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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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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감영(全羅監營)은 조선시대의 8개 도(道) 가운데 하나인 전라도의 행정, 사법을 담당하던 관찰사가 근무하던 곳이다. 오늘날의 도청(道廳) 소재지 및 도청 건물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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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392년(태조 1년) 조선왕조 성립과 동시에 전주에 전라감영이 설치되었으며, 1895년(고종 32년)에 23부제가 실시될 때까지 약 500년간 존속하였다. 1895년에 23부제가 시행되자 전주부 관찰부로 개편되고 1896년에 13도제가 시행되자 전라북도의 최고 관청으로 활용되었으며,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도청(道廳)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중심 건물인 선화당은 도청의 부속 건물 용도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 시기인 1951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호남의 으뜸도시로서 전주의 역사성을 회복하고 원도심의 활성화를 위해 2005년 전북특별자치도청이 신도심으로 이전하면서 전라감영 복원 논의가 본격화 되었다. 2015년 구 도청사 철거를 시작으로 감영 복원이 시작되었고, 2020년 10월에 1단계 사업을 완료하고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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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영 건물
감영 인근 시설
복원된 건물 현황
- 연신당(燕申堂) : 관찰사의 업무 공간
- 내삼문(內三門)
- 내삼문은 전라감영 선화당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전라감영의 정문 포정루로 들어와 중삼문을 거쳐 내삼문을 지나면 전라감사의 집무처 선화당이다. 내삼문은 솟을삼문 형태로 이 칸에서 협칸, 퇴칸에서 지붕의 높이가 낮아지는 형태이다. 1884년 11월 11일에 전주를 방문한 미국 임시 대리공사 George Clayton Flouk는 포정루에서 150피트 정도에 첫 번째 대문(중삼문으로 추정)과 직각으로 100피트 정도에 두 번째 대문(내삼문으로 추정)이 있다라고 기록하였다.
- 통인청(通引廳)
- 통인은 전라감사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담당했기 때문에 선화당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다. 동짓날에는 통인청에서 대사습놀이가 열려 전국에서 소리꾼들이 모여 서로의 기량을 뽐냈다.
- 영고(營庫)
- 감영의 돈과 식량을 모아두는 창고이다. 영고의 북쪽에는 의국이 있었는데, 의국은 지방 사족을 뽑아 심약을 도와 진상 약재의 관리 뿐 아니라 지역민들을 위한 처방이나 약물 제도 등을 편성하였다.
- 비장청(裨將廳)
- 비장청은 전라감사의 사적 보좌관인 비장들의 집무소이다. 비장은 그 업무상 감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비장청은 감사의 영역과 가깝게 배치되었다. 《완산부지도》에 비장청은 감영 내아 평면과 유사한 ‘ㄷ’자형으로 그려져 있다. 발굴조사 결과 비장청과 관련된 적심시설이 남아 있지 않아 복원하지 않고 터만 표기하였다.
- 가석(嘉石)과 폐석(陛石)
- 가석은 섬돌 아래 왼쪽(동편)에 설치하여 죄인들로 하여금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 표석이고, 폐석은 오른쪽(서편)에 설치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억울함을 하소연하게 하는 신문고 같은 표석이다. 가석과 폐석은 감영의 사법적 기능을 보여주는 것으로, 감사로 하여금 백성들을 덕으로 교화하여 깨우치게 하고 재판을 공정하게 하여 억울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법을 다루는 형조의 섬돌 아래에도 가석과 폐석이 있다. 주례에 따르면, 가석은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돌로 잘못을 저지른 자들이 이를 보고 뉘우치고, 폐석은 붉은 돌로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이 돌 옆에 서 있으면 억울한 일을 해결해 준다고 하였다.
- 선화당(宣化堂)
- 선화당은 전라감사의 집무처이다. 선화당이라는 당호는 '왕명을 받들어 교화를 펼친다'는 승류선화(承流宣化)에서 나온 말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그 이듬해 1598년 전라감사 황신이 중건하였으며, 1777년 전라감사 윤동승이 재건하였다. 이후 1792년 화재로 소실되어 전라감사 정민시가 다시 중견하였다. 선화당은 광복 후까지도 남아 있었으나 한국전쟁 도중 1951년 경찰청 무기고로 쓰이던 도청 문서고에서 로케트탄이 폭발하여 도청 본관과 함께 소실되었다. 선화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로 약 78평에 달하는 큰 건물이며, 전주부 성내에서 객사 다음으로 컸다.
- 전라감영 선화당은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동학농민군의 염원을 엿볼 수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은 정부에 폐정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이를 수용한 조선 정부는 전라감사 김학진을 통하여 전봉준과 이곳 선화당에서 전주화약을 맺었다. 이후 전라도 일대에 동학농민군 자치조직인 집강소가 설치되었고, 이를 총체적으로 관리·감독하기 위한 대도소가 선화당에 세워졌다. 선화당은 민관상화의 기치를 내걸고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최초로 실현된 상징적인 곳이다.
- 측우기와 측우대
- 관풍각(觀風閣)
- 관풍각은 선화당에 이어 감사가 정무를 처리하는 제2의 정청이며, 감사가 쉬기도 하고 연희의 장소로도 사용했다. 관풍각이라는 이름은 감사의 직무인 '풍속과 민정을 살핀다'는 관풍찰속(觀風察俗)에서 유래하였다. 선화당과 관풍각 당호는 감사의 직무를 상징적이고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 선정비(善政碑)
- 선정비란 선정을 베푼 관리들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그렇지만 조선 말에는 선정비들이 으레 세워졌고 억지로 세워지기도 하였다. 조선 말에는 전라감영 건너편에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가 다가공원 쪽으로 옮겨졌으며 2020년 감영을 복원하면서 감영 경내로 이전하였다. 관찰사 15기, 판관 5기, 중영장, 별장, 영의정, 암행어사 각 1기로 총 27기의 선정비가 있다.
- 내아(內衙)와 행랑
- 내아는 전라감사 가족들이 거처하는 안채로 선화당 북쪽에 위치하였다. 19세기 《완산부지도》에 내아가 ‘ㄷ’자형 건물로 그려져있다. 발굴조사에서 3동의 건물이 중첩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3차례 개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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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 정문
- 선화당
- 비장청 터
- 연신당
- 관풍각
같이 보기
외부 링크
위키미디어 공용에 전라감영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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