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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러이 페렌츠
오스트리아 제국의 장군 (1799~1868)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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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사람의 이름은 성-이름 순서로 되어 있는 헝가리 이름으로 성은 '줄러이', 이름은 '페렌츠'입니다.
마로슈네메티 에시 나다슈커 백작 페렌츠 줄러이(Ferenc Gyulay de Marosnémethi et Nádaska, 1799년 9월 1일 ~ 1868년 9월 1일[1]), 또는 페렌츠 줄러이, 페렌츠 줄라이, 프란츠 줄라이로도 알려진 그는 헝가리인 귀족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의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총독을 지냈으며, 마젠타 전투에서 패배한 오스트리아군을 지휘했다.
생애
요약
관점
줄러이는 1799년 9월 1일 헝가리의 페슈트에서 이그나츠 줄러이 폰 마로시네메트 운트 나다슈커와 마리아 프라인 폰 에델스하임 사이에서 태어났다.[2]
17세가 된 1816년, 그는 제60 "이그나츠 줄러이" 보병 대대에서 소위로 복무했다.[2] 1820년에는 헤센-홈부르크 후사르 여단으로 중위로 전근되었고, 불과 1년 후에는 황실 울란의 대위로 진급했다.[2] 1826년에는 뷔르템베르크 후사르 여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곧이어 1829년에는 헤센-홈부르크 보병대 부대장이 되었다.[2] 1831년에는 대령으로, 1838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2] 1846년에는 이미 제33보병대대의 중장이었다. 1847년에는 트리에스테 인근의 사단장이자 군사 지휘관이었다.[2]
줄러이의 첫 전시 임무는 1848년 1848년 혁명이 발발했을 때였다. 그는 먼저 폴라에서 이탈리아 국가들의 위협에 직면해야 했다.[2] 그는 폴라에 주둔한 황실 함대가 반란을 일으킨 승무원들에게 장악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는 즉시 이탈리아 태생 선원들을 해임하고, 이미 항해 중인 선박들에게도 같은 조치를 취하라고 경고했다. 그는 트리에스테와 폴라 시를 방어 태세로 전환하고, 선박들을 무장시키며, 부족한 이탈리아인 승무원을 지역 상선에서 온 사람들로 채웠다.[2] 그는 또한 임시 보트 전대도 조직했다. 줄러이는 베네치아에서 철수하는 병력을 이손초강에서 재집결시켰다. 그의 노력 덕분에 나폴리-사르데냐 연합 함대가 이스트라반도의 주요 항구를 기습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2] 쿠스토차 전투는 아드리아 해 연안의 압박을 완화시켰고, 줄러이의 예방 조치는 지역을 확보했다.[2]
1849년에 줄러이는 중장 (야전원수보)으로 진급했고, 그 해 여름 황제 프란츠 요제프에 의해 오스트리아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3] 그리하여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 측에서 1848년 헝가리 혁명에 참여하게 되었다.[2] 그는 6월 28일 라브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이후 코마롬 전투에 참여했으나 초기 단계에서 이탈했다.[2] 이는 부분적으로 황제와 그의 부관 그륀네가 군사 결정을 내릴 때 그의 부서를 건너뛰는 경향 때문이었다.[3] 그는 밀라노로 이동하여 제5군 사령관을 맡았다.[2]
1857년 요제프 라데츠키가 사임한 후, 줄러이는 롬바르디아-베네치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밀라노에 거주했다.
1859년 초,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사르데냐 왕국/피에몬테는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는 이탈리아 영토 침공을 준비하는 듯 군대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4월 23일, 오스트리아는 사르데냐에게 병력을 해제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사르데냐가 거부하자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북이탈리아 주둔 오스트리아군의 사령관으로서, 이제 야전포병대장 계급을 가진 줄러이 백작은 4월 29일 오스트리아와 사르데냐 영토 사이의 경계인 티치노강을 건너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대응하여 파트리스 마크마옹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사르데냐 동맹국을 방어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5월 20일, 스타디온 백작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은 몬테벨로 전투에서 패배했고, 그 후 줄러이는 오스트리아 영토로 퇴각했다. 그는 이후 팔레스트로 전투에서 또 다른 패배를 겪었다.[4]
이후 프랑스군은 티치노강을 건너 오스트리아 영토로 진입하여 작은 전투 후에 보팔로라소프라티치노 마을을 점령했다. 마침내 6월 4일, 오스트리아 주력군과 프랑스 주력군이 마젠타 전투에서 맞붙었다. 줄러이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은 패배했고, 그는 빈으로 소환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주둔 오스트리아군을 직접 지휘했으며, 이후 솔페리노 전투에서도 패배했다. 그의 마지막 군사 작전 중 하나에서 그는 연대장으로 강등되어 만토바를 피에몬테 침공으로부터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만토바 방어에 실패하여 1866년 도시를 넘겨주었고, 결국 새로 형성된 이탈리아에 합병되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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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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