의 명복을 위해 자추사를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 자추사가 세워진 땅은 《향전》에 따르면 염촉의 목이 베여 날아가 떨어진 자리였고, 자추사는 훗날 백률사(栢栗寺)라 불리게 되었다.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에는 흥륜사(興輪寺)의 금당에 신라 불교의 성인 10인의 소상이 동서 벽에 안치되었는데, 동쪽 벽에 서쪽으로 보도록 안치된 다섯 상 가운데 하나가 염촉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흰 피

이차돈이 순교할 때 목에서 붉은 피가 아닌 흰 피가 뿜어져 나왔다는 기록에 대해서는 당시 ‘이차돈 순교비’ 제작에 참여한 이들이 『현우경』[a]의 ‘찬제파리품 본생담’ 혹은 『부법장인연전』의 이야기를 차용하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20] 찬제파리품은 두 손·두 다리· 양쪽 귀·코가 잘린 곳에서 흐르던 피가 흰 젖이 되었고 상처는 씻은 듯이 회복되는 기적을 서술하고 있다. 『부법장인연전』에서는 사자(師子)라는 비구가 목을 베인 자리에서 흰 젖이 솟구쳤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차돈의 가계

이차돈의 가계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왕족인 것으로 추정되며, 성씨는 김씨라는 설과 박씨라는 설이 존재하며, 김씨 설에 의하면 내물왕(재위: 356년 ~ 402년)의 아들 습보 갈문왕(생몰년 미상)의 후손이고, 박씨 설에 의하면 흘해왕(재위: 310년 ~ 356년)의 후손이 된다.

  • 증조부 : 흘해 이사금
  • 조부 : 공한(功漢)
  • 아버지 : 길승(吉升)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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