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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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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만큼 해상을 활동 기반으로 삼는 세력 집단이 형성되기 쉬운 환경을 갖추었다.

역사

요약
관점

고대

일찍이 열도의 여러 지역에서는 배를 이용하여 해상을 장악하는 세력들이 등장했는데,[1] 이웃한 한국과 마찬가지로 고대부터 연해 지역에 거주하는 아마비토(海民)라 불리던 바닷가 주민들이 수상 병력으로써 활약하였다.

고대 야마토 정권에서 일본의 수군은 아즈미베(安曇部)나 아마베(海人部), 쓰마모리 씨(津守氏) 같은 해상 씨족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국가의 배후에 오사카 만(大阪灣)이나 세토 내해(瀬戸內海)가 있었고, 기 강(紀ノ川) 유역의 기 씨(紀氏)처럼 세토 내해로 나가는 천연 항구를 가지고 배후에는 선박을 제조할 수 있는 목재 산지를 확보한 대호족들이 독자적인 수군을 편성하여 활약하기도 하였다.

일본 열도의 국가 권력은 이러한 세력들을 통제하고 국내 여러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선박을 확보하고 수상의 군사력을 운용하였다. 또한 해외로부터의 물리잠깐 위협을 막거나 군사적인 대외 진출을 꾀하기 위해서도 수상 군사력이 필요했다. 수군은 이처럼 국가 권력에 의해 동원 내지 편성되는 수상 군사력을 가리키며, 일본의 수군은 일본사를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일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 발생한 수전과도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연구 대상이라 하겠다.[1]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에 이르러 세토 내해에서 수상으로 운송되는 관물을 강탈하는 '가이조쿠'(海賊)의 존재가 일본 역사에 등장하는데, 초기에는 해상에서의 약탈 행위를 주체로 하는 소규모 집단의 수준을 넘지 못했지만, 헤이안 시대 후기에 이르면 현지 유력자가 힘을 키워 육지에서 장원(莊園)을 개발한 영주가 무예를 가지고 가업으로 물려주며 무사라는 조직으로 성장한 것처럼, 해상에서도 수상 무장력을 불려 대물림하는 형태로 무사 조직이 성장했고 이들은 훗날 '수군'이라 불리게 되었다.

셋쓰국(攝津國) 와타나베 진(渡邊津)을 본거지로 세토 내해 수군계 씨족의 도료(棟梁)가 되었던 와타나베토(渡邊党)와 그 일족으로 13세기 여몽연합군에 맞선 규슈(九州)의 마쓰라토(松浦党), 10세기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 추토에 이요(伊予) 수군을 거느리고 활약했던 다치바나노 도야스(橘遠保), 호겐의 난 이후 센고쿠 시대까지 동쪽의 시와쿠(塩飽) 제도에서 서쪽으로는 호슈(防州) 가미노세키(上關)까지 장악한 무라카미 씨(村上氏)의 무라카미 수군이 대표적인 수군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슈(紀州) 방면에서는 벳토 씨(別當氏)로 대표되는 구마노 수군(熊野水軍)이 있어 단노우라 전투에서 활약하였고 이후 이들은 구키 수군(九鬼水軍)으로 이어졌다. 이밖에 아키(安藝)의 고바야카와 씨(小早川氏), 이요의 오치씨(越智氏)와 고노씨(河野氏), 미우라반도(三浦半島)의 미우라 씨(三浦氏), 쓰가루(津輕)의 안도 씨(安東氏) 등이 육지에서 무사들이 등장한 것과 동시대에 연해 토호로서 수군을 끼고 가이조쿠추(海賊衆), 즉 해적으로서 활약하게 된다.

중세

중세 일본 해변의 소규모 토호들이 결합된 군사력이 가이조쿠추로 성장한 것은 규슈나 세토 내해, 기이반도, 이세만(伊勢灣), 도쿄만(東京灣) 등 일본 각지에 보인다. 육지의 악당(惡党)처럼 무리를 지어 약탈 행위를 벌이고, 바다를 오가는 여러 해상세력을 상대로 주요 관문을 점거하고 통행세를 걷으며 막부(幕府) 등의 공권력의 통제도 무시한 채 해상에서 독립된 군사력을 행사했으며, 14세기에 남북조 동란에도 이들은 각기 남조와 북조의 편에 서서 대립하였다.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의 슈고 다이묘(守護大名)는 주변의 가이조쿠추를 영내의 전답을 경고료(警固料) 명목으로 지급하고 그들을 끌어들여 게고추(警固衆)로 편성해 해상 군사력으로 이용했다.

센고쿠 시대에는 군사력 등의 관점에서 센고쿠 다이묘(戰國大名)의 편에 서서 적극적인 수군 편성에 나서서 게고추를 육상의 토호나 고쿠진(國人)처럼 가신 집단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또한 농촌 지역에서도 수군을 동원했는데, 오다와라의 고호조씨(後北條氏)는 사가미 다우라(相模田浦)나 무사시 혼모쿠(武蔵本牧)의 어민에 대해서 가쓰후네(葛船)라 불리는 대형 고깃배로 조업하는 것을 허가하여 어업상 특권을 주는 대신 유사시 그들을 수군으로 동원하였다. 이들은 평소에는 어업에 종사하다가 고호조 씨의 필요에 응하여 수산물을 상납할 의무가 있었고, 어민과 수군이라는 양면성을 지녔다. 당시 대량의 해산물은 신선한 상태로 유지하기 곤란했는데 고호조 씨는 가신단이나 타국에서 온 사자나 객인에게 상납된 수산물로 향응했고, 그 가공품은 외교상의 증정품으로서 정치력 확대를 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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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키 수군의 본거지였던 도바 성(鳥羽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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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케부네(安宅船)

센고쿠 시대 말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시마(志摩)의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를 신속시키고 구키 수군을 주체로 하는 수군을 편성했다. 이들은 나가시마(長島)에서 일어난 잇코잇키(一向一揆) 정벌이나 이시야마 전투에서 활약하고 노부나가 사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아래에 들어갔으며, 아와지(淡路)나 시코쿠(四國)를 영유하고 그 연해 영주로서 센고쿠 히데히사(仙石秀久),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등의 무장을 파견해 다스리게 했으며, 규슈 정벌이나 오다와라 공격에도 참가하였다. 센고쿠 시대 후기부터 에도 시대(江戸時代) 초기에 걸쳐 안택선(安宅船)이라 불리는 수십인에서 수백인을 태울 수 있는 대규모 전함을 보유하고 대규모 해전을 행했다.

규슈 정벌 이듬해인 덴쇼(天正) 16년(1588년) 7월 8일(양력 8월 29일), 히데요시는 도검 수거령과 함께 해상 적선 금지령(海上賊船禁止令)을 내리고 가이조쿠추의 재원이 되던 해상 관문에 대한 해상 호족들의 통행세 징수나 히데요시의 허가가 없는 해외 무역 활동을 금지하였으며, 무라카미 수군의 노토 씨(能島氏)는 모리 씨(毛利氏)의 가신이 되어 모리 수군을 이끌게 되었고 히데요시에게 직접 복속된 구루지마 씨(來島氏)는 히데요시 직속의 다이묘로서 도요토미 씨를 위한 수군을 부담할 것을 명받는 등 가이조쿠추는 도요토미 씨를 정점으로 하는 다이묘 권력의 수군 재편성을 강제당했다. 이렇게 편성된 도요토미 수군은 1592년 조선 침략에 대규모 투입되기에 이른다.

근세

에도 막부에서는 막부나 해변에 영지를 거느린 다이묘들이 후네데구미(船手組), 후네데가타(船手方), 후네데추(船手衆)라 불리는 수군을 보유했고, 막부에는 무카이 씨(向井氏), 조슈번(長州藩)의 노지마 씨(能島氏), 오와리번(尾張藩)의 지카 씨(千賀氏)처럼 가이조쿠추의 먼 후예들이 세습을 유지했다. 그러나 전쟁이 사라지고 오랜 평화 시대가 계속되면서 영내의 해상교통을 관리하고 영내 순찰이나 산킨코타이(參勤交代) 등 다이묘의 선박을 이용한 여행에서 배를 내는 정도의 역할에 그쳤다.

도요토미 씨와는 달리 해외 진출에 소극적이었던 도쿠가와 씨는 대형 선박 건조를 금지하고 여러 다이묘에게도 군함을 만들지 못하게 하였으며, 구루지마 씨를 분고 모리(豊後森), 구키 씨를 셋쓰 미다(攝津三田)로 옮기는 등 수군계 다이묘들을 차차 내륙으로 이주시켜 바다와 단절시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자신은 다섯 개 구니를 영유하던 시대부터 이마가와 씨(今川氏), 다케다씨(武田氏)의 수군을 이어받은 무카이 씨나 고하마 씨(小浜氏), 지카 씨, 나카미야 씨(間宮氏) 등의 도쿠가와 수군을 편성했고 이들은 에도에 거점이 마련된 뒤부터 간토(關東)로 옮겨 그대로 에도 막부의 수군이 되었다.

막부 수군의 거점은 미우라 반도의 우라가(浦賀)와 에도의 니혼바시(日本橋)에 설치되었고, 1631년에 건조된 쇼군(將軍)의 어좌선(御座船) 아타케마루(安宅丸)를 비롯한 대형 선박을 보유하였다. 그러나 쇄국 정책과 함께 막부 함대도 축소되고 노령화를 이유로 아타케마루도 해체, 본격적인 수군은 일본에서 소멸하였다.

막부 말기에 이르면 서구 열강을 본떠 막부나 여러 번에서 근대적인 함대 창설을 추진했으며, 이때에 이르러 일본에서 처음 해군(海軍)이라는 용어가 쓰이게 되어 수군이라는 이름은 과거로 사라진다. 그러나 막부 말기의 해군 창설기에는 수부(水夫)를 편성할 인원은 과거 수군이 존재하던 지방 출신이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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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수군' 용어의 활용

일본의 문헌사료상에서 나타나는 수군 관련 용어의 사례를 찾아보면 우선 육국사 가운데 《일본서기》에서는 '舟師' 또는 '船師', 일본어로 '후나이쿠사'라는 표현을 확인할 수 있으며, 숙신[2]과 당군[3]을 가리키는 일부 용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본측 병력에 해당한다. 이후 《속일본기》에 '船師', 《일본삼대실록》에 '水軍'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정도이고, 그밖의 사료에서도 '선사', '수군' 등의 표현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중세에는 해안 지역을 본거지로 수상 활동을 벌이던 소규모 세력들을 '가이조쿠'(海賊) 또는 '가이조쿠슈'(海賊衆)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센고쿠 시대 무렵에는 유력 다이묘들의 해상 군사력으로 편성되고, 임진왜란 때에도 일본의 수군 병력으로 참전하기도 하였다.

수군이라는 말은 에도 시대에 들어서 다시 본격적으로 등장한 듯한데, 에도 시대의 군학자(軍學者)들이 중세 가이조쿠들에게 화려한 활약을 벌인 '수군'이라는 허상을 덧씌우게 되었고, 이 시기부터 중세 가이조쿠들을 가리켜서 '수군'이라는 단어가 쓰이게 되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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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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