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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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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국(樂浪國) 또는 최씨낙랑국(崔氏樂浪國)은 1세기경인 원삼국시대 때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고 비정되는 국가이다. 추정하는 위치나 이름으로 인해 한사군 중의 하나인 낙랑군과의 관계를 두고 논란이 있다. 문헌에 등장하는 최리라는 낙랑국 왕의 존재로 편의를 위해 최씨낙랑국이라고도 부른다.
역사
서기 14년, 신라가 왜의 침입을 받은 것을 기화로, 낙랑 역시 신라를 공격하였다.[1] 《삼국사기》에 따르면, 낙랑의 왕 최리(崔理)는 서기 30년 경에 옥저(沃沮) 지역으로 사냥을 나온 고구려의 왕자 호동(好童)을 만나 사위로 삼았다. 호동은 고구려로 돌아간 후 최리의 딸(낙랑공주)에게 은밀히 서신을 보내 낙랑의 고각(鼓角)을 부수도록 하였고 32년에 낙랑을 기습하여 항복을 받아낸다.[2] 신라 본기에 따르면 37년에 낙랑의 백성 5천여 명이 신라로 와서 투항하였으며 고구려 본기에도 37년에 낙랑을 멸망시킨 기사가 있어, 32년으로 기술한 위의 기록과 멸망 시점이 엇갈린다. 32년부터 시작된 낙랑과의 전쟁이 37년에 종결된 것으로 보기도 하며, 37년에 멸망한 낙랑을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으로 보기도 한다. 대무신왕#낙랑 정벌에 자세한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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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과 낙랑군
조선시대까지는 낙랑과 낙랑군을 같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에 일반적으로 낙랑군의 위치로 파악하였던 평안도 및 황해도 일대가 낙랑의 위치로 비정되었으며, 박지원 등의 일부 실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 지역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낙랑을 한사군(漢四郡)으로 보는 기존의 시각에는 중국 측 기록에 낙랑군이 정복된 사실이 없고 낙랑왕 최리의 존재 역시 등장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이에 따라 낙랑군과 낙랑을 별도의 존재로 파악하는 시각이 대두되었다. 주요 주장으로는 낙랑군에 소속된 여러 국읍(國邑) 가운데 하나였다는 시각[3], 호동이 옥저로 사냥을 나갔던 기록에 주목하여 낙랑국을 옥저 일대의 부족 국가로 비정하는 시각[4] 등이 있다.
낙랑군은 원(原)고조선 세력, 낙랑국은 위만조선 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5] 중국 사서 기록을 살펴보면 기자와 연관된 원고조선 세력과 그렇지 않은 위만조선 세력을 구별하여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32년 한은 낙랑국을 공격한 고구려를 문제삼지 않고 오히려 왕호를 회복해 주었다는 사실도 낙랑국은 낙랑군의 군현 통치를 어렵게 하는 토착 세력과 관련있음을 시사한다. 고구려에 멸망한 낙랑국 유민은 신라로 투항해 오는데 이들을 위만조선 세력으로 보면 신라를 세운 진한인이 연 지역에서 진의 역을 피해 왔다는 기록과도 부합한다는 주장이다. 실제 위만은 연나라의 혼란기에 1,00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하였고, 위만조선 말기에 조선의 상 역계경이 2천여 호를 이끌고 진국(辰國)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어 위만조선계의 진한 지역 이동을 확인할 수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위만조선 멸망 무렵에 경상도 지역에 전국 철기 문화의 유입이 확인된다. 즉 신라는 위만조선과 관련 있으며, 신라를 괴롭힌 낙랑군은 원고조선 세력과 관련 있음을 알수 있다.
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기원전 1세기에 있었던 낙랑국은 한민족이 세운 독립 국가이며, 한나라가 세운 낙랑군은 랴오닝성 지역에 따로 존재하였다고 주장한다.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의 고분 및 유물들이 모두 낙랑국의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다.[6] 또한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요동 또는 요서 일대로 비정하고, 기존의 낙랑군 위치인 평안도 지역에 낙랑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7] 동예 일대에 위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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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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