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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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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수(朱鎭洙, 1878년 ~ 1936년)는 일제강점기 때의 독립 운동가로 육영 사업에 힘썼으며 고려혁명당 창당에도 가담했다.
1878년 7월 11일 죽변면 후정리 매정동 (현재의 경북 울진) 출생이다. 청년시기, 한학 공부에 힘쓰는 한편, 지리, 역사, 수학 등 신문학공부에도 힘을 썼다. 독립신문, 황성일보, 매일신문 등을 읽으며 민족의식을 키웠으며,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위태로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결심으로 서울로 올라갔다.[1]
서울로 올라간 주진수는 개화 운동에 투신해 독립협회와 관동학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관동학회 회원들과 논의 후 1907년 울진 고향으로 돌아와 만흥학교를 설립, 직접 교장으로 취임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2]
1909년 조선이 망하기 직전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를 중심으로 비밀 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였고, 주진수는 신민회의 강원 대표가 되어 항쟁계획을 세웠다.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망하자 만주에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모금 운동을 벌였으나, 이 같은 활동에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 때 김구, 이승훈 등과 함께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루었다.[2]
옥에서 나온 주진수는 1911년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와 경학사 설립에 노력했다. 1914년 주병웅, 전오규, 이동휘 등과 함께 소련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하여 대한국민의회를 조직에 참여하였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가담하였다. 김좌진, 이범석 장군의 청산리 전투에서 참모로 활약하여 일본군 17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1926년 이규풍, 최동희 등과 함께 러시아에서 열린 민족혁신파 대표자회의에 대표로 참석하여 고려혁명당 창당에 가담하기도 했다.[1][2] 하지만 이념차이로 고려혁명당이 분열되자 주진수는 다시 소련으로 돌아갔고,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3] 1936년 9월 16일 열망하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59세를 일기로 현 중국의 하아린시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주진수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59년 3월 1일 울진초등학교 입구에 주진수 기념비를 세웠다.[1][4] 1968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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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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