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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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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군 영웅 최윤구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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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적과 이명》
최윤구(崔允龜)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지촌리(동경) 사람이다.
1885-8-23~1940-2-15
본관은 시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후손 경주(慶州) 최씨 이며 사성공파(司成公派) -예 이다.
최봉수(崔奉壽).김응자(金應自)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28대 손 호적명은 최현구(崔鉉九)이며 호는蒼岡 항쟁명:최윤구(崔允九.崔允求).최운구(崔雲龜).최윤갑
(崔允甲).최동경(崔東京.崔世雄).최윤규(崔允奎.崔允珪)崔久珪.崔應九등이 있음)

향리에서 동경서당에서 공부하여 훈장으로 지내다가 면 서기로 근무중
《활동 사항》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대한(韓)독립만세의 기(현수막)를 만들때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 중 한(韓)자를 적어 내었다.
국민대회 유생으로 참가 후 일본군경이 추적하여 중국으로 망명하게된다.
그는 아내 밀양 박씨와 기차를 타고 무사히 이역만리 만주에 도착한다.
얼마후 1919년 7월에 한교공회(조교공회)에 외교위원으로 참여한다.
■1922년에는 통의부(統義府) 입단하여 맹활동을 하였다.
■1923년~192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 참의부(參義府)에서 김창대.김창천.김창강(金蒼大.金蒼天.金昌天.金昌岡.金蒼岡)이름으로 제5중대장과 제1중대장을 하면서 압록강 연안에서 군자금 징수를 하였다.
■1927년 6월 1일 부터는 참의부 군사위원(군사부장) 최동경.최세웅.한세진(崔東京.崔世雄.)이름으로 군사부장 겸 제2중대장을 맡아 대일 항전에 싸워 나갔다.
■1928년에는 참의부 제3중대장 한세진(韓世振.崔世雄)이름으로 제3중대장을 엮임 하였다.
■1929년에 참의부.정의부.신민부 삼부통합에 여기에 참여 하였다.이른바 민족유일당 이였다. 이어 국민부.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의 설립을 이루어 낸것이다.조선혁명군 군사위원회 아래 3개사 8개중대를 편성하였다.
이중 崔允龜는 제1방면 7중대장으로 활동 하였다.
제1방면[신빈현.유하현] 제3중대장 金得海 제7중대장 崔允龜
제2방면[통화현.즙안현] 제1중대장 崔 峰 제2중대장 趙化善 제3방면[관전현.환인현] 제4중대장 金京根 제8중대장 金昌善
제6중대장[국민부공안대 임시편성] 張明道 제5중대 유격대[길림.지린]을 정하였다.
혁명군인은 군규(軍規)를 엄수하고 군대 책임자의 성명은 물론 군사 행동에 대해서 절대 비밀을 엄수한다. 라고 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오후 10시 30분경 김세호(金世浩)·문광덕(文光德)·채규원(蔡奎元)·윤석윤(尹石允) 등과 함께 권총으로 무장하고 펑톈성(奉天省) 창바이현(長白縣) 16도구(道溝) 만보강(萬寶崗) 부곡(釜谷) 심교감(沈校監)의 집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1930년에 들어서서 장백현에서 삼부에 속에 있던 대원들과 지방위 독립운동가의 밀고로 피해를 입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崔允龜대장은 동지들과 취췌 하러 『흥경(興京)에서- 장백현』 출동하여 4개부락을 전수조사하여 노름판을 단속 하였고 가정파탄이 나고 심각한 독립운동가 밀고등을 해결하고 군자금 90원을 취득했다.
■1932년에 본격적인 한중연합으로 대일 항전에 나서게 된다.2월초 崔允龜는 조선혁명군 제2소대장을 거쳐 조선특무대 사령부 성립후 8 개 지대로 편성한다.
그중 崔允龜는 제 7 지대장(支隊長)을 맡는다.원 조선혁명군 제 2 중대장과 제 4 사 사령관을 엮임하면서 영릉가성 전투와 청원현.흥경현전투.쾌대모자 단독 전투에서 적 80여 명을 전멸시켜 영웅적인 전투를 하여 명성과 더불어 대 승리를 하여 한.중간에 협력 동지로 가까워 지는 계기가 되었다.조선 동포와 중국 국민들도 대단히 환호 하였다.
일본 총독부에서는 독립군인들에게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중국인 의용군 왕봉각 총사령에게 2만원 양세봉총사령에게도 2만원 그리고 박대호.최윤구.조화선.한검추 간부에게 각각 1만원씩의 현상금을 걸어 체포 할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동조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1933년~1934년에는 조선혁명군 제7중대장으로 통화현 쾌대무자 전투에서 승리 하였으며 군사위원회 위원등 활동과 정미소를 운영하는 박창선에게 쌀(백미)당시100 가마의 값인 현금으로 군자금을 받았다.그리고 조선총독부등 에서는 최윤구에게 현상금 1만원을 내걸었다.
조선일보, 1935년7월13일자 양서봉 피살이후 국민부 部署(부서)개정(改定)
재차 활동을 획책(劃策) 제2사령 崔應九(崔允九) 기사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1935년에 조선일보 신문에서는 최윤구가 제2사령으로 선임된 기사를 볼수있다. 이어 1936년 1월 17일 이상관(李相寬)·김두칠(金斗七)·김경근(金京根)·윤일파(尹一波) 등과 함께 조선혁명군 제2회 군민대표회의(軍民代表會議)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군민대표회를 폐지하고 의사원(議事院)을 신설하기로 하였다. 문무경(文武卿)·이송관(李松寬)·김언진(金彦眞) 등 9명과 함께 의사원 의원(議員)에 선임되었다. 조선혁명군 제2사(第)2(師) 제1연대장, 서구사판소(西區査判所) 사판으로도 선임되었다.
■1937년 4월 이후 일.만군의 대토벌을 감행하여 변절자가 대거 속출하자
최윤구(崔允龜)는 박대호와 대원 60여 명을 이끌고 동북항일연군과 합류하게 된다.
■1938년3월말 제1로군 제1군장 양정우와 협의하여 한인독립사를 설치하여 함께 싸울것을 협력 하였다.이에 崔允龜가 사령으로 추대하고 朴大浩는 참모장(정치지도원)으로 임명하고 연대하여 항일투쟁에 전개 하였다.
■1938년 이후에도 동북항일연군과 연대하여 활동하였다. 처음에는 동북항일연군 제1군 경위연대 산하 교도대대에 속해 있다가 7월경 경위연대가 경위여단으로 확충될 때 갈라져 나와 제1군 교도대대 대대장 겸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중국 길림성 樺甸市 “1938년 말 양정우가 거느리는 抗聯(항련) 1로군 警衛旅(경위려)와 少年鐵血隊(소년철혈대)는 紅石砬子(홍서랍자) 강남 小柳樹河子(소유수하자)에서 야간을 틈타 僞靖安軍(위정안군)(만주국군)을 기습하여 적군 100여 명을 섬멸하고 적기 1대를 격추시켰다" 화가난 일.만군은 만회하기 위해 통화현에 본부를 두고 병력을 군.경등 연합하여 토벌하게된다.
■1940년1월 마비고산 전투에서 아군은 병력을 많이 잃었다.이어 僞靖安軍(위정안군)들은 계속해서 귀순자들을 앞세워 양정우.최윤구가 이끄는 부대를 대대적으로 토벌하기위해 병력 600여 명이 포위(일명 참빛 머리빚기)작전으로 양정우.최윤구를 추적하여 대대적으로 격전이 벌어 진다. 아군적군 할것없이 전사 하였다.
■그날이 1940년 2월 15일 최주봉 증 귀순자들이 인솔한 일 · 만(日滿) 연합 토벌대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楊靖宇)를 추적할 때 최윤구는 교도대대를 이끌고 양정우를 엄호하다가 전사.순국 하였다,
그후 양정우도 8일만에 전사하고 만다.
《상훈과 추모》
상훈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되었다..
서울시 성북구 정릉3동 (삼각산) 산 87-1 "국가보훈부가 설치.관리"하고있는 위령탑과 여래사 봉안소에 나라를 위해 순국한 373위 영령들의 위패를 모신 순국선열봉안소 및 위령탑. 1958년 2월 5일 대한불교조계종 여래사는 조국 독립을 위하여 민족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인 순국선열 373인의 위패를 봉안하는 봉안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순국선열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위령탑을 세웠다. 이에 위령탑에 최윤구(崔允龜)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리고 순국선열봉안소에 崔允龜 위패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容疑朝鮮人名簿』(朝鮮總督府 警務局, 1934)
1.단행본 장세윤, 『양세봉–남만주 최후의 독립군 사령관』(역사공간, 2017)
2. 논문 장세윤,「조선혁명군정부 연구」(『한국독립운동사연구』 11,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3. 경윤호, 「조선혁명군의 성격 연구」(『부대사학』 19, 부산대학교 사학회, 1995)
4. 장세윤, 「조선혁명군 연구」(『한국독립운동사연구』 4,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0)
5. 황용국, 「조선혁명군 역사에 대하여」(『국사관논총』 15, 국사편찬위원회, 1990)
6. 정원옥, 「양세봉:조선혁명군 총사령의 연구」(『국사관논총』 8, 국사편찬위원회, 1989)
7. 이명영.[권력의역사]1983]
8.조선일보 뉴스기사1935년7월13일자 (1935.조선혁명군제2사령)
9..동아일보뉴스기사(1932.04.22(조선혁명군 중대장)
10.신한민보 1934년11월15일자[출처] 만주 조선혁명군과 중국의용군의 합작낙보|
11.원전 新京派遣員, 「朝鮮革命軍의 狀況에 關한 件」, 1937. 6.
12.金學奎, 「지난 30년간 중국동북지방의 한국혁명운동(속전)」, 『光復』 第1卷 第4期, 1941. 6. 20.
13.「中國 9·18事變 後 朝鮮革命黨在東北工作經過狀況(軍事工作에 限함)(來稿)」, 『震光』 제6호, 1934. 9.
1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0, 1976.
15.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 4, 1988.
16.국사편찬위원회 편, 『(신편)한국사』 50, 2001.
17.장세윤,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18.김주용·박환·조재곤·한시준·한철호, 『국외항일유적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19.朴昌昱, 「朝鮮革命軍과 遼寧民衆抗日自衛軍의 聯合作戰」, 『韓民族獨立運動史論叢』, 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論叢刊行委員會, 1992.
20.譚譯·王駒·邵宇春, 「9·18事變後 東北義勇軍과 韓國獨立軍의 聯合抗日述略」, 『國史館論叢』 44, 국사편찬위원회, 1994
21. 傳波, 2007 遼東抗戰 硏究 (2008.11)44-57p [沈阳] 료령민족출판사 (出生-1885-慶北淸道-崔允龜.崔允九-鉉九)

22.조선일보 1934년 10월 1일 (소화9년)
국민부(國民府) 무장대가 집단 부락을 방해 추계(秋季)의무금 강제로 징수(徵收)
환인현(桓仁縣) 지방 제6구서 -----
[봉천] 모체 작전에 의하면 환인현 제6구에 근거를 두고 있는 국민부 조선●●군에서는 제 6중대장 장명도(張明道)와
제7중대장 최윤구(崔允九) 이하 무장군 이십여 명을 각지에 파견하여 추가 의무금을 각자 징수하며 더욱이
집단부락 편성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방해를 하는등 또는 민회측 지도를 바꿀때는 용서없이 엄중한 처벌을 하겠다고 위협함으로 이지방의 농민들은 극히 공포증에 지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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