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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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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렴(鄭磏: 1506년 3월 28일(음력 3월 4일)~1549년 8월 8일(음력 7월 16일)[1])은 조선 전기의 학자, 관료이다. 자(字)는 사결(士潔)이며, 호(號)는 북창(北窓)이다.[2] 본관은 온양(溫陽)[1]이다. 장악원 주부와 관상감, 혜민서의 교수를 역임하였다.[3]
이력
여러 나라 언어에 능통했다.[4] 또한 의술에 정통해 궁중에 여러 차례 불려가기도 했다.[5] 1537년(중종 32년)에 사마시에 합격했다.[1]
부친 정순붕이 을사사화의 주역이 되자 이를 적극 말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여,[6] 관직을 버리고 '거짓으로 미친 체를 하며'[7] 경기도 과천 관악사(冠岳寺), 양주 괘라리(掛羅里), 광주 청계사(淸溪寺) 등에 은거하였다가 44세로 사망했다.[1] 화담 서경덕의 수제자인 박지화와 친한 사이였다.[8] 미수 허목은 "정렴은 남과 이야기 할 때는 단 한마디라도 공자의 학문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니, 그 깨달음은 중과 같고 그 행적은 노자와 같았으나, 사람을 가르치는 데는 성인으로 종지를 삼아서였을 것이다"라고 평하였다.[2]
저서
전기 자료
- 《을사전문록》, 정렴 전
- 성수익, 〈정렴의 행실〉(《삼현주옥》 권 하에 수록됨)
- 허목, 《기언》 권11, 〈청사열전(淸士列傳)〉, 정북창
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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