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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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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수(眞德秀, 1178-1235)는 원래 신(愼)씨였으나 효종(孝宗)의 휘가 愼과 같은 신(昚)이었기에 피휘(避諱)하여 진씨로 바꿨다. 자(字)는 경원(景元), 후에 경희(景希)로 바꿨다. 출생지에 따라 호(號)는 서산(西山)이며 후세에는 서산선생(西山先生)이라 칭했다. 양절동로(兩浙東路) 처주(處州) 용천현(龍泉縣) 서향(西鄕) 5도(五都) 서산(西山)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복건로(福建路) 건녕부(建寧府) 포성현(浦城縣)(오늘날 복건성福建省 남평시南平市포성현浦城縣) 출신이다. 남송(南宋) 명신이자 유학자이며, 주희(朱熹) 이학(理學)의 일파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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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관점

진덕수는 양절동로 처주 용천현 서향 5도 서산[1]에서 태어났으며, 후에 복건성 건녕부 포성현으로 이사했다. 진덕수의 본성은 신(愼)이었으나, 효종(孝宗) 조신(趙昚)(昚은 愼의 고자古字)의 이름을 피휘하여 진(眞)으로 개성(改姓)하였다.[2]
4세에 독서를 시작하였고 눈 가는 곳마다 달달 암송하였다. 15세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모친 오씨(吳氏)는 가난 속에 힘써 그를 가르쳤다. 같은 군의 양규(楊圭)는 진덕수와 자신의 아이들이 함께 공부하게 하였으며,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었다. 후에 주희 제자 첨체인(瞻體仁)에게 사사하였다.
영종(寧宗) 경원(慶元) 5년(1199), 진덕수는 진사(進士)에 올랐다.
개희(開禧) 원년(1205), 박학홍사과(博學宏詞科)가 되었다.
가정(嘉定) 원년(1208), 태학박사(太學博士)로 승진하여 경연(經筵)을 시봉(侍奉)하였다. 후에 사미원(史彌遠)과 함께 금(金)에 대하여 화전(和戰)을 주잔하여 갈등을 일으켜 사직을 청하였다.
가정 15년(1222), 진덕수는 호남안무사겸지담주(湖南安撫使兼知潭州)가 되었다. 이때 『서산정훈(西山政訓)』을 지었다.
이종(理宗) 보경(寶慶) 원년(1225), 진덕수는 황제의 부름으로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임명되었고 후에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어 학사원(學士院)을 책임졌으나, 얼마 후 사미원과 사이가 틀어져 사직하였다.
소정(紹定) 5년(1232), 사미원이 실각하면서 진덕수는 다시 기용되었고, 천주(泉州)와 복주(福州)의 지주(知州)가 되었다. 천주지주 재임시 진덕수는 1218년 왕자청(王子淸) • 조희각(趙希却)이 이끄는 해적 선단과 1232년 주왕일(周旺一)이 지휘하는 해적 선단을 격파하였다.
단평(端平) 원년(1234), 사미원이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승진하자, 진덕수는 한림학사지제고(翰林學士知制誥)가 되었다. 단평 2년(1235)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으나 병을 얻어 얼마 후 병으로 사직하였고, 동년 5월 초10일 오시(午時)에 사망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일반적으로 진덕수는 정주이학(程朱理學) 계승자로 알려져 있다. 진연곤(陳衍錕)은 "민학의 창시는 귀산(양시楊時)에서 시작하였고, 그 성황은 주자에서 집대성되었으며, 그 끝은 서산에서 떨쳤다(閩學之倡也始于龜山, 其盛也集于朱子, 其末也振于西山)"라고 하였다. 전조망(全祖望) 역시 "건순(建淳)[3] 시기 노학들 이후에 여러 학자의 설이 나왔으나 정학대종이라 할 사람은 서산만한 이가 없다(乾淳諸老之後, 百口交推, 以爲正學大宗者, 莫如西山)"고 하였다.[4]그러나 학자들은 그가 육구연(陸九淵)의 설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저서로는 『서산갑을고(西山甲乙稿)』, 『대학연의(大學衍義)』, 『서산선생진문충공문집(西山先生眞文忠公文集)』 등이 있디. 뿐만 아니라 진덕수는 유명한 시사(詩詞) 작가였다. 진덕수 19대손 진채(眞采)는 『서산연보(西山年譜)』를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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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폐지의

남송 개희 2년(1206) 5월, 금 장종(章宗) 태화(泰和) 6년, 주전파 한탁주(韓侂冑)는 금에 대하여 전쟁을 일으켰으니 이를 개희북벌(開禧北伐)이라 한다. 그 결과 남송군은 금군에 패배하였다. 사미원을 수장으로 하는 주화파는 이로 인하여 세력들 떨치고 일어났다. 가정 원년(1208), 남송은 결국 "백부와 조카 관계를 맺고 세폐는 은과 견 각 30만으로 늘었으며, 경계는 예전처럼 하는 것(伯姪關係, 歲幣增爲銀絹各30萬, 疆界如舊)"으로 금과 가정화의(嘉定和議)를 맺었다.[5][6] 가정 7년(1214) 7월, 금 선종(宣宗) 정우(貞祐) 2년 7월, 금은 사신을 보내어 금의 수도를 북송의 옛 수도 변경(汴京)으로 옮겼다고 고지한 후, 남송은 세폐 지급 반대 주장이 일어났다. 그중 진덕수는 같은해 7월과 11월에 세폐를 파기와 북벌의 주장을 제기하였고, 주전론이 지지를 받았다.[7]
입장 변화

진덕수의 가정 연간 세폐 논쟁의 입장에 대하여, 이전에는 진덕수의 주화론 반대와 세폐 중단에 주의하였지만, 가정 6년(1213) 금에 대한 그의 태도는 금을 지원하여 몽골군에 맞서는 것이었다. 진덕수는 황명에 따라 금에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이를 빌미로 연구에서는 몽골과의 교섭이 가장 처리하기 힘든 상태였다고 제기한다. 금의 변경 천도를 안 남송에서는 세폐 반대 의견이 일면서 진덕수는 "이로 인하여 (금을) 위무하나 오히려 힘으로 하기 쉽다(因而撫柔, 尙易爲力)"는 입장이었으나, 세폐 반대 입장으로 바뀌고 주전과 북벌을 지지하였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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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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