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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이토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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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이토 내각(일본어: 第2次伊藤内閣)은 전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가 제5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1892년 8월 8일부터 1896년 9월 18일까지 존재한 일본의 내각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1896년(메이지 29년) 8월 31일에 내각총리대신을 사임하였고, 같은 해 9월 18일에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조각을 할 때까지 추밀원 의장 구로다 기요타카가 내각총리대신을 임시로 겸임하였다.
이 내각에서 청일 전쟁을 수행하여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영항력을 배제하고, 서양 열국과의 불평등조약을 개정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동아시아의 강대국이자 제국주의 열강 대열에 합류할 발판을 갖추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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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직 기간
개요
직전 내각총리대신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자신의 각료에게도 버림받고 내각을 내팽개치는 사태는 1892년(메이지 25년) 8월 2일에 대명을 받은 이토 히로부미에게도 향후 정권 운영의 불안을 안겼다. 이토 히로부미는 원훈의 입각을 조건으로 조각하는 것을 표명하여 구로다 기요타카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두 내각총리대신 경험자의 입각을 얻어내어 조각을 마쳤다. 이 때문에 ‘원훈 내각’이라고 칭해졌다. 같은 해 11월 27일에 이토 히로부미가 타고 있던 인력거가 마차와 충돌하여 대파하는 교통사고가 일어나 중상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를 대신하여 내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가 임시 내각총리대신 대리를 이듬해 2월 7일까지 지냈다.
민당과의 정비 절감과 해군 예산을 둘러싼 대립에서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화애협동조칙과 6년간 내정비에서 매년 30만엔, 관리의 봉급 1할을 조함비로 충당할 것을 조건으로 타협을 성립시켜 예산안을 통과시켰다.[1] 조약개정 교섭의 말기에 민당(입헌개진당)과 우익(국민협회, 대일본협회 등) 사이에서 높아지는 대외강경파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2번의 중의원 해산으로 맞서 영일 통상 항해 조약의 체결에 따른 치외법권 철폐에 성공하였다.
그 직후 조선에서 발생한 동학 농민 운동에의 군사 개입을 계기로 청일 전쟁이 시작되면서 히로시마에 대본영과 제국의회를 이전하여 전시 체제를 확립하였고, 일본을 승리로 이끌어 청나라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내각의 장기 집권에는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영향이 크다.
하지만 삼국 간섭, 계속되는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으로 인하여 일본의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은 오히려 저하되어 전시 중 정부와 민당의 협조 관계는 점차 붕괴됐다. 한편 1896년에는 항해장려법, 조선장려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는 초연주의를 포기하고 자유당 총재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내무대신으로 입각시켜 자유당의 여당화를 도모하였다. 이어서 전 내각총리대신 마쓰카타 마사요시와 진보당 당수 오쿠마 시게노부의 입각을 계획하지만 오쿠마에게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던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초연주의를 고수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이에 반발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더 이상 정권 유지가 곤란하다고 판단하여 사표를 제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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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국무대신
기타
출신국 : 히젠국 기타 국 |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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