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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롤터 해협
지중해와 대서양의 경계를 이루는 해협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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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롤터 해협(영어: Strait of Gibraltar, 스페인어: Estrecho de Gibraltar)은 대서양과 지중해를 경계짓는 해협이다. 해협의 북쪽은 유럽에 속하는 이베리아반도, 남쪽은 아프리카가 자리잡고 있다. 가장 폭이 좁은 곳의 거리는 14.2 km, 수심이 가장 깊은 곳의 깊이는 900m이다. 가장 폭이 넓은 곳은 58km이다.[1]
이베리아반도 남단의 지브롤터 바위를 따서 이름지었다. 지브롤터 바위는 남쪽 세우타의 몬테 하초와 함께 헤라클레스의 기둥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2]
지브롤터 해협은 스페인, 모로코, 그리고 영국의 지브롤터의 영해로 나뉘어 있지만 해양법에 관한 유엔 협약에 따라 외국 선박의 자유로운 항해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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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역
국제 수로 기구가 정의한 지브롤터 해협의 수역은 서쪽으로 트라팔가르곶과 스파르텔곶을 연결하는 선에서 동쪽으로 지브롤터의 끝부분인 유로파 포인트와 세우타의 끝부분인 알미나 포인트를 잇는 선까지의 수역이다.[3]
지리
요약
관점
지브롤터 해협은 플라이오세에서 제4기 사이에 있었던 조산 운동의 결과 형성된 베티카 산지가 둘러싸고 있고 이후 이어진 풍화로 퇴적된 점토가 해저에 쌓여있다.[4] 육지로 둘러쌓여 있는 지중해는 비교적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유입되는 강수보다 증발하는 수증기의 양이 많아 염도가 높은 편이다. 마이오세 말 메시나절 시기인 5백만년 전에서 6백만 년 전 사이 지브롤터 해협이 조산운동의 영향으로 막혔다 뚫리기를 반복하면서 약 100만 km3(2.2 x 1015 톤) 가량의 소금이 해저에 묻혔다. 메시나절 염분 위기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형성된 암염은 고대 부터 이 지역의 특산물이 되었다.[5] 지중해의 강수 유입과 증발양을 두고 시뮬레이션해 보면 지브롤터 해협이 막혔을 경우 수천년 이내에 지중해 전체가 말라버리게 된다.[6]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유일한 수로로 세계적인 초크포인트이기 때문에 전략적 가치가 매우 크다. 아시아와 서유럽을 잇는 해운 대부분이 수에즈 운하와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고 있다.[7] 2025년 기준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 수는 연간 12만 척에 달한다.[8] 영국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인 1704년 지브롤터를 점령한 이후 지금까지 해외 영토로 유지하고 있다. 스페인은 오늘날까지도 지브롤터 반환을 요구하고 있으나[9] 1967년과 2002년 주민 투표에서 모두 영국 잔류를 희망하였다.[10] 한편 스페인 역시 지브롤터 해협 건너 북아프리카의 세우타를 해외 영토로 하고 있다.[11]
지브롤터 해협이 중요한 길목인 것은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아프리카와 유럽을 오가는 철새 들에게도 지브롤터 해협은 매우 중요한 초크포인트이다. 이때문에 버드라이프 인터내셔널은 지브롤터 해협 인근을 중요조류지역으로 지정하고 있다.[12]
수리학

지중해의 경우 강수 유입이 부족하고 증발량이 많기 때문에 해수면이 자연스럽게 낮아지게 된다. 이에 비해 해수면이 유지되는 대서양의 바닷물이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지중해로 흘러들면서 해수면의 균형이 유지된다. 반면 지중해의 바닷물은 염도가 더 높기 때문에 밀도도 더 크다. 지브롤터의 해저에서는 밀도가 더 높은 지중해의 해양심층수가 대서양으로 유입되게 된다.[13] 지브롤터 해협 서쪽 끝 해저에는 카마리날둔덕으로 불리는 해저둔덕이 자리 잡고 있어서 두 물이 혼합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에 대서양에서 유입되는 표층수와 지중해에서 유출되는 심층수는 층을 이루어 반대편으로 흐른다.[14]
제 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U보트는 이러한 해류의 성질을 이용하여 소음으로 탐지되기 쉬운 엔진을 끄고 몰래 지브롤터 해협을 오갈 수 있었다.[15] 당시 지브롤터 해협은 남북 양쪽 모두 영국이 통제하고 있었지만, 독일이 지중해로 파견한 62 척의 U보트는 모두 이런 방식으로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였다. 발각되어 격침된 U보트는 9척에 불과하였고 10 척의 경우 자체 고장으로 침몰하였다.[16]
한편 심층수와 표층수 사이의 밀도 차이로 인해 중량파가 발생하여 해협 내부의 파동을 생성한다. 이렇게 생성된 파동은 해협 외부까지 전달되며 간혹 100 km까지도 영향을 줄 수 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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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지브롤터 해협 부근에서 가장 오랜 선사 유적으로 약 12만5천년 전 무렵의 네안데르탈인이 남긴 유적이 있다. 이때는 이미 네안데르탈인의 절멸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여서 지브롤터 바위에 남아있는 2만4천년 전 무렵의 유적은 유럽 네안데르탈인의 마지막 거주지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18] 이 지역에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살기 시작한 것은 약 4만년 전의 일이다.
고대 시기 지중해 전체를 항해하였던 페니키아가 기원전 7세기 무렵 지브롤터 해협의 남북 모두에 거점을 마련하였다.[19] 이후 지브롤터 해협은 고대 카르타고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고, 고대 로마와 지중해의 패권을 다툰 포에니 전쟁 시기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였다.[20] 지브롤터 해협은 가장 폭이 좁은 곳이 14.2 Km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후로도 수 많은 군대와 사람들이 해협을 건넜다. 반달족의 왕 게이세리쿠스는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건너가 반달 왕국을 세웠고[21], 이와 반대로 우마이야 왕조의 히스파니아 정복은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진격하였다.[22]
지브롤터 해협의 확보를 위한 정복과 점령은 근세에도 이어져 1415년 포르투갈이 세우타를 점령하였고[23], 1704년 영국은 지브롤터를 점령하고 1713년 자국의 영토로 선포하였다.[11]
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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