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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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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음군(濟陰郡)은 전한부터 당나라까지 존속한 중국의 옛 군급 행정 구역이다. 군국제 시행 시에는 제음국(濟陰國), 정도국(定陶國)이 설치됐었다. 중심지는 정도현이다.
전한
한나라에서 원래는 양나라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첫 양왕 팽월 시절의 서울 정도현은 나중에 세워질 제음군의 영역에 있었다. 경제 중5년(기원전 145년) 양효왕 사후 양나라를 다섯으로 분할해 새로 제음나라를 두고 유무의 아들 제음애왕 유불식에게 봉하면서 제음군의 역사가 시작된다. 서울은 정도현에 뒀다. 제음애왕이 후사 없이 죽어 봉국이 폐지되면서 한 조정의 관할로 들어가 제음군이 됐다. 무제가 주를 설치하면서 연주에 속했다.[1][2] 감로 2년(기원전 52년), 선제가 정도나라로 고치고 아들 유오를 정도왕에 봉했다. 건평 2년(기원전 5년), 정도왕 유경을 신도나라로 옮겨 봉하면서 도로 제음군이 됐다.
평제 시기에 시행된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호구 29만 25호, 인구 138만 6278명이 있었다. 다음 속현 목록은 한서 지리지를 따른 것으로, 원연·수화지간(기원전 8년 무렵)의 현황으로 보이며, 총 9현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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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왕망(王莽)이 신나라를 세우고서는 다음 현의 이름을 고쳤다.
후한
140년(후한 순제 영화 5년) 당시 제음군은 11성 133,715호 657,554명을 거느렸다.[4] 212년(후한 헌제 건안 17년), 헌제의 아들 유희(劉熙)가 제음왕으로 책봉되면서 제음국으로 격상되었다.[5]
진
서진대 제음군은 9현 7,600호를 거느렸다. 영가의 난이후 석륵이 연주전역을 점령하면서 진나라의 권역에서 벗어났다. 이후 남연주가 설치되자 강남 일대에서 교치되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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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송
비수대전이후 동진은 후연을 공격하여 옛 연주를 수복했고 옛 제음군 자리에 군을 다시 두었고 서주로 편입되었다. 454년(유송 효무제 효건 원년) 북제음군이 신설되었다. 457년(유송 효무제 대명 원년) 하비군의 속현이었던 수릉현 지역으로 옮겨졌다. 유송대 교치된 연주는 3현 2,305호 11,928명을 거느렸다.[7] 466년(유송 명제 태시 2년)경 북위의 침공으로 인해 송나라가 회수이북 전역을 상실하면서 회남지방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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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제
송말 회남으로 옮겨진 제음군은 남제시기 북서주의 속군으로 편제되었다.[8]
북위
527년(북위 효명제 효창 3년) 서연주로 분리되자 서연주의 속군으로 편제되었다. 서연주가 분리된 직후 제음군에 서연주의 치소를 두었으나 후에 주 치소가 좌성(左城)으로 옮겨졌다. 위나라 때 제음군은 4현 29,836호 83,580명을 거느렸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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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북주때 서연주가 조주(曹州)로 개명되었다. 607년(수 양제 대업 3년) 군현제가 재실시되면서 제음군이 다시 설치되었다. 수나라 때 제음군은 9현 140,948호를 거느렸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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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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