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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중앙대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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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중앙대교당(天道敎 中央大敎堂)은 일제 시대의 천도교의 총본산 교당이며, 조선 시대 말기 때 동학 농민 운동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간략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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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혼란한 사회상과 더불어, 아울러 기존 종교인 불교·유교·선교·천신숭배사상은 그 존재 가치가 약해졌다. 이때 서학 천주교의 유입은 서민층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에 대응하여 나타난 것이 동학이다. 최제우1860년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을 선포하고 동학을 창시하였다. 손병희1897년 동학의 제3대 교주로서,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였다.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손병희의 발의로, 1918년 4월에 부구(部區) 총회에서 중앙대교당을 신축하기로 결의했고 그해 12월에 터를 닦는 의식을 치렀다. 그런데 바로 착공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조선총독부에서 공사허가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교당이 너무 크다는 것과 중앙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는 것이었는데, 천도교가 민족독립운동에 활발히 참여했던 종교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천도교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불허한 것이다.[2] 중앙대교당 건립을 명목으로 성금을 모았으나 실제로는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용되어 독립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로 인해 건립 공사가 지연되기도 했다.

그래서 천도교 측에서는 교당 크기를 절반으로 줄였고 겨우 허가를 받았다. 다음해인 1919년 7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921년 2월에 완공하고 입주했다. 공사비는 교인들의 성금을 모아 충당했다. 1호 당 10원 씩, 대략 500만 원 정도를 모았고 공사비로는 22만 원(사무실 포함 27만 원)을 사용했으며, 남은 돈은 전액 3.1운동 이후에 세워진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자금과 기타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여졌다 3.1 운동

완공 후 중앙교당은 서울시내 3대 건물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미적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지금까지 천도교인의 종교 의식 및 문화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1978년 12월 18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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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같이 보기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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