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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

에드바르 뭉크의 연작 중 하나인 표현주의 그림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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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노르웨이어: Skrik, 독일어: Der Schrei der Natur, 영어: The Scream of Nature; 1893-1910년 작[1])는 노르웨이의 예술가 에드바르 뭉크표현주의 연작 중 하나이다. 그림 속 고뇌하는 얼굴은 실존주의적 불안함의 심오한 경험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지며, 예술에서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 중 하나가 되었다. 절규를 포함한 뭉크의 작품은 표현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2]

간략 정보 절규, 작가 ...

뭉크는 해질녘 산책을 나갔을 때 갑자기 지는 해의 빛이 구름을 "피처럼 붉게"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자연을 통과하는 무한한 절규"를 느꼈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 장소가 오슬로를 내려다보는 피오르 길에 있음을 밝혔고(북위 59° 54′ 02.4″ 동경 10° 46′ 12.9″), 비정상적으로 주황색을 띠는 하늘에 대하여 화산 폭발의 영향부터 뭉크가 근처 정신병원에 수감된 누이에게 느낀 심리적 반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다.

뭉크는 두 가지 회화 버전과 두 가지 파스텔 버전을 만들었으며, 석판화도 제작하여 몇 점의 판화가 남아 있다. 두 회화 버전 모두 공공 박물관에서 도난 당했지만 회수되었다. 2012년에는 파스텔 버전 중 하나가 당시 공개 경매에서 명목상 미술품 최고 가격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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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의 원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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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 뭉크, 1921

뭉크는 1892년 1월 22일 "니스"라는 제목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어느 날 저녁 길을 걷고 있었는데, 한쪽에는 도시가, 아래에는 피오르가 있었다. 피곤하고 아팠다. 멈춰서 피오르를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고, 구름이 피처럼 붉게 변하고 있었다. 비명이 자연을 통과하는 것을 느꼈고, 내게 그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이 그림을 그렸고, 구름을 실제 피처럼 그렸다. 색이 비명을 질렀다. 이것이 절규가 되었다.[3]

그는 나중에 이 이미지에 대한 영감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피처럼 붉게 변했다. 나는 지쳐서 울타리에 기대었다. 푸르스름한 검은 피오르와 도시 위로 피와 불의 혀가 있었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불안에 떨며 서 있었다. 그리고 자연을 통과하는 무한한 비명을 느꼈다.[3][4]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뭉크가 공황발작을 묘사하고 있다고 믿는다.[5][6][7][8]

배경의 붉은 하늘을 설명하기 위해 제기된 이론 중 하나는, 1883년 크라카타우산 분화의 강력한 화산 폭발 효과이다. 이 폭발은 뭉크가 절규를 그리기 약 10년 전인 1883년과 1884년 몇 달 동안 서반구 일부 지역의 노을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9] 이 설명은 뭉크가 표현주의 화가이고 자신이 본 것을 문자 그대로 묘사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학자들이 이의를 제기한다. 붉은 하늘에 대한 또 다른 설명으로는 노르웨이 위도에서 발생하는 "극지방 성층권 구름"(Polar stratospheric cloud)이 원인이라는 것인데, 이 구름은 절규에 묘사된 하늘과 놀랍도록 비슷하게 보인다.[10][11] 그림에 묘사된 장소 근처에 도살장과 정신병원이 있었던 것이 영감을 주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12] 이 장면은 에케베르그 언덕에서 오슬로피오르와 호베되위아를 지나 오슬로를 내려다보는 길의 풍경으로 확인되었다.[13] 작품을 그릴 당시 뭉크의 조울증을 앓던 뭉크의 누이 로라 캐서린이 에케베르그 기슭의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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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라 스페콜라에 있는 페루 미라

1978년, 뭉크 학자 로버트 로젠블럼은 그림 전경의 기괴하고 해골 같은 형상이 페루 미라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뭉크는 폴 고갱처럼 1889년 만국 박람회에서 이 미라를 보았을 수 있다.[15] 손을 얼굴 옆에 두고 태아 자세로 묻힌 이 미라는 고갱의 상상력도 자극했다. 이 미라는 스무 점이 넘는 고갱의 그림 속에서 모델이 되었는데, 그중에는 그의 그림 <인간의 비참함(아를의 포도 수확)>의 중앙 인물과 1897년 그림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의 맨 왼쪽에 있는 노파가 있다.[16] 2004년 이탈리아 인류학자 피에로 만누치(Piero Mannucci)는 뭉크가 피렌체자연사 박물관에서 그림과 훨씬 더 흡사한 미라를 보았을 수도 있다고 추측했다.[17] 그러나 이후 연구에서는 뭉크가 절규를 그린 후에야 피렌체를 방문했으므로 이 이론에 이의를 제기했다.[18]

절규의 이미지는 이인증성 장애를 겪는 개인이 경험하는, 환경과 자기 자신에 대한 왜곡된 느낌에 비유된다.[19]

아서 루보우는 절규를 "현대 예술의 상징, 우리 시대의 모나리자"라고 묘사했다.[20] 이는 현대 인류의 보편적인 불안을 나타내는 것으로 널리 해석되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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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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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석판화

뭉크는 두 가지 회화 버전과 두 가지 파스텔 버전을 만들었다. 첫 번째 버전은 1893년 독일 베를린 또는 노르웨이 오스고르스트란에서 그려졌다.[21] 같은 해에 뭉크가 <생의 프리즈>라고 명명한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전시되었다.[22][23] 이 작품은 오슬로 국립미술관의 소장품이다. 이 버전에는 "Kan kun være malet af en gal Mand!" ("광인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고 쓰인 거의 보이지 않는 연필 낙서가 있다. 그 해에 그린 파스텔 버전은 예비 연구였을 수도 있는데, 이 역시 오슬로의 뭉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895년의 두 번째 파스텔 버전은 2012년 5월 2일 소더비스 인상파 및 현대 미술 경매에서 금융가 레온 블랙에게 1억 1992만 2600달러에 팔렸다.[24][25] 두 번째 회화 버전은 뭉크가 이전 작품들을 다시 작업하던 시기인 1910년에 제작되었다.[26] 이 버전 또한 뭉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뭉크는 1895년에 이 작품의 석판화를 제작했으며, 뭉크가 제작한 여러 인쇄물이 남아 있다.[27] 약 40여 점의 판화가 만들어진 후, 뭉크가 없는 사이에 인쇄공이 원 석판을 재처리하였다.[28]

1893년 회화 버전의 재료 구성은 2010년에 조사되었다.[29] 안료 분석 결과 19세기에 사용된 카드뮴 옐로, 주색, 울트라마린, 비리디안 등의 안료가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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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 낙서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의 절규에 있는 연필 낙서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에 소장된 첫번째 버전에는 왼쪽 상단 모서리에 작은 글씨로 "Kan kun være malet af en gal Mand!"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는 연필 낙서가 있다. 이는 그림을 면밀히 검토해야만 볼 수 있다. 이 낙서는 이 작품이 그려진 지 11년 후인 1904년 코펜하겐에서 그림이 전시되었을 때 처음 발견되었는데, 처음에는 비평가나 전시회 방문객가 적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후, 적외선 사진 촬영과 필적 연구를 통해 이 글귀가 뭉크에 의해 추가된 것으로 밝혀졌다.[31] 뭉크가 1895년 10월 노르웨이에서 그림이 처음 전시되었을 때 비판적인 평론을 받은 후 이 낙서를 추가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뭉크가 가족 내에 만연했던 정신 질환에 민감하여 그 비판에 깊이 상처받았다고 주장한다.[32]

도난 사건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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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는 여러 차례 도난을 당하거나 도난 시도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도난 사건으로 인해 일부 손상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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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2월, 오슬로 국립미술관에서 절규(1893년 판지 템페라)를 훔치기 위해 침입하는 두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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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회수 후 복원 전 국립미술관에 돌아온 절규

1994년 도난 사건

1994년 2월 12일, 1994년 동계 올림픽 개막식 당일,[33] 두 남자가 오슬로 국립미술관에 침입하여 절규를 훔치고 "엉성한 보안에 감사한다"는 쪽지를 남겼다.[34][35] 그림은 올림픽 축제 기간 동안 2층 갤러리로 옮겨져 있었다.[36] 1994년 3월, 범인들의 100만 미국 달러 몸값 요구를 갤러리가 거부하자, 노르웨이 경찰은 영국 경찰과 게티 미술관의 도움을 받아 스팅 작전을 펼쳤고, 그림은 1994년 5월 7일에 손상 없이 회수되었다.[36] 1996년 1월, 4명의 남자가 절규 도난과 관련하여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그중에는 1988년에 뭉크의 사랑과 고통(Love and Pain)을 훔친 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폴 엥거도 포함되어 있었다.[37] 범인들은 항소심에서 석방되었다. 스팅 작전에 연루된 영국 요원들이 위조 신분으로 노르웨이에 입국했기 때문이었다.[38]

2004년 도난 사건

2004년 8월 22일 대낮에 마스크를 쓴 강도들이 오슬로의 뭉크 미술관에 침입하여, 뭉크의 마돈나(Madonna)와 함께 1910년 버전의 절규를 훔쳐갔다.[39] 한 구경꾼이 강도들이 미술품을 훔쳐 차로 도주하는 모습을 촬영했다. 2005년 4월 8일, 노르웨이 경찰은 도난 사건과 관련하여 용의자를 체포했지만, 그림들은 찾아내지 못했고 도둑들이 증거를 없애기 위해 불태웠다는 소문이 돌았다.[40][41] 2005년 6월 1일, 이미 범죄와 관련하여 4명의 용의자가 구금된 상태에서 오슬로 시 정부는 그림의 위치를 찾는 데 도움이 될 정보에 대해 200만 노르웨이 크로네(약 31만 3500 미국 달러)의 포상을 약속했다.[42] 그림들은 여전히 사라진 상태였지만, 6명의 남자가 2006년 초에 강도 계획을 돕거나 강도에 참여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이들 중 3명은 2006년 5월에 유죄 판결을 받고 4년에서 8년 사이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유죄 판결을 받은 비에른 회엔(Bjørn Hoen)과 페터 타랄센(Petter Tharaldsen) 두 명은 오슬로 시에 7억 5천만 크로네(약 1억 1760만 미국 달러 또는 8670만 유로)의 보상금을 지불하라는 명령도 받았다.[43] 뭉크 미술관은 보안 강화를 위해 10개월 동안 문을 닫았다.[44]

2006년 8월 31일, 노르웨이 경찰은 작전을 통해 절규와 마돈나 모두를 회수했다고 발표했지만, 회수 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그림들은 예상보다 상태가 좋다고 전해졌다. 경찰서장 이베르 스텐스루드(Iver Stensrud)는 기자 회견에서 "원본이 100% 확실하다"며 "손상이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고 말했다.[45][46] 뭉크 미술관장 잉에비에르그 위스티에(Ingebjørg Ydstie)는 그림들의 상태가 예상보다 훨씬 좋고 손상을 복구할 수 있다고 확인했다.[47] 절규는 왼쪽 하단 모서리에 습기로 인한 피해를 입었고, 마돈나는 그림 오른쪽에 여러 군데 찢겼고 마돈나의 팔에 두 개의 구멍이 있었다.[48] 수리와 복원이 시작되기 전, 그림들은 2006년 9월 27일부터 뭉크 미술관에서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5일간의 전시 기간 동안 5,500명이 손상된 그림들을 관람했다.[49] 복원된 작품들은 2008년 5월 23일, 오슬로 뭉크 미술관에서 열린 "절규와 마돈나 – 재방문" 전시회에서 전시되었다.[50]

2008년 이데미츠 페트롤륨 노르게 AS는 절규와 마돈나(Madonna)의 보존, 연구 및 전시에 400만 노르웨이 크로네를 기부했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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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 최고가 기록

노르웨이 사업가 페터 올센이 소유한 1895년 파스텔 보드 버전은 2012년 5월 2일 런던 소더비스에서 경매에서 거의 1억 2천만 미국 달러라는 기록적인 가격에 팔렸다(가장 비싼 그림 목록 참조).[52][53] 경매는 4천만 달러에서 시작하여 12분 이상 지속되었고, 미국 사업가 레온 블랙이 전화로 구매자 수수료를 포함하여 최종적으로 1억 1992만 2500달러를 제시했다.[25] 소더비스 측은 이 버전이 뭉크가 그린 네 가지 버전 중 "가장 다채롭고 생생한" 작품이라고 묘사하며, 그림의 영감을 상세히 설명하는 시를 새긴 액자에 뭉크가 직접 손으로 색을 칠했다는 점도 언급했다. 판매 후 소더비 경매사 토비아스 마이어는 이 작품이 "그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며 "세계 예술의 위대한 상징 중 하나이며, 구매자에게 축하를 보낸다"고 덧붙였다.[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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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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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후사일런스는 부분적으로 절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20세기 후반, 절규는 모방되고, 패러디되고, (저작권 만료 후) 노골적으로 복사되어 대중문화에서 상징적인 지위를 얻었다. 아서 자노브는 1970년 책 《원초적 절규》의 일부 판 표지에 이 그림을 사용하였다.[55]

1983-1984년에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은 절규를 포함하여 뭉크의 작품을 모방한 실크 스크린 인쇄 시리즈를 제작했다. 그의 의도는 이 그림을 대량 재생산하여 신성모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뭉크는 이미 이 작품의 석판화를 제작하였다. 이슬란드의 비주얼 아티스트 에르로가 그의 아크릴화 <두 번째 절규>(1967)와 <딩동>(1979)에서 뭉크의 걸작을 반어적이고 불경하게 다룬 것은 포스트모던 예술의 특징으로 여겨진다.[56] 1990년 영화 나 홀로 집에 (영화) 포스터의 케빈 맥컬리스터(맥컬리 컬킨)의 표정은 절규에서 영감을 받았다.[57][58]

2011년 BBC 시리즈 닥터 후에 등장하는 주요 외계인 악당 "사일런스"는 부분적으로 절규에 기반하고 있다.[59]

2013년, 노르웨이 우편국이 에드바르트 뭉크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 시리즈를 제작했는데, 절규는 이를 위해 선택된 네 가지 그림 중 하나였다.[60] 2018년 노르웨이 코미디 듀오 일비스는 1994년에 그림을 훔친 폴 엥거를 주연으로 한 그림 도난을 바탕으로 한 뮤지컬을 만들었다.[61]

삼차신경통(가장 고통스러운 상태로 묘사됨) 환자 지원 단체도 이 이미지를 질병의 상징으로 채택했다.[62]

이모지 U+1F631 😱 face screaming in fear는 대부분 이 그림을 닮도록 렌더링된다.[63]

미국 에너지부 절규

미국 에너지부에서는 미래의 인류 문명에 방사성 폐기물이 미치는 영향을 경고하기 위한 그림문자 중 하나로 절규의 단순화된 버전을 사용하였다.[64]

2018년 MGMT 앨범 Little Dark Age의 표지 아트는 광대 같은 화장을 한 그림의 주제를 닮은 인물을 보여준다.[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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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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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추가 자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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